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의 <초록물고기>(1997): 대중영화와 작가주의 노선의 완벽한 만남 한국영화사 100년

by.정종화(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2019-01-10조회 1,981
초록물고기

1995 - 1999

1990년대 중후반 한국 사회와 영화계 

한국 사회가 언제 평탄한 적이 있었을까 싶지만, 1990년대 중후반 역시 엄청난 시련과 문화적 역동이 함께한 시기였다.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개혁 행보로 국민의 지지를 얻었지만, 정권의 부패에 1997년 국가 부도 사태까지 직면하며 국민을 궁지로 내몰았다. 6·25전쟁 이후 최대 국난이라 불린 외환위기는 1997년 12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고서야 간신히 넘길 수 있었고, 바로 그때 1971년부터 대통령에 도전했던 김대중이 당선되며 1998년 국민의 정부가 서막을 올렸다. 하지만 새로운 희망을 품기에는 국민의 삶이 너무 고단했다. 생활고로 인한 자살과 ‘IMF 생계형 범죄’가 속출하는 가운데, 보험금을 받으려는 아버지가 어린 아들의 손가락을 자른 끔찍한 사건이 그 비극의 정점을 찍었다. 2000년을 기점으로 눈물의 카타르시스로 영화적?사회적 갈등을 봉합하는 신파·멜로드라마 장르가 약화되고, 잔혹한 폭력이 전시되는 ‘조폭영화’ 그리고 범죄스릴러 장르가 득세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1990년대 후반의 한국 사회가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1990년대 중후반은 ‘문화의 시대’라고 불리기 시작한 때였다. 새로운 밀레니엄과 함께 찾아온 ‘문화의 세기’, 그 전조였을 수도 있다. 정치, 경제 등 사회 전반이 문화라는 프리즘으로 매개되었고, 정치·경제 권력으로부터 예속되지 않는 문화 영역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1995년 1월 TV 드라마 <모래시계>가 한국 정치사와 멜로, 액션 장르를 결합하며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온 국민의 뇌리에 ‘조폭’ 이미지를 각인하기도 했다. 그해 ‘서태지와 아이들’이 ‘시대유감’의 노래 가사 심의로 공연윤리위원회와 맞서는 사건이 있었고, 1996년 1월 그들의 은퇴 기자회견은 10대뿐만 아니라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1996년 6월에는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음반 사전심의가 폐지되었다. 이는 가수 정태춘·박은옥이 사전 심의를 받지 않은 ‘불법’ 음반을 제작하고 유통하는 방식으로 1990년부터 투쟁해온 결과이기도 했다. 한국 대중예술의 영향력을 의미하는 ‘한류(韓流)’라는 용어가 중국의 한 매체를 통해 처음 등장한 것도 1997년이다. 

할리우드 외화 직배로 위기를 맞은 한국영화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고 문화계의 중심으로 진입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다. 물밀듯이 들어오는 외화의 틈바구니 속에서 1997년부터 25% 선을 회복한 한국영화 점유율은 1999년 39.7%까지 올랐다. 서울 관객 기준으로 1995년 <닥터 봉>(이광훈)이 37만, 1996년 <투캅스 2>(강우석)가 63만, <은행나무침대>(강제규)가 45만, 1997년 <접속>(장윤현)이 67만, 1998년 <편지>(이정국)가 72만, <약속>(김유진)이 66만, 1999년 <쉬리>(강제규)가 244만, <주유소 습격사건>(김상진)이 96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영화 흥행을 견인했다. 특히 <쉬리>는 전국 스크린 수가 600개도 되지 않던 시절, 처음으로 전국 58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2000년대 한국영화의 ‘1천만 관객 시대’를 예고했다. 

1990년대 중후반의 산업적 활력이 작가주의 감독의 시대를 만들어낸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젊은 감각의 영화사들은 흥행뿐만 아니라 작품성까지 고려할 패기가 있었고, 작가라 불리는 신인 감독들 역시 대중영화와 예술영화의 접점을 적극적으로 고민했으며, 이를 고대하는 젊은 관객들이 한국의 영화문화 지형을 새롭게 짜고 있었다. 특히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로 데뷔한 홍상수가 <강원도의 힘>(1998)을 이어가며 모더니즘 영화의 본격적인 흐름을 만들었고, <악어>(1996)로 데뷔한 김기덕은 원초적인 에너지와 남근 중심적인 폭력성이 찬반의 평가를 낳는 가운데 국내외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2004년 베를린(<사마리아>)과 베니스(<빈집>)의 감독상을 석권하기도 했다. 치열한 창작의 고통을 원고지에서 스크린으로 옮겨간 이창동 감독은 <초록물고기>(1997)에 이은 <박하사탕>(2000)으로 세계적인 작가주의 감독으로 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편 박찬욱 감독은 영화광으로서의 취향을 앞세운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1992)과 <3인조>(1997)를 내놓으며 관객과의 접점을 찾는 데 더딘 행보를 보였지만, <공동경비구역 JSA>(2000)로 흥행과 비평을 두루 만족시키며 2000년대 ‘웰메이드(well-made) 영화’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단편영화, 시네마테크, 국제영화제, 영화저널 등 한국의 영화문화가 새롭게 꽃피기 시작한 점도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이다. 단편영화가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가능성을 점치는 통로가 된 것도 바로 이때다. 특히 1994년부터 4년간 대기업(삼성나이세스)이 주관한 서울단편영화제를 통해 임순례, 김태용, 민규동, 곽경택, 정지우, 정윤철, 윤종찬 등 주요 감독이 배출되었는데, 국립영화학교라 할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졸업생과 유학파 출신이 많았다. 1995년 한국 최초의 영화전문 주간지 「씨네21」에 이어 마니아층을 겨냥한 「키노」가 창간되었고,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출범을 위시로 1997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이어진 것도 한국 영화문화의 자양분이 되었다. 

소설가 출신 감독의 치열한 행보

1954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창동은 경북대 국어교육과 졸업 후 1981년부터 1986년까지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살았다.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 부문에 「전리」가 당선되어 소설가로서의 삶도 시작했는데, 1992년 한국일보 문학상을 받은 「녹천에는 똥이 많다」 등의 소설을 썼다. 영화계 입문은 박광수 감독이 권유했다고 한다. 마흔이던 1993년 <그 섬에 가고 싶다>(박광수)의 각본과 조감독으로 첫 영화 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충무로의 전통적인 도제식 연출부를 거친 게 아니라 문학적 자산과 치열한 창작 정신을 바탕으로 영화계에 진입한 경우다. 1995년에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박광수)로 그해 백상예술대상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영화 세계가 형성되는 데 1980년대 후반 ‘코리안 뉴웨이브’ 감독들과의 영향 관계도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감독 데뷔는 명계남, 문성근, 여균동이 만든 이스트필름의 창립작 <초록물고기>에서다. 이 영화는 이창동 감독 만들기 프로젝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해 주요 영화제의 각본상, 신인감독상, 감독상을 휩쓸었다. 두 번째 영화 <박하사탕>은 스무 살의 순수한 청년 영호가 1980년 광주의 경험으로 점차 영혼이 파멸되어가는 것을, 1999년에서 1979년으로 2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이 영화는 2000년 1월 1일 0시에 개봉했는데 21세기라는 막연한 희망에 들뜬 한국 사람들에게 비극적 현대사를 상기시키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체코 카를로비바리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고, 칸국제영화제 감독 주간에 초청됐다. 세 번째 영화 <오아시스>(2002)에서는 장애인 여성과 하류계층 청년의 러브스토리를 통해 한국 사회의 기저를 형성하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민낯을 드러냈고, 5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감독상과 신인배우상(문소리)을 수상했다. 네 번째 영화 <밀양>(2007)과 다섯 번째 영화 <>(2010)는 아들을 잃은 여성과 성폭행을 저지른 외손자를 키우는 여성을 통해 인간의 고통과 치유에 대해 질문했고, 칸영화제에 진출해 각각 여주우연상(전도연)과 각본상을 수상했다. 8년 만의 연출작 <버닝>(2018) 역시 71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영화 속 종두와 벤의 세계는 <초록물고기>에서 막동이와 배태곤이 그려낸 한국 사회가 20년의 시간이 흐른 모습처럼 보이고, 좀처럼 소설을 쓰지 못하는 종두는 이창동 자신으로 읽히기도 하는 작품이다. 한편 그는 2003년 2월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현역 영화감독으로는 처음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에 임명되어 1년 4개월간 관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스트필름 사람들
이스트필름 사람들. 왼쪽부터 명계남, 이창동, 문성근, 여균동

순수한 청년 막동이의 꿈과 비극

영화는 군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한 청년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열차의 난간에 매달려 밖을 바라보던 청년은 앞 칸에서 똑같이 난간에 매달려 있는 한 여성을 발견하는데, 그녀에게서 날아온 장밋빛 스카프가 그의 얼굴을 감싼다. 남자는 전역 후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막동이(한석규)이고 여자는 밤무대 가수인 미애(심혜진)다. 스카프를 돌려주려고 미애를 찾던 막동이는 그녀를 괴롭히던 불량배들과 시비가 붙어 폭행을 당한다. 한국 사회의 가장 폭력적인 공간을 막 벗어난 그가 또다시 폭력과 맞닥뜨린 것이다. 분을 삭일 수 없는 막동이는 복수하기 위해 불량배들을 따라 내리지만 결국 기차를 놓치고 짐까지 잃어버린다. 

밤늦게 일산의 고향 마을로 돌아온 막동이는 어머니와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첫째 형을 만나지만 다른 형제들은 이미 각자의 삶을 찾아 흩어진 후였다. 이어 영화는 막동이가 계란 장사를 하는 셋째 형과 다방 레지로 일하는 여동생을 만나는 모습을 보여주며 신도시로 급변한 일산의 풍경을 담아낸다. 막동이는 미애가 남긴 전화번호를 들고 서울로 가 성인 나이트클럽에서 노래 부르는 그녀를 만나게 된다. 사실 미애는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는 조직 보스 배태곤(문성근)의 연인이었다. 그녀의 부탁으로 태곤은 막동이에게 주차장 관리 일을 소개해주고, 그는 자신의 손가락까지 부러뜨려가며 배태곤의 재건축 개발 건을 해결해 조직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 한편 미애는 막동이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배태곤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한다. 

배태곤의 옛 보스이던 김양길이 출소해 인근의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며 구역을 침범해오자, 태곤은 막동이에게 양길을 살해할 것을 지시한다. 그는 간직해오던 미애의 스카프를 태운 후 김양길을 살해하고, 큰형에게 전화해 어린 시절 초록물고기를 잡던 이야기를 하며 두려움과 눈물을 삼킨다. 왜 한석규가 199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얼굴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명장면일 것이다. 배태곤은 재개발을 앞둔 건물로 막동이를 불러내 칼로 찌르고, 그는 태곤의 차 앞 유리에 쓰러져 미애를 쳐다보며 죽어간다. 시간이 흐른 후 막동이의 꿈대로 가족들이 함께 모여 식당을 한다. 태곤과 임신한 미애가 우연히 식당에 들르고, 그녀는 생전의 막동이가 준 사진 속 고향집이 이 식당임을 알고 오열한다. 

장르적 공감대와 리얼리즘의 양식

<초록물고기>가 보여주는 사실주의 영화 스타일은, 국내외 영화평론가들이 언급한 것처럼 허우 샤오시엔 등 대만 뉴웨이브 영화와 연결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1980년대 코리안 뉴웨이브의 자산을 물려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창동만의 화법과 작가적 인장이 이 영화에 새겨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그곳에서 파멸해가는 순수한 주인공을 통해 관객과의 정서적 공감대를 구축해간다. 이창동의 영화 역시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와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 방법론으로 리얼리즘적 태도를 견지하는 동시에, 동시대 관객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분명히 다른 지점에서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이는 필름 누아르 혹은 갱스터 장르에 기대면서 그 장르적 언어를 예술영화의 것으로 소화해내는 순간, 지극히 양식적인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리얼리즘적 접근과 관객의 영화적 몰입이라는 두 가지 기능을 완수해낼 때, 환상은 현실과 양면처럼 붙어 있다는 그의 세계관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서울 영등포의 유흥가와 재개발 지역을 배경으로 조직폭력배들의 면면을 그린 누아르 장르이면서도, 영화적 세계(디제시스)와 현실 세계(리얼리즘)를 밀착시킨다. 당시 관객들로부터 진짜 깡패를 섭외한 것인지 기함하게 만든 배우 송강호의 연기도 오랫동안 회자된 바 있다. 막동이가 초록물고기의 사연을 관객에게 알려주는 공중전화 박스 신도, <열혈남아>(왕가위, 1988) 같은 홍콩영화와 <게임의 법칙>(장현수, 1994)을 경유해 이창동만의 것으로 수용되었다. 고향집에 돌아온 막동이가 군복 상의를 던질 때의 슬로모션 처리 역시 홍콩 누아르의 장르적 관습이 작가영화의 예민한 언어로 승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의 사실주의 화법은 카메라의 움직임과도 관련해 생각해볼 수 있다. 영화는 중요한 순간마다, 카메라의 전지적 시점과 주인공인 막동이의 시점을 합치면서 리얼리즘을 배가한다. 자신을 구타한 불량배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트로피를 들고 그들을 따라갈 때, 막동이의 시점처럼 보인 주관적 숏은 그가 프레임 인(frame in)하며 다시 제3자의 객관성을 확보한다. 막동이가 처음 나이트클럽으로 들어갈 때 또 배태곤 일파가 자리한 룸으로 들어갈 때도 그와 카메라의 시점 숏은 합쳐진다. 카메라는 막동이의 시선처럼 움직이기도 한다. 그가 옛날 아카시아 천지였던 들판이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고 얘기할 때, 막동이를 비추던 카메라는 그의 시선을 따라 팬(수평 이동)하고 점차 그의 얼굴을 가깝게 잡아낸다. 어머니의 생일을 맞아 마련한 모처럼의 야유회가 아수라장이 될 때도 자동차로 빙빙 돌며 그 난장판을 지켜보는 시점은 카메라의 것이기도 하고 막동이의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카메라의 운용은 고 유영길 촬영감독의 스타일이 이창동의 영화 세계로 수용되었다는 점에서, 코리안 뉴웨이브의 자산을 물려받은 대목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막동이의 시점이 카메라의 전지적 시점으로 합일되는 연출은 이 영화가 줄곧 그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과도 연결 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영화는 곧잘 거울 프레임 속 막동이를 잡으며 그를 하나의 이미지로 정박시키고 현실 너머의 존재인 것처럼 묘사한다. 기차의 화장실에서, 고향집의 방에 돌아왔을 때 또 자신의 손가락을 자해하는 화장실 신에서 거울에 비친 그의 모습을 카메라가 먼저 포착하는 것이 그렇다. 물론 이는 20대 청년 막동이가 꿈(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고뇌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불가해한 부분은 막동이가 고향집에 돌아왔을 때다. 그는 이미 이 세상 존재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막동이와 어머니를 비추고 있지만 어머니는 오랜만에 돌아온 막동이의 말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어머니의 대사는 막동이의 옛날 사진을 보여주는 인서트 이미지에서 들릴 뿐이다. 즉 둘의 대화는 성립되지 않는다. 큰형이 동네 어귀에 나와 그를 기다리는 장면에서도, 막동이는 커트되지 않는 숏을 통해 마치 귀신처럼 나타난다. 어쩌면 영화는 막동이가 이미 죽은 존재와 다를 바 없거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살아가야 함을 말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한국영화, ‘웰메이드’라는 브랜드

1990년대 후반 다양한 개성을 가진 신인 감독들이 등장했고 이들의 역동성은 2000년대 한국영화가 산업적 활기와 장르적 완성도를 갖추는 기반이 되었다. 그들은 ‘충무로’라는 상업영화 시스템을 활용해 영화를 만들면서 본인만의 개성을 새기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특히 2003년 흥행성과 작가주의적 완성도를 겸비한 <살인의 추억>(봉준호), <장화, 홍련>(김지운),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이재용), <올드보이>(박찬욱) 등이 선보이며 ‘잘 만든’ 상업영화를 뜻하는 ‘웰메이드 영화’가 한국 영화산업의 새로운 화두로 등장했다. 장르영화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미학적, 기술적 완성도의 최고점에 도달한 영화들은 2004년 <범죄의 재구성>(최동훈), <효자동 이발사>(임찬상), 2005년 <혈의 누>(김대승), <달콤한 인생>(김지운) 등으로 이어진다. 한국 사회의 예민한 주제들을 장르적으로 해석하며 예술성까지 확보한 2000년대의 한국 상업영화는 해외에서도 인정받았다. 이는 <복수는 나의 것>(2002),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2005) 등 복수 연작에서 작가주의적 미장센의 향연을 보여준 박찬욱이 주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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