미세먼지보다 무서운 공해, 스포일러 공포증 

by.박혜은(더스크린 편집장) 2019-07-08조회 315
기생충 스틸

봉준호 감독의 편지를 받았을 때 확실히 기분이 묘했다. <기생충>(2019) 기자 시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받았을 그 편지 얘기다. “부탁드립니다”로 시작하는 공식적인 편지는 단어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간곡했다. 기자 시사에서 리뷰 공개 일자 등을 명시한 엠바고 서명을 받는 경우가 많다. 상영 전후 “기사 작성 시 영화의 결말에 관한 스포일러 자제를 부탁드린다”라는 안내 멘트를 듣는 일도 빈번해졌다. 하지만 감독이 직접 쓴 편지를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스토리의 크고 작은 고비마다 관객들이 때론 숨죽이고, 때론 놀라며 매 순간의 생생한 감정들과 함께 영화 속으로 빠져들기를, 만든 이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감독이기 전에 열렬한 관객인 봉준호 감독의 편지는 ‘당신의 사인을 받았으니 법적 책임을 물을 수도 있습니다’라는 공식 문서보다 힘이 셌던 것 같다. 

<기생충>이 개봉하고도 한동안 ‘스포 공포’ 없이 관련 기사를 읽을 수 있었다. 영화를 본 분들은 아시다시피 <기생충>은 눈밭을 굴러 내려오는 눈덩이처럼, 러닝 타임이 진행되면서 이야깃거리가 쑥쑥 불어나는 영화다. 진즉 ‘해설’ 혹은 ‘분석’이라는 제목을 달고 엔딩까지 탈탈 털어낸 기사가 나올 법했지만 매체들의 ‘자발적 엠바고’ 기간은 꽤 길었다. 거의 모든 정보가 ‘즉시’ 거의 모든 곳으로 퍼져나가는 네트워크 시대에 봉준호 감독의 편지 한 장이 정중하게 미디어에 질문하는 것 같았다. 그토록 ‘빠른’ 정보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어벤져스: 엔드게임>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 이하 <엔드게임>)이 쏟아낸 다채로운 ‘역대 최초’ 기록을 살펴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역대 최단기 관객 1백만 명 돌파. <엔드게임>은 개봉 당일 첫 상영 4시간 30분 만에 관객 수 1백만 명을 넘었다. 너무 빨라서 ‘오보’ 의심을 받았을 정도다. 이전 기록 보유작은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2018)으로 개봉 당일 오후 5시 반 경에 관객 수 1백만 명을 돌파했다. 화제성을 따지면 <엔드게임>의 압승이 당연해 보이지만,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이 6월 6일 현충일 개봉한 걸 감안하면 평일 개봉한 <엔드게임>의 기록이 더욱 놀랍다.  

화제작 한편이 전국 상영관에 도배하다시피 내걸리는 ‘와이드 릴리즈’ 탓에 관객 수 돌파 기록은 마치 단거리 경주 기록처럼 매번 당겨진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엔드게임>의 1백만 돌파 기록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엔드게임>의 러닝 타임은 무려 3시간 1분. 한번이라도 더 상영하고자 대부분 극장에서 오전 7시부터 조조 상영을 시작했고, 극장별로 차이는 있지만 10~20분 간격으로 회차가 이어졌다. 뭉툭하게 계산하자면, 첫 상영 4시간 30분 만에 달성한 1백만 관객은 오전 7시부터 8시 반 사이 영화를 본 조조 관객만으로 채워진 셈이다. 개봉 당일 총 관객 수는 약 138만 명. 소위 ‘프라임 타임’ 관객보다 조조 관객이 2배 이상 많았다는 뜻이다.

좋아하는 영화를 누구보다 빨리 보고 싶은 ‘덕심’만큼이나, ‘스포 폭격’이 쏟아지기 전에 영화를 훼손 없이 즐기려는 관객들의 조바심이 작용했다고 본다. 특히 <엔드게임>은 개봉 전, 해외에서 도둑 촬영된 주요 영상이 유출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관객들의 스포일러 공포증이 극에 달했다. 기상천외한 스포일러 소동극의 주범은 개인이었지만, 주요 장면 묘사가 대부분인 리뷰를 경쟁적으로 쏟아낸 미디어도 관객의 질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유주얼 서스펙트>

전설로 회자되는 “절름발이가 범인이다”(유주얼 서스펙트, 1996),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다”(식스센스, 1999) 시절의 스포일러가 웃지 못 할 해프닝이었다면, 21세기 관객에게 스포일러는 미세먼지 같은 공해이자 공포다. 누구나 즉각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온라인 네트워크 환경이 최근의 스포일러 공해를 증폭시킨 건 맞다. 하지만 인터넷은 거들 뿐. 스포일러의 본질은 결국 ‘정보의 파워 게임’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보는 힘이다. 스포일러의 기저에는 ‘정보’라는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자의 쾌감이 자리한다. 상대에게 지금 그 정보가 필요한지는 중요치 않다. 하지만 미디어라면 ‘남보다 빨리, 많이 확보한 정보를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질문을 곱씹어야 한다. 제 아무리 속도전에 치이고, 클릭 수에 목말라도 ‘이 정보가 지금 왜 필요한가’라는 고민이 필요하다. 봉준호 감독의 간곡한 부탁의 편지가 뜨끔했던 건, 이 고민을 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디어가 많은 정보를 독점하고 그 정보를 미디어의 일정에 따라 발행하면 그만인 때도 있었다. 스포일러는 무슨. 관객들은 몇 줄짜리 영화 소개도 반겼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미디어가 독점적 정보를 얻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관객들은 과다 공급되는 정보 중에서 더 까다롭게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만을 고른다. 그나마 ‘조금 빨리 얻는 것’ 외에 정보 독점력을 잃어가는 우리 미디어들은 속도전에 내몰리다가 스포일러 공해에 합류하고 말 것인가. 글쎄, 단박에 답을 낼 고민은 아니다. 

다만 봉준호 감독의 ‘스포금지’ 부탁 편지 이후 변화의 싹이 보이는 듯하다. 제약은 창조의 동력이라더니, <기생충>에 관한 새로운 시선과 독특한 형식이 돋보이는 기획 기사가 많았다. 영화를 아직 못 본 관객을 위한 ‘프리뷰’와 영화를 본 관객을 위한 ‘심층 리뷰’가 순차적으로 노출됐고, 주연 배우들은 물론 탁월한 조연 배우까지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를 차근히 받았다. 물론 읽을거리가 많은 영화의 풍성한 텍스트 덕이기도 하지만, 스포일러를 피하려는 미디어들의 고민 덕도 크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앞으로 시사회장에서 더 자주 감독들의 편지를 받을 지도 모른다. 그때는 지금보다 덜 뜨끔해지면 좋겠다. 아니 “뭘 이런 걸 다”라고 빙긋 웃을 수 있으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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