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 그의 영화에 꽂히다③ - <충녀>(1972) 단 하나의 숏 때문에 더 사랑하게 된

by.김곡(영화감독) 2018-03-20조회 1,338
충녀 스틸

내가 김기영의 우주에서 유난히 <충녀>를 사랑하는 이유는, 거기엔 하녀의 세계를 너무나 잘 요약하는 하나의 숏이 있어서다. 그것은 쥐 떼를 가득 잉태한 배의 이미지다. 

먼저 쥐가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쥐가 없는 <…녀> 시리즈를 상상할 수 없다. 게다가 복중에 들어찬 건 한 마리의 쥐가 아니라 쥐 떼다. 하녀와 쥐의 관계는 드라큘라와 박쥐의 관계와도 같다. 쥐 떼는 하녀의 분신들이자 그녀의 번식력 자체다. 이건 단지 은유가 아니다. <…녀> 시리즈를 통틀어 하녀가 하려는 것은 수태해 번식하고, 다시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도록 저승으로 도망가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녀는 본부인만큼 이나 자본가적 기질이 있으며, 쥐는 정충과 환산 가능한 교환 가치다. 정충의 배양과 그 축적은 같은 의미다. 하녀의 자궁은 아기주머니인 동시에 정충의 축적기, 즉 정충 인큐베이터다. 

하녀의 세계에서 남자들 신세가 딱 이렇다. 하녀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하녀는 남자의 정력을 사랑하며, 그 정충을 집어삼키고 축적할 뿐이다. 게다가 본부인까지 합세하니 그 신세 더더욱 처량해지는데, 하녀와 본부인 사이에서 남자는 정충의 노동자로 환원되어 그녀들이 교환하는 화폐가 되거나, 엄격히 관리되는 자본으로 전락한다. 실상 김기영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남자의 법이 아니라 여자들의 계약이다. 그것은 흡사 자본과 노동, 혹은 대자본과 소자본 사이에서 잉여가치의 축적을 위해 맺어지는 계약으로서, 어떤 법보다 우월하다. 계약은 법이 아니라 헌법이기 때문이다(하루의 반을 쪼개 정충을 교대로 관리하는 계약을 맺을 때 본부인 왈 “두 집안을 다스리는 헌법을 만들어놓자…”). 정충 인큐베이터는 사실 하녀와 본부인이 공동 참여하는 정충 카르텔인 셈이다. 그것은 둘 중 한 명이 저승으로 먹튀하기 전까지 배양을 멈추지 않는다. 

<충녀>의 저 한 장면은 우리가 김기영에 대해서 안일하게 가져온 편견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하녀의 세계는 물신이 아니라 화폐에, 오이디푸스의 법(logos)이 아니라 자궁의 계약(covenant)에, 인간의 무의식이 아니라 자본기계의 집단지성에 가깝다. 이걸 대놓고 드러냈다는 점에서 <충녀>는 <하녀>보다 더 <…녀> 시리즈를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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