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 김기영의 삶과 영화 이야기 컬트영화처럼 살다 간

by.김영진(영화평론가) 2018-02-20조회 4,625
김기영

나는 말년의 김기영 감독과 꽤 자주 만났다. 1997년 「씨네 21」 기자로 일하고 있던 나는 그를 젊은 영화팬들의 시야 안에 다시 불러들이고 싶었다. 김기영 감독의 혜화동 자택을 찾아가 지금은 사라진 동숭아트센터에서 약식 회고전을 치르자고 설득했다. 봄이 오기 전 그해 2월경에 매일 아침 조조 상영으로 치러진 회고전은 실패했다. 잡지에 리뷰와 인터뷰를 여러 차례 실었으나 당장 독자들의 반응이 오진 않았다. <이어도> (1977)가 상영되던 날 아침 무삭제본 상영이 궁금해서 거구의 그가 텅 빈 극장에 불쑥 나타나던 순간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러나 그해 가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치러진 회고전은 대성공이었다. 영화제가 열리는 동안 그가 남포동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다니면 어린 학생들도 다가와서 사인을 요청했다. 영화 상영이 끝난 뒤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서 그는 예기치 않게 재치 있는 답변으로 관객을 웃겼다. 그는 부산에서 뒤늦게 스타감독의 유명세를 만끽했다. 남포동 거리를 지나치다 그를 만나 “감독님, 여기서 완전히 뜨셨습니다. 좋으시겠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네면 그는 “뜨긴 뭘, 이제부터야. 곧 진짜로 새 영화 만든다. 이번에는 최고로 만든다. 그땐 꼭 평을 써줘야 해”라며 특유의 호방한 웃음을 지었다. 

다음 해 2월 그는 혜화동 자택에서 전기합선 사고로 부인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예기치 않은 파국에 봉착하는 삶의 극한적 양상을 때로는 <하녀> 시리즈와 같은 심리스릴러로, 때로는 <이어도>와 같은 독특한 편집광적 스타일의 드라마로 담았던 그는 돌연한 죽음이라는 운명의 변수에 자기 생명을 내맡겼다. 김기영의 혜화동 자택은 그전에 살던 노부부가 무너진 대들보에 깔려 죽은 적 있는 흉가였다. 불길하다고 수군대는 주위 사람들에게 김기영은 “그렇게 죽으면 고통도 없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라고 농담으로 받아 넘겼다. 

사망 직전 그는 베를린 영화제에서 열리는 회고전에 초청을 받았고 부인과 함께 갈 수 없다면 가지 않겠다고 고집해 베를린 영화제 쪽에서 수속을 다시 밟는 중이었다. 김기영의 사고사는 마치 허망한 절정부의 비극적인 반전처럼 찾아왔다. 그는 여러 차례 인터뷰를 청하고 귀찮게 구는 필자를 기특하게 여겼으며 조금씩 차이가 나긴 하지만 재미난 구술을 들려주었다. 이제 쓰게 될 글의 인용 인터뷰는 모두 필자와의 대담에서 따온 것이다. 

인텔리 집안에서 태어난 예술가 

1922년 서울 교동에서 태어난(주민등록에는 1919년생으로 돼 있으나 본인은 생전의 인터뷰에서 1922년생이라고 주장 했다) 김기영은 아버지가 경기전문학교를 나와 소학교 선생을 했고 어머니도 경기여전을 나온, 인텔리 집안 출신이다. 부모님이 두 분 다 소학교 선생이라 2년마다 전근을 가야 했기 때문에 김기영은 중학교 때부터 자취 생활을 했다. “내 부모님은 미술을 잘했다. 나는 미술 쪽에 자질이 있었던 것 같다. 게다가 중학교 때는 박수근 화가와 같은 하숙집에 살았다. 글재주도 있고 음악도 곧잘 했기 때문에 장차 내가 예술을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나 일본인 선생 때문에 그만뒀다.” 김기영에 따르면, 미술반에 들어오라는 제의를 거절하자 일본인 미술 선생이 “너는 재주가 많다. 재주가 많으면 뭐가 되는지 아는가. 소학교 선생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김기영은 집에 있던 화구를 던져버리고 공부에만 몰두했다.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세브란스의대 입학 시험을 쳤으나 조선인에게 불리한 입시 제도 때문에 낙방한 김기영은 일본에 유학을 갔다. 이 시절에 그는 영화를 비롯한 근대문화의 매력에 눈을 떴다. 주로 ‘학생극장’에서 영화를 봤다고 하는데 이 극장은 고전영화를 상영하면서 해설자가 작품을 설명해주고 학생들은 도시락을 싸와서 영화를 보는 공간이었다. 

“많이 봤지. 외국영화는 거의 다 봤어. 그중 조셉 폰 스턴버그 가 1935년에 만든 <모로코>가 기억나지. 좋은 영화야. <모로코> 알아? 주인공이 마를렌 디트리히잖아. 게리 쿠퍼도 나오고. 그때는 인기가 좋아서 몇 번이고 재개봉해도 항상 성공이 었지. 일본영화도 많이 봤고. 일본영화는 혼외정사나 정사(情 死)를 다룬 영화가 많잖아.” 

이 시기에 김기영은 영화뿐만 아니라 좌익극을 공연하던 스키지 극장에서 모스크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극작가 오사나와 가오루의 강연을 듣기도 하면서 예술을 ‘생활화’하는 단계를 넘어서 ‘육체화’했다. 

광복 후 귀국해 서울대 의과대학에 진학한 김기영의 연극반 활동은 ‘전설’이다. 평양에 가서 평양고보 동창이 많은 평양전 문학교 선생들과 어울려 <상선>이란 연극을 공연했는데 김기 영이 독학한 스타니슬랍스키 연기론을 실연한 작품이었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주위의 권유로 김기영은 모스크바 유학을 생각하게 되는데 평양고보의 은사인 권 선생을 찾아 가 그 문제를 상의했다. 

“권 선생은 사회주의자였어. 나중에 김일성대학 총장까지 지 냈지. 그런데 그 선생이 이렇게 말하는 거야. ‘예술을 하려면 운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자네의 운이 어떨지 난 알 수 없다. 그러니 유학과 학업 중 어느 것이 좋은지 난 말해줄 수 없다.’ 그래서 난 곧장 서울로 내려와 공부를 계속한 거거든.” 

“난 예술을 한 게 아니라 취미대로 놀았을 뿐” 

서울에 온 김기영은 서울대 국립대학극장을 이끌면서 헨리크 입센의 <유령>을 비롯해 <베니스의 상인> <암로> 등을 공연했 는데 <유령>은 이해랑이 ‘한국 최고의 연극’이라 격찬했다. 연극계에서 탄탄대로의 경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김기영의 이력은 6?25전쟁이 나면서 영화로 풀렸다. 생계를 위해 대학 선배이던 오영진 씨를 도와 <대한뉴스>를 만들던 김기영은 미 공보원의 의뢰를 받아 <리버티 뉴스>를 만들었고 이때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미 공보원의 기자재를 이용해 동시녹음으로 1955년 <죽엄의 상자>를 연출했다. 미 공보원을 그만두고 서울에 올라와 <양산도>(1955)를 찍으면서 본격적으로 ‘영화감독 김기영’이 됐다. 

“서울에 오니까 과거에 국립극장 제작부 사람이 자기한테 10 만원이 있다고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하더군. 대신 그 돈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사흘 안에 시나리오를 써달라고. 승낙하고 버스를 타고 용산에 가는데 어머니가 해주신 얘기가 생각 났지. 잘 모르지만 어디 전설인 것 같아. 남녀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고 나서야 행복해지는 거야. <양산도> 마지막에 나오는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은 행복에 대한 추구를 말하는 거거든. 이거다, 하고 생각했지. 그래서 다음 날 조감독 세 명을 불렀어. 연극 쪽에서 일하던 작가들인데 내용을 말하고 시나리오를 쓰라니까 하루 만에 써 왔어. 근데 그게 마음에 안 든다 는 거야. 그래서 사흘 시간을 달라고 한 뒤 다시 쓰라고 그랬지. 이것도 마음에 안 든대. 결국은 닷새를 더 달라고 말한 다음 내가 직접 썼지. 시나리오를 보낸 다음 날 그 사람이 아주 좋다는 거야. 동네 아줌마들을 모아놓고 시나리오를 읽어줬 더니 전부 울더래. 그래서 만들게 된 거야.” 

<양산도>는 양반의 횡포에 밀려 사랑을 맺지 못하는 상민 출신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인데 김기영 스타일의 환상 짜기 진수를 짐작하게 하는 장면이 있다. “<양산도>는 마지막 부분이 좋아. 남자 주인공인 수동이 자살한 뒤에 엄마가 쑥떡을 해서 무덤으로 가지. 그리고 슬피 우는데 여주인공인 옥이가 시집 가는 행렬이 그곳을 지나간다. 그런데 가마가 움직이지 않는 거야. 그러면 옥이는 내려서 수동의 무덤에 절을 하고 돌아선다. 그때 엄마가 칼로 옥이를 찔러. 엄마도 아들을 장가보냈다고 좋아하다가 진사댁 사람들에게 찔려. 옥이는 기어서 무덤 속에 들어가는 거야. 그러고는 수동과 옥이 둘이 섹스를 하고 하늘로 올라가. 물론 환상 장면인데 엄마가 그렇게 상상하는 거야. 그리고 엄마의 창이 흘러나오면서 영화는 끝나고.” 이 장면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김기영은 1950년대와 60년대 잘나가던 흥행감독이기도 했다. <초설>(1958)을 비롯해, <10대의 반항>(1959), <하녀>(1960),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 등은 모두 당대의 화제작이었다. 

“내 모든 영화를 통틀어 흥행을 따지면 흥행한 비율이 3할 정 도야. 세 편에 한 편 정도는 히트했단 말이지. 난 ‘예술’을 한 게 아니거든. 내 취미대로 논 거지. 그러니까 섹스 묘사도 집어넣 고 해서 관객들이 많이 봤지.” 

1950, 60년대에 김기영은 네오리얼리즘 계열의 사실주의 영화와 흥행영화와 심리스릴러를 오가며 편집광적으로 상황의 이면을 끄집어내는 독특한 색깔의 자기 영화를 만들었다. 무시무시할 만큼 오싹한 초현실주의적 수법으로 인간의 조건을 끄집어낸 그의 대표작은 물론 <하녀> 시리즈다. 여자 때문에 패가 망신하는 남자와 그 가정의 얘기를 다룬 <하녀> 시리즈는 일정 한 시기를 두고 <화녀>(1971), <충녀>(1972), <화녀 ’82>(1982), <육식동물>(1984) 등의 영화로 되풀이해 만들어졌다. 

“아, 그렇게 한 거. 영화사에서 돈을 대준다니까 한 거지. 하하하. ‘왜 그 얘기 있잖아, 그거’ 하면서 제작자들은 똑같은 얘기를 요구해. 가끔 나보고 그 소재로 연출해달라고 연출 의뢰가 온단 말이지.” 

흑백영화인 <하녀>는 카메라 움직임과 음향 처리가 돋보이고 <화녀>나 <화녀 ’82>는 색채와 심도있는 화면이 드라마를 실 어내는 동력이지만 말하고자 하는 뿌리는 같다. <하녀> 시리즈에 나오는 남성은 경제적 무능이 성적 무능으로 이어진 채, 어머니의 육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면서 퇴행기에 머물러 있는 가장이다. 근대화의 사회 모델에 적응하지 못해 헤매는 김기영 영화의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징벌당하고 매혹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면서 자궁으로의 원천 회귀를 욕망한다. 그것은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 1960~70 년대 한국 사회의 계급 갈등까지 얹어놓을 때 이 한국판 오이디푸스 자살극인 <하녀> 시리즈가 심리 드라마에서 사회 드라마로 이동하는 것이다. 김기영 본인은 그저 재미있는 영화라고 폄하하지만 <하녀> 시리즈는 현대 한국영화사에 우뚝 선, 감탄할 만한 무의식의 동굴과 같다. 

“<하녀> 시리즈에 시골 출신의 젊은 여자들이 나오는 건 1960~70년대 당시 한국에서 아주 흔한 모습이었기 때문이거든. 근대화 정책으로 여자들이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와서 버스안내양이나 하녀로 일한 거거든. 당시에는 가정부가 있는 중산층 집안에서 치정 사건도 곧잘 일어나곤 했기 때문에 그들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어.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주로 중산층 가정을 소재로 했기 때문에 만든 거야. 명보극장 사장에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했고.” 

흥행사이자 작가였던 김기영은 <화녀>와 <충녀>를 흥행시키 고 난 후 1972년 이후로 유신정권이 출범하면서 경력이 비틀거렸다. 영화법이 바뀌고 충무로 영화계가 20개 영화사로 통폐합되자 한국영화는 외화수입권을 따기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1970년대는 영화사에서 외화를 수입하기 위해 한국영화를 만들어야 했잖아. 땜빵으로 만든 거지. 돈 적게 들이고 빨리 만드는 사람이 누구냐? 김기영이다. 그렇게 된 거거든. 유신정권 전에는 한국에도 재미있는 영화가 있었어. 그런데 유신되고 영화법이 바뀌었잖아. 영화사를 통폐합하고. 그다음부터는 수입허가를 받으려고 한국영화를 만드는 거야. 영화법 때문에 나도 영화를 못 했지. 영화사가 있었지만 스튜디오가 없어서 실격이었거든. 동아수출공사에서 전속 감독으로 일하기도 하고 그랬지.” 

김기영은 1970년대에 이른바 외화 쿼터를 따기 위한 ‘문예영화’ 의 단골감독이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원작 소설이 있는 작품 을 영화로 만들었지만 이청준 원작의 <이어도>(1977), 이광수 원작의 <흙>(1978) 등의 작품은 소설과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소설을 영화로 만들 때 원작의 3분의1 이상을 사용하면 실패 거든. 그건 영화가 아니야. 난 이 원칙은 반드시 지켰지.” 

<이어도>는 복잡한 시간 구조로 이어도를 찾는 사람들의 이야 기를 그리고 있다. 시종 끈끈하게 감겨드는 이상한 마력의 화 면은 김기영이 아니면 담아낼 수 없는 것인데 압도하는 바다 의 이미지가 특히 인상적이다. 

“망원렌즈로 최대한 줌인(zoom-in)해서 바다를 찍으면 어떻 게 보이는지 알아? 마치 바다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 야. 수평의 화면이 수직이 되는 거지. 이게 <이어도>에서 바다 의 환상을 강조하는 데 매우 중요한 거야. 명암 대비를 약하게 만들면서 전체적으로 화면도 부드러워지지. 그게 영화를 더 욱 환상적으로 보이게 만들어.” 

<이어도>에서 김기영과 함께 작업한 정일성 촬영감독은 늘 “김기영이야말로 한국에서 가장 독창적인 작가”라고 말해왔다. 김기영의 서울대 후배인 정일성은 돈을 받지 않아도 좋으 니 작품을 같이 하고 싶다고 청해서 <화녀> 때부터 같이 일했 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김기영의 전체 경력에서 돈독한 스태 프들의 계보는 드문 편이다. 생전에 그는 정일성을 비롯해 손 현채 촬영감독과 친분이 두터웠고 김지미, 박암, 김승호 등을 키워냈다고 자찬했지만 그의 밑에서 큰 조감독 출신의 계보 는 형성되지 않았다. 

“내가 촬영장에서 연출하면 뒤에서 날 샜다고 연출부들이 수군댔거든. 그러다가 나중에 감독이 되면 다 훌륭한 교통순경이야. 그럼 뭐하는가. 운 나쁘게도 내 밑에서 일한 연출부 중에는 대성한 감독이 없다.” 

김기영은 촬영장에서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촬영 대 본을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촬영대본을 손에 감춰 두고 흘끔흘끔 쳐다보면서 연출 지시를 했다는 것이다. 

“나는 의학을 전공한 과학자 혹은 테크니션” 

김기영은 자신을 예술가가 아닌 과학자로 여겼다. “나는 의학 을 전공한 과학자란 말이지. 그게 나를 테크니션에 가깝게 만 들었어. 언젠가 담배 포장을 하는 여직공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그네들은 꼭 10개씩 집는다. 어떤 면에서 인간은 기계 보다 더 정확하지. 물론 바탕이 되는 것은 숙련의 힘이다. 음, 자 기제작방식이라는 게 내게 일종의 숙련을 요구했지. 단기간에 빨리 만들어야 하는 경우도 많았고. 그러다 보니 흥행도 많이 염두에 뒀다. 나는 영화를 의식해서 만든 영화는 한 편도 없다. 카메라를 들여다보는 것은 내 취향이다. 취향에 맞으니까 지금 까지 만들어온 거다. 예술영화는 유현목 감독이 하는 것이다. 유 감독은 예술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니까. 나는 내 마음 가는 대로 영화를 만들었으니 분석은 여러분이 해주기 바란다.” 

좌충우돌하는 김기영의 미학과 돌파력은 굴곡의 1970~80년 대를 겪으면서 온전히 마무리되지 않았다. 죽기 전까지 김기 영은 새 영화의 시나리오를 거듭 고치고 있었다. 1997년 10월 초 나는 한 케이블 방송에서 마련한 좌담회에 그와 함께 출연 한 적이 있다. 그는 좌담 도중에 새 영화의 시놉시스가 공개되 자 녹화가 끝나고 언짢아했다. 역시 <하녀>와 유사한 콘셉트 의 시놉시스였는데 그는 모든 게 새롭다고 강조하며 아직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어, 그건 알려지면 안 되는데. 알려지면 큰일 나는데. 지금도 고치고 있거든. 그렇게 해야 공표할 수 있는 건데.” 

김기영은 생애 마지막 미학적 승부를 준비하고 있었다. “난 내 영화의 시사회에 가지 않았다. 늘 애초 구상의 20%에 불과한 결과로 나왔을 뿐이니까”라고 아쉬워하던 완벽주의자 김기영은 회고전을 통해 다시 한 번 세상에 알려지고 크게 한번 비 상하려는 순간에 그만 날개가 꺾이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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