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지균의 <겨울나그네>: 통속이라는 단단한 껍질 안에 순수를 내장한 청춘 드라마

by.이현경(영화평론가) 2018-09-07조회 1,246

<겨울나그네>(곽지균, 1986)는 네 명의 청춘을 주인공으로 한 1980년대 대표 멜로드라마 중 하나다. 다소 통속적으로 느껴질 법한 이야기이지만, 사랑을 향한 순수한 집념이 서정적인 연출로 그려져 있다.

감독의 데뷔작이 대표작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곽지균 감독의 <겨울나그네> (1986)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곽지균 감독은 최인호 원작 소설을 각색한 <겨울나그네>로 데뷔해 1980~90년대를 대표하는 신세대 감독으로 활약했다. 2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해(서울 관객 집계) 흥행에 성공한 <겨울나그네>는 대종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하며 비평에서도 주목받았다. “드라마의 발전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멜로드라마가 갖고 있는 원형적인 요소를 강렬하고 서정적인 화면에 담아낸 인상적인 작품이다.
같은 대학에 다니는 선후배 사이인 민우(강석우), 다혜(이미숙), 현태(안성기)와 기지촌 여성 제니(이혜영)의 어긋나고 뒤틀린 운명이 영화의 줄거리다. 네 사람은 첫눈에 반한 상대에 대한 사랑의 열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현실적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사랑을 쟁취하려는 집념 혹은 순수함은 결국 비극을 낳고 만다. ‘피리 부는 소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의대생 민우는 낙엽이 흩어진 대학 캠퍼스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 기악과 다혜와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다혜의 악보가 뒹구는 낙엽 사이로 흩날리는 장면은 가을의 낭만적 정취를 절정으로 이끌어내지만 이들의 사랑의 행로가 순탄치 않으리라는 복선이기도 하다.

재벌가의 막내아들인 민우는 아버지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갈 곳 없는 신세가 된다.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상황에서 생모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민우는 기지촌으로 이모(김영애)를 찾아간다. 미군을 상대로 영업하는 클럽이 모여 있는 기지촌에서 생활하는 여성은 양공주로 불렸다. 민우는 자신의 생모가 양공주였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는다. 어머니가 “더러운 여자”였다고 생각한 민우는 자신에 대해서도 혐오를 느낀다. 성적으로 타락한 여성에 대한 처벌은 1980년대까지 유효한 서사였다. 민우는 생모의 과거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불륜을 저지른 아버지에 대해서는 반감이 없다. <미워도 다시 한번>(정소영, 1968)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남성의 가부장적 지위가 이때까지도 견고했기 때문이다.

경영학과 복학생 현태는 매일 술집에서 기숙하다시피 하며 여성 편력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불과 네 살 차이지만 현태와 민우는 어른과 아이 같다. 서울에서 곱게 자란 민우와 시골 출신의 가난한 현태는 유사 형제 내지 부자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현태는 민우를 어른들의 세계로 입문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한다. 허랑방탕해 보이던 현태지만 졸업 후 바로 취업하고 몇 년 뒤에는 중산층으로 편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30여 년 전 한국 사회에서 청년의 사회 진출 시기는 빨랐고 학벌은 계층 이동의 열쇠였다는 걸 알려준다.

<겨울나그네>에 등장하는 여성은 현모양처로 귀결된다. 정숙한 모범생 다혜는 민우의 방황과 몰락에도 불구하고 그를 기다린다. 현태의 모든 호의에 순진한 무감각으로 대처하던 다혜는 민우가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아이까지 낳았다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현태의 구애를 인정한다. 기지촌 양공주인 제니는 거의 온몸을 던져 민우를 유혹하는 여성에서 남자의 모든 허물을 덮어주고 생계까지 책임지는 엄마가 된다.

<겨울나그네>는 통속이라는 단단한 껍질에 순수라는 부드러운 속살을 내장한 청춘영화다. 슈베르트의 가곡 ‘보리수’는 결정적인 장면마다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지금 보면 배경음악을 남발하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다수의 장면에 음악이 있고 볼륨도 크다. 하지만 드라마의 굴곡이 크고 감정의 진폭이 출렁대는 영화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선택이기도 하다. 한 편의 영화는 결국 전체적인 유기적 통일성 안에서 공감을 이끌어낼 때 성공적인 작품이 된다. <겨울나그네>는 일면 거칠게 보이지만 관객의 마음과 공진한 1980년대의 대표적 멜로드라마다.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