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 감독, 무수한 자립의 미학 찾기 현재 한국 독립영화를 이끄는 얼굴들

by.채희숙(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2019-01-09조회 2,309
이완민 감독의 <누에치던 방>

독립영화의 현재를 어디서부터 가늠해보면 좋을까? 독립영화를 이끄는 힘에는 크게 두 방향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 하나는 지배력에 저항하면서 드러난다. 자본이, 체제가, 사회관계가, 스스로에게 깃든 어떤 관념이 억압될 때 예민한 카메라는 그 안에 귀속되기를 멈추고 권력에 저항하며 질문을 시작한다. 다른 하나는 저항하면서 분출되거나 저항에 앞서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자신을 밀어붙이는 삶의 힘을 온전히 담아내려는 욕망이다. 저항하고, 욕망하는, 이 두 힘으로 자립하려는 노력이 독립영화의 현재를 추동한다. 그리고 이때 독립영화는 카메라를 벗 삼아 세상과 대결하고 스스로의 리듬으로 호흡하는 법을 탐색한다.

<얼굴들>은 이강현 감독이 두 편의 다큐멘터리를 내놓은 후 선보인 첫 극영화다. 그의 영화에서는 곧바로 눈에 드러나 해석되고 바로 극복되기에 안도하는 것까지가 시스템이 명령하고 우리가 체화한 권력이다. 그래서 이강현의 영화는 손쉬운 내러티브를 허용하지 않고 분절되는 시·공간과 함께 구성된다. 완벽히 통합돼 안전한 듯 보이는 모습 대신 제시되는 것은 낯설고 기이하게 조합된 병들고 불합리한 사회다. 그리고 <얼굴들>에는 경계에 선 풍경이 있다. <얼굴들>의 인물은 체제 내에 있으면서 또한 그것을 흐트러뜨리거나 무화시키는 경계에 있다. 그들이 체념한 듯 적응한 듯 인지하지 못하는 듯 존재하면서도 자기를 살아가는 노력 속에서 새롭게 열리는 시?공간을 덧붙이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답답하게 꼭 닫힌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향해 탈출하려는 노력이 손쉬운 희망의 판타지로 재포섭되지 않기 위해, <얼굴들>은 불안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계속 의심하고 쪼개본다. 그렇기 때문에 카메라는 이입하거나 동화되기보다는 인물과 거리를 유지한다. 그 거리 둔 시선은 시스템이 미리 가능하다고 구획해놓은 삶에 포획되는 삶을 응시하는 한편 이를 돌파하는 얼굴-풍경의 또 다른 가능성을 추구한다. 이처럼 <얼굴들>은 결국 다른 삶이란 없다고 포획하는 관습과 대결해 분절된 것들을 그 자체로 보면서 새로운 흐름을 그리기 위해 분투한다.

이강현의 영화가 체제화된 가시적 풍경을 어떻게든 파열시키고자 한다면, 이완민 감독의 <누에치던 방>(2016)에서 인물들은 자기 안에 쌓인 사회의 더께를 의심하고 질문하면서 스스로를 발견하고자 투쟁한다. 자기를 관통해 수행돼온 사회 모순에 집중해서 그와 대결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진보운동의 자장에서 청년 시절을 겪은 세대, 그리고 IMF외환위기와 경쟁의 광경이 대학을 본격적으로 잠식하는 시기를 지나온 세대가 만난다. 이 만남은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길들어 존재하면서 스스로에게 짓눌려왔고, 또 그 속에서 길을 잃었는지 함께 되짚어가는 관계를 이룬다. 그 시간을 회피 없이 마주하고 절실하게 겪어나가는 영화의 노력을 지켜보면서 한국 사회가 품고 있는 어떤 기억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그 가운데 <누에치던 방>은 우리가 어떻게 자기 안에 맺혀 있는 한계를, 과거를, 기억을 이겨낼 수 있을지 끝까지 묻고, 이를 통해 스스로의 낯으로 설 수 있는 도약을 모색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무언가를 포장하는 도구가 더는 아니게 된다. 반대로 카메라는 자신을 드러내는 용기이자 그렇게 해서 봐야 하는 것들과 대면하면서 스스로를 지어가는 방법론이 된다.

한편 누가 뭐라 해도 제 리듬의 흥을 감출 수 없는 작업도 있다. 정가영 감독의 영화는 독보적인 썸영화다. 영화 안에서 인물들 간에 썸 타는, 그뿐만 아니라 영화는 어느새 관객과도 썸을 탄다. 이것이 단순 유희를 넘어서는 것은 영화가 말과 마음 쫓기 과정을 통해 우리 관계의 이런저런 측면 탐색하기를 즐기는 과정에서다. 익숙한 젠더 역할극을 거부하며 상황을 주도하는 여주인공은 곱게만 포장된 연애관계를 한 겹만 벗겨 내도 쉽게 당황하거나 어쩔 줄 모르는 우리의 취약함과 대면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러한 속내 역시 또 다른 겹으로 둘러싸여 있다. 우리의 화법과 몸짓과 오감은 지금 얼마나 서툰 한편 또 담백한가? 그 속에서 오가는 관계란 어디까지가 음흉하게 숨겨진 마음을, 어디까지가 솔직하게 비롯된 마음을 품은 것일까? 정가영 영화에서 끊임없는 대화는 그 자체로 매우 역동적인데, 여기서 관객들은 즉흥 속에서 다양한 문법을 횡단하는 재즈처럼 리듬 타는 우리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영화와 함께 ‘밀당’을 해야만 한다. <조인성을 좋아하세요>(2017)가 보여주듯 정가영의 썸은 물음표를 달아놓고 주춤하거나 모른 척하거나 원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좋아할까?’ 대신 ‘좋아하세요’라고 주장하고 돌진하면서 답을 구하는 활력. 그것이 썸 시대에 정가영 영화가 자립하는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의아함을 불러올 수도 있는 작품을 언급하고자 한다. 김남석 감독의 <12 하고 24>(2018)는 뮤지션 신세하의 작품 세계와 생활 과정을 따라가는 뮤직 드라마다. 실제 연주가 기록되는 한편 신세하 자신이 스스로를 재연하기에 다큐 픽션으로 범주화될 수 있는 영화를 이 지면에서 다루는 것이 어색하거나 무리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감독 김남석이 뮤지션 신세하와 공명하는 면모를 이야기해보고 싶다. 영화가 보여주는 어떤 극을 향한 의지라고 해야 할까? <12 하고 24>는 놀라운 리듬을 만들어내면서 음악과 드라마를 따로 또 같이 완성한다. 다큐와 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과 이를 질문하는 비평 및 이론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12 하고 24>는 기록을 대하는 극의 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극이 세상과 능동적으로 접하는 경우를 되살리고 있다. 미리 학습되어 경험이 차단되는 습관을 배제하고 교감의 내용 자체를 되살리려 노력하는 영화의 관계 맺기가, 극이란 일정한 틀이 아니라 상투적인 것들을 극복하면서 표현의 차원 자체를 갱신하고 확장하는 노력의 과정임을 일깨운다.

독립영화가 보여주는 자립의 미학은, 어떤 억압이나 강제에도 스스로 서내는 삶의 반란이 나아가고 있음을 증언한다. 그런 반짝이는 순간들이 끊이지 않고 때때로 도착한다. 그리고 그 영화들이 독립영화의 현재로서 우리의 밤에 빛나면서 자립하는 삶의 별자리를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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