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의 지시로 영화를 실은 첫 번째 혁명 프로파간다 열차가  모스크바 역을 출발하다.  1918년 8월 13일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20-07-23조회 20,833
레닌 스틸
<레닌>

몇 번이고 망설였다. 내가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세계영화사의 순간들을 설정한 것은 아닐까. 이 날짜는 다른 자리에 맡기는 편이 나은 것은 아닐까.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의 순간들을 기록하기 위해서 자본가들의 이름을 열거해야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로 이 순간을 말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렸다.

먼저 상황을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블라다미르 일리이치 율라노프. 우리에게 레닌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사람. 지구상에 최초의 노동자 국가를 건립한 인물. 나는 레닌이 언제 처음 영화를 보았는지에 관한 자료를 갖고 있지 않다. 영화가 처음 파리에서 상영되는 그때 1895년 12월 레닌은 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계급 해방투쟁 동맹’을 결성했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갔고 그런 다음 1897년 시베리아로 유배를 갔다. 1900년 레닌은 스위스 제네바로 망명을 갔다. 그는 정치적인 팸플릿을 끝없이 써서 모스크바로 보냈다. 그러면서 런던을 오가면서 정치적인 집회에 참가하였다. 일시적으로 1905년 9월 8일 러시아에 돌아가기는 했지만 (이른바) 2차 망명길에 올라 1917년까지 해외에 머물렀다. 왠지 저녁에 망명지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가는 레닌의 모습은 잘 상상이 안 된다. 하지만 우리는 레닌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을 듣고 난 다음 눈물을 글썽이면서 막심 고리끼에게 했던 말을 생각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매일이라도 듣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 곡은 초인적인 음악입니다. 나는 인간이 정말 경이로운 일을 할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자부심을 느낍니다. 하지만 음악을 너무 자주 들을 수는 없습니다. 음악은 신경을 자극하여 멍청한 멋진 말을 하고 싶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끔찍한 지옥에 살면서 그런 아름다운 창조를 할 수 있는 인간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게 만듭니다. 하지만 누구의 머리도 쓰다듬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다가는 손을 물리게 될 것입니다” 
 
<전함 포템킨>

1917년 10월 혁명에 성공하였다. 전세계가 경악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자본가들은 두려움에 질렸고 노동자들은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혁명에 성공했다고 해서 모든 일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즉각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독일, 영국, 일본, 미국은 한 편으로는 동맹을 맺고 다른 한 편으로는 러시아 내의 반혁명 세력을 지원하였다. 지도자 레닌은 물론 이 혁명이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의 과도기라는 테제를 제출하였다. 문제는 과도기라는 정식화에 대해서 볼쉐비키 내부에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트로츠키와 부하린은 과격하게 혁명의 실천을 요구하였다. 그들이 정치적인 사상투쟁을 벌이는 동안 여전히 자본과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부르주아들과 지주들이 연합하여 외세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반격을 개시하였다. 레닌은 안과 바깥에서 싸워야만 했다. 이때 레닌은 다시 한 번 인민의 결집이 승리를 향한 전진이 될 것으로 믿었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도시의 노동자들과 달리 혁명의 사상을 충분히 학습하지 못한 농민들에게 혁명의 새로운 세상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결정적인 장애는 농민들의 다수가 그 당시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문맹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때 레닌은 ‘혁명적으로’ 농민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인민들)을 위한 학습 도구로 영화를 선택했다. 그래서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세상을 농민들에게 영화를 통해 알리고 또 한 편으로 농민들의 농촌에서의 투쟁을 기록하여 다시 도시에서 배급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공장위원회와 소비협동조합을 통해 상영하면서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새로운 탄생을 알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기 위해서는 혁명을 위한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지가 베르토프>

1918년 8월 13일 모스크바 역에서 그 당시 내전이 벌어지고 있던 볼가강 유역의 카잔 지역으로 첫 번째 혁명 프로파간다 열차가 출발하였다. 이 열차에는 볼쉐비키 군인들과 노동자들, 인민들을 위한 7,000권의 책과 팸플릿 문건을 인쇄 수 있는 인쇄기. 영사장비, 편집실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 열차에는 (훗날 에이젠쉬테인의 <전함 포템킨>을 촬영한) 에두아르드 티세와 데니스 아르카디에비치 카우프만, 훗날 자기 이름을 지가 베르토프라고 부른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카잔 지역에 도착해서 사진을 찍고 그 사진으로 매주 신문을 편집하였으며, 그리고 일부 순간들을 카메라로 촬영하였다. 그리고 촬영 분량들은 ‘키노 네델리아(주간 영화)’라는 이름으로 다시 구성되었다. 아마도 고몽영화사에서 시작한 ‘시네 주르날’이 그 모델이었을 것이다. 그들 각자의 역사. 그들 각자의 상황. 그리고 그들 각자의 영화. 영화사의 순간들은 단지 국경을 넘어서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념, 서로 다른 목표를 갖고 그렇게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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