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기>(2018) 김도영 감독 인터뷰 ‘자신의 길을 가는 것’에 대해

by.장영엽(씨네21 편집장) 2019-01-07조회 5,923
자유연기

김도영 감독의 단편 <자유연기>(2018)는 올해 여러 영화제에서 화제작으로 꼽히며 입소문을 탔다.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아시아단편경쟁 부문 작품상과 관객상을 수상하고 제17회 미쟝센 단편영화제에서도 관객상을 비롯한 3개 부문 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한 여성이 육아와 살림을 혼자 떠안은 현실의 풍경과 그럼에도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그의 이야기를 차분히 전하며 깊은 울림을 남긴다. 감독의 실제 경험담이 켜켜이 녹아든 이 영화에 대해 김도영 감독과 장영엽 기자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시 | 2018년 10월 2일(화)
참석자 | 김도영 영화감독·배우, 장영엽 「씨네21」 기자
기록 및 정리 | 이아림 「영화천국」 편집부
사진 | 김진솔 포토그래퍼

장영엽과 김도영감독

장영엽    올해 주목받은 여성 영화인 중 한 분이다. 개인적으로 2018년은 감독에게 어떤 해였나.
김도영    한 해를 정신없이 보내며 여러 (젠더) 이슈와 관련해 ‘왜 그런 일들이 벌어졌지?’ 생각한 것 같다. 영화도 영화지만 여성 문제에 귀를 기울이고 고민하는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운 좋게 주목받지 않았나 싶다.

장영엽    영화를 연출하기 전에 오랫동안 배우 생활을 했다. <자유연기>가 배우로서 경력이 단절된 시기를 겪은 본인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들었는데, 연출 의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김도영    결혼과 출산·육아로 연기를 쉴 수밖에 없던 여배우가 어느 날 영화감독의 연락을 받고 오디션을 보러 가는 내용이다. 수많은 배우가 겪는 이야기이기도 한데, 그 친구들이 겪은 여러 에피소드를 모아서 드라마로 구성하면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쓸 때 많이 들은 이야기가 ‘이런 이야기는 애 낳은 여자들이나 좋아하지 다른 사람이 공감할 수 있나?’라는 거였다. 깊이 고민했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꿈을 꾸던 사람이 그 꿈을 멈추는 순간이 있다’는 점에 각을 세웠다. 누구나 다 인생이 잘 풀리는 게 아니니까 살다가 잠시 멈춰야 하는 순간이 있는데, 그런 프레임이 들어가면 이야기에 훨씬 확장성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했다.

장영엽    이 작품을 구상하던 때가 감독에게 주인공 지연(강말금)과 같은 시기였나.
김도영    그렇다. 2014년에 한 영화학교에 지원했다가 2차 시험을 앞두고 둘째 아이 가진 것을 알았다. 영화를 공부하고자 하는 시기에 임신하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괴로운 시기를 겪었다.

장영엽    여성의 육아나 커리어에 관한 고민과 딜레마가 사회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이슈인데도 이 소재를 영화로 끌어오는 작품이 아직까지 부족하다. 그런 점에서 <자유연기>는 동시대 한국 여성이 처한 삶의 풍경을 면밀하게 포착한 작품이라는 데 강점이 있다고 본다. 여성의 삶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인물에 접근할 때 어떤 방식을 취했나.
김도영    내가 지연처럼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땐 현장을 진행하던 조감독이 정말 예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만들면서는 어떤 사람도 아주 나쁜 사람이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러 사람이 조금씩 한 방울의 요인을 보태서 그릇의 물이 넘치기 직전에 이르지 않나. 살짝 밀었을 뿐인데 감정이 확 쏟아지는 순간을 맞이했으면 했다. 오디션 신에서 지연의 감정이 폭발하는 이유는 조감독이 예의 없이 굴어서가 아니라 그동안 그의 남편, 선배, 이웃집 사람 등이 애정을 가지고 한 말이나 행동이 조금씩 어긋나 점진적으로 쌓여왔기 때문이다.

장영엽    지연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별다른 설명 없이 상황을 통해 보여주는 연출이 무척 좋았다. 예를 들면 남편(이재인)이나 미혼의 선배 배우(권지숙)가 악의 없이 던진 말이 주인공에게 폭력적으로 다가가는 상황이 정말 설득력 있던 것이다. 일상의 언어가 상처가 된 경험이 많이 드러났다.
김도영    결혼 생활에는 장점과 단점이 모두 있는데, 일상에서 받는 작은 상처들을 포착하고 그 결을 살려 보여주고 싶었다.

장영엽    그런 의도가 인물의 디테일한 묘사로 이어진 것 같다. 지연이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에서도 아이 때문에 샤워캡을 쓰고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김도영    한 선배의 경험담을 반영한 것이다. 흡연하면 냄새가 나니 머리엔 샤워캡을 쓰고 가스레인지 후드를 켜고 담배를 피웠다더라. 흡연하는 한 친구는 한여름에도 두꺼운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쓰고 가죽장갑을 낀 채 흡연한다고 들었다(웃음). 여러 지인의 이야기가 녹아 있다. 모유가 새어 나와 티셔츠가 젖는 것은 내가 육아를 하면서 겪은 충격적인 경험 중 하나다. 어디선가 이야기하면서 웃고 있다 보면 티셔츠가 젖어 있는데 ‘이게 뭐지’ 싶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유두에 빨간 약을 바르는 장면을 인상 깊게 보기도 했다.

자유연기
자유연기

장영엽    육아를 경험한 여성이라면 흔히 알고 있지만 영화에서는 이제껏 볼 수 없던 장면이다. 이런 디테일 중에는 감독이나 지인의 경험담 외에 현장에서 배우들과 만들어간 부분도 많았을 것 같다. <자유연기> 현장에서는 배우들의 코멘트에 대한 피드백이나 시나리오 수정이 매우 유연했다고 들었다.
김도영    내가 배우 출신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배우를 무척 믿는 편이다. 배우들은 자신이 해야 하는 역할을 어떻게 하면 잘 드러낼 수 있는지 빨리 파악한다. 배우들에게 시나리오를 보냈을 때, 여러 가지 지적이 있었고 대체로 수긍할 만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시나리오에 다소 코믹한 부분이 많았는데 배우들의 코멘트를 받고 수정하면서 작품이 점점 땅에 안착한 느낌이다.

장영엽    주인공 지연 역을 맡은 강말금 배우의 연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김도영    지연 역의 강말금 배우는 사실 미혼이다. 육아를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참 맑고 깨끗하게 연기해줬다. 특히 오디션 신에서 자유연기의 독백 장면은 리허설 때도 정말 좋아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 ‘저렇게 하면 되겠구나. 됐다, 이 영화는!’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웃음).

강말금
강말금

장영엽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에서 니나의 독백을 연기하는 장면은 강말금 배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연출 방향을 잡았을 것 같다. 그 장면을 어떻게 연출하고 싶었나.
김도영    배우가 그 대사를 맑고 깔끔하게, 진심을 담아서 한 문장 한 문장 이야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상의 놀라운 연기력은 필요 없었다. 강말금 배우는 영화에서 지연의 선배로 나오는 권지숙 배우의 추천으로 알게 됐다. 2년 전에 광화문광장에서 광장극장 블랙텐트 공연을 할 때 강말금 배우가 뭔가를 계속 읽는데 단지 읽을 뿐인데도 그걸 전하는 힘이 마음에 와닿았다더라. 마지막 독백은 중간에 끊을 수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배우만 믿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장영엽    연극 무대를 경험한 배우를 고집했는지도 궁금했다. 영화 초반부에 아기를 안고 있는 지연의 뒤로 연극 <민들레 바람되어> 포스터가 보인다. 실제 강말금 배우가 출연한 공연이더라.
김도영    연극과 영화에 관계없이 그저 연기 잘하는 배우를 캐스팅하고 싶었다. <민들레 바람되어> 포스터에 강말금 배우가 예쁘게 나왔다. 아기를 안고 자신을 가꿀 겨를이 없는 모습의 여자와 포스터에서 예쁘게 웃고 있는 동일 인물을 같이 보여주면 이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을 잘 드러낼 수 있겠다 싶어 그 포스터를 사용했다.

장영엽    오디션 신에서는 감정이 고조될 만한데 애써 누른다는 느낌도 받았다.
김도영    영화 마지막은 정말 고민이 많았다. 신파는 내 취향이 아니다. 원래 지연이 자유연기를 할 때 모유 때문에 그의 옷이 젖는 걸 본 조감독이 정색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런데 ‘왜 조감독의 표정을 넣어 다른 사람의 반응을 판단하느냐’는 피드백이 있어서 뺐다. 관객은 자신이 느끼고 싶은 방향이 있을 텐데, 내가 ‘그렇게 느끼면 안 돼’ 하고 오만하게 생각한 셈이다. 그 신을 보며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어떤 사람은 울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민망해할 수도 있지. 나는 신파로 흐르지 않도록 애쓴 것 같은데, 내가 모든 것을 컨트롤하기보다 그 장면을 보고 드러날 수 있는 다양한 반응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올해 미쟝센 단편영화제 관객상을 받으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사람들은 영화에 자신을 이입해서 보게 된다. 감독인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할 필요 없이 관객이 해석하면서 보는 지점이 있구나, 그리고 운이 좋게 그 지점들이 어떤 사람의 마음에 들었구나 싶었다. 그래서 공부가 정말 많이 됐다. 영화는 영화대로 가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 나름의 풍경을 펼치고… 그게 잘 맞았을 때 누군가의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영엽    지연이 자유연기로 전하는 독백 부분의 대사를 좋아한다고 했다. “작가든 배우든 내가 꿈꾸었던 어떤 것도, 명예나 성공도 문제가 되는 게 아니고 어떻게 견디느냐, 어떻게 자기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믿음을 갖고 버티느냐를 알아야 해요”인데, 감독님에겐 그 ‘믿음’이 생겼나.
김도영    배우를 하면서 성공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힘들었다. 반드시 뭔가를 이뤄야만 하는 것처럼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삶을 살았다. 배우는 정말 독특하고 매력적인 직업이다. 배우라고 불리는 이들의 세계에는 굉장히 다양한 클래스가 있어서, 어딘가 지금과 다른 위치로 쭉 올라가 높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결혼해 아이를 낳고 단역을 할 땐 스태프에게 무시당할 때도 있다. 내가 더 높이 올라가지 못해서 괴로웠을 때 이 대사가 눈에 들어왔는데, 정말 중요한 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높은 자리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고,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굉장히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이루는 사람도 있다. 삶의 풍경은 아주 다양하다. 정말 중요한 건 ‘자기 길을 가는 것’인 것 같다.

장영엽    영화 연출은 본인과 잘 맞나?
김도영    잘 맞는 것 같다. 연출은 무척 매력적인 일이다. 배우로서 연극 무대에 설 때는 관객으로부터 직접적, 즉각적으로 반응이 오는데 그게 스트레스였다. 욕심도 많아서 대사 하나라도 틀리면 집에 가서 안절부절못하고, 항상 긴장하고 괴로워했다. 잘하고 싶은데 그만큼 하지 못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연출할 때엔 잘해야겠다는 마음보다는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좋은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연기를 보는 것도 즐겁고. 연기도 무척 매력적이지만 영화 연출이 저에게는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장영엽    연기를 하다가 영화 연출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
김도영    원래 영화를 전공했다. 우연찮게 연기 수업을 들었는데 내가 연기자에게 깊이 감화되는 것을 발견하고 호기심이 생겨 연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연기를 잘하는 것과 별개로 연기자에게는 다른 숙명이 있는 것 같다. 누군가가 선택해줘야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계속 연극을 하다가 2011년에 임신 문제로 쉬었다. 그때 간단한 시나리오를 쓰고 3~4회차 촬영을 해 완성한 작품을 영화제에 출품했는데 피드백이 오더라. 그런 일련의 경험이 즐거웠다. 어떤 글을 쓰고 어떤 배우를 캐스팅해 영화를 찍는 일이 내 욕망에 더 부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영엽    충무로에 여성 감독 자체가 많지 않은데. 그중에서도 육아를 병행하는 여성 감독은 극히 드물다. <자유연기>를 작업할 때도 육아와 병행하느라 무척 힘들었다고 들었다.
김도영    너무 힘들었다. 주어진 시간은 아이가 어린이집에 갔다가 돌아올 때까지니까. 밤에는 아이가 울어서 찍을 수 없고, 그런 여러 가지 제약을 고려해야 한다. 다행히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즈음에 아이돌봄 지원제도를 이용할 수 있었고, 남편과도 육아를 분담했다. 친정이나 시댁 등 가족의 도움을 받지 않고 감독 일과 육아를 병행한다는 건 정말 어렵다.

장영엽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82년생 김지영>으로 장편 데뷔를 앞두고 있다. 장편 상업영화로 넘어가면 관객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해서도 준비가 필요할 텐데, 고민이 많을 것 같다.
김도영    마침 <자유연기>를 준비하면서 그 작품을 읽었다. 한 후배가 꼭 읽어보라고 주고 갔는데, 술술 읽히는 작품이라 흥미롭게 봤다. 인생의 공부가 된 순간들이었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떤 곳에 발을 붙이고 있는지, 나의 주변 풍경은 어떤지 돌아보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여전히 고민 중이지만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 위로할 수 있는 지점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해야겠다. <자유연기>에는 안톤 체호프가 있었는데…(웃음) 원작의 화제성이 커서 대중이 영화에 기대하는 바도 크다는 걸 알고 있다.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장영엽    영화 <어떤 개인 날>(이숙경, 2008)에서 주인공 보영 역을 맡아 2009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여자신인상을 수상했다. 최근에는 <살아남은 아이>(신동석, 2017)에도 출연했는데, 앞으로도 연출과 연기를 병행할 계획인가.
김도영    하면 좋을 것 같다(웃음). 주변 분들이 좋은 의미로 부탁해서 출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살아남은 아이> 역시 <어떤 개인 날>을 보시고 제게 제안해서 하게 됐고. 아직도 그렇게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며 불러주신다는 데 감사하며 연기하고 있다. 기꺼이 달려가려고 한다.

장영엽    신인감독으로서는 어떤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나.
김도영    <자유연기> 덕분에 여성영화를 많이 둘러보게 됐는데, 나는 본래 코미디에 관심이 많고, 이야기 자체를 좋아한다. 재미있는 이야기에 늘 끌리는 것 같다. 그런 ‘이야기’와 관련된 영화를 계속 둘러보고 싶다. <자유연기>는 편안하게 찍은 유일한 드라마다. 이 작품이 나에게도 현실에 밀착한 삶을 경험하는 좋은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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