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의 사람과 빛 여름의 빛으로 끌어안은 사랑

by.이다혜(북칼럼니스트, 씨네21 기자) 2018-09-07조회 2,167

<8월의 크리스마스>(허진호, 1998)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케미는, 모든 등장인물과 빛이 맺는 관계에 있다. 정원(한석규)이 눈을 뜨는, 아침 햇살이 들이친 방 안 풍경에서 시작해 여름날 땡볕이 만들어내는 모든 것의 눈부신 가장자리와 선명한 그림자, 햇빛 때문에 잔뜩 찌푸리고 올려다보는 눈길, 한여름 석양의 부드러움. 유영길 촬영감독이 자연에 존재하는 여름빛으로 주인공들을 끌어안는 솜씨는 한없이 편안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뜨겁고 불쾌한 2018년 8월에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면서 여름이 그립다고 느낄 정도다. 영화 속 사람들 모두 옷을 가볍게 입고 여름 속에 있다.

인력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여름의 열기 어린 빛처럼,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는 두 명의 배우가 한 프레임에 잡히는 거의 모든 순간이 반짝거린다. 그것은 꼭 열정적인 사랑의 형태가 아니어도 좋다. 오빠와 여동생이 마루에 앉아 수박을 나누어 먹는 장면이나, 예전에 좋아하던 남자를 우연히 만난 여자가 어색해하며 자리를 피하기까지 유난히 느리게 흐르는 시간 같은 것들. 더위를 피해 잠시 사진관에 들어온 다림(심은하)이 소파에 기대 눈을 붙이자 그녀 쪽으로 선풍기 머리를 조정하는 정원의 손길. 다림이 무거운 것을 들고 길을 가다가 오토바이를 탄 정원과 스쳐 지나가는 대목의 호흡도 근사하다. 더운 와중에 다림은 두 손으로 짐을 든 상태다. 반대 방향으로 정원의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오토바이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그리고 다시 소리가 점점 커진다. 다림은 슬쩍 미소 짓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는다. 정원은 짐을 받아 오토바이에 놓고 뒤에 다림을 태운다. 바람 때문인지 빛 때문인지 다림은 연신 눈을 찌푸린다. 정원은 그녀에게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지 묻는다. 대답은, 없어요.

정원의 사정이 알려지는 것은 그의 집을 방문한 옛사랑 때문이다. 그녀는 묻는다. 많이 아프냐고. 다림과 이제 막 무언가가 시작되려는 참인 듯한데 그에게는 모든 게 끝나려는 순간이다. 툇마루에 앉아서 발톱을 깎는 정원의 모습을 오랫동안 카메라가 보고 있다. 기우는 빛 안에서 정원이 천천히 눕는다. 지금 정원은 삶을 정리하는 중이고, 죽어간다는 그 말을 꺼내는 일이 쉽지 않다.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고, 잔뜩 취해 집으로 가자는 친구에게 한잔 더하자고 조르면서 “나 곧 죽는다”고 말해버린다. 친구는 믿지 않는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는 마지막을 기다리는 남자가, 그 시간을 할애해 삶의 자장 안으로 누군가를 들일 때마다 애처로워진다. 정원의 사정을 알게 되고 나면 모든 장면이 예사롭지 않다. 가족사진을 찍은 뒤 독사진을 한 장 더 찍는 할머니. 그 사진은 영정사진으로 쓰일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아버린 할머니는 곱게 단장하고 다시 사진관을 찾는다.

정원과 다림의 관계에 대해 쓰려고 영화를 다시 보다가, 정원이 보내는 시간 모두가 섧게 빛나며 케미를 자랑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정원은 술도 한껏 마시고, 주무시는 아버지 방에서 담배도 훔쳐다 핀다. 아무것도 참을 생각이 없다. 그렇지만 남을 사람들 때문에 속을 끓인다. 천둥번개가 치자 아버지 방으로 가 잠든 아버지 곁에 살며시 몸을 누일 때, 정원은 이미 반쯤 유령 같다.

멜로드라마가 인기를 끌던 1990년대. <8월의 크리스마스>의 사랑은 이뤄지지 않은 채 마음만으로 초원사진관에 남았다. 페이스타임과 카카오톡의 시대라면 없을 방식으로, 손으로 쓴 편지가 전달된다. 영화가 시작되고 한 시간쯤 지나면 곧 정원과 다림은 만나지 않게 되는데, 정원의 병세를 모르니 다림에게 남는 것은 상심뿐이다.

정원에게 이 여름은 이제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단 한 번의 여름이다. 병에 걸린 정원은 여름이 가면 이 모든 사람을, 풍경을 뒤로하고 죽게 되리라. 하지만 이 여름이 마지막인 것은 나에게도 이 글을 읽는 누구에게도 그렇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고, 한 번 온 것은 다시 오지 않는다.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 사진이 시간을 붙들어놓듯, <8월의 크리스마스>의 시간도 영원히 그 안에 멈춰 있다. “아저씨, 아저씨는 왜 나만 보면 웃어요?” 답을 알고 묻는 질문의 설렘이, 영원한 여름 풍경 안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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