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서 첫 번째 중국영화를 상영하다 1905년 12월 날짜 불명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8-02-20조회 3,482

나는 영화사의 순간을 찾아서 할리우드와 유럽을 기웃거렸다. 영화는 거기서 시작했기 때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디서부턴가 아시아 영화를 건드려야 한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한국영화를 말하지 않겠다고 이미 말했다. 한 페이지만 넘기면 정종화 연구원의 ‘한국영화사 100년’ 연재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연대기적으로 일본영화를 먼저 말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공식적인 역사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저 내게 섬광처럼 느껴지는 영화사의 순간만을 따라갈 것이다. 지금 나를 이끄는 것은 첫 번째 중국영화 <정군산 定軍山, The Battle of Dingjunshan>(런칭타이, 1905)이다.

물론 중국에는 뤼미에르가 첫 번째 영화를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상영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영화가 도착했다. 린드버그가 비행기로 대서양을 횡단하기 30년 전의 일이다. 당연히 배를 타고 영화는 중국에 도착했을 것이다. 아편전쟁으로 나라는 쑥밭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서구 제국주의의 무자비한 역사 속에서 도착한 서양문물은 두려운 것이자 신비로운 것이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본 적이 없는 세계의 이미지들이 담겨 있었다. 중국에서 영화가 처음 상영된 곳은 홍콩을 거쳐 도착한 상하이였다. 아마 내륙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영화에 유리하지 않았다. 영국 공사가 서태후의 칠순 생일선물로 보낸 영화는 그 면전에서 상영 도중 화재를 일으켰다. 니트로글리세린은 위험한 화학물질이었다. 게다가 중국인들은 사진이 영혼을 훔쳐간다고 믿었다. 그러니 이 ‘전기 그림자’(電影, 중국에서 영화를 부르는 말. 처음에는 ‘電戱’라고 불렀다. ‘전기(로 찍는) 연극’이라는 의미에서였다)는 불길한 ‘활동사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호기심 넘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런칭타이(任慶泰)는 사진에 완전히 매혹되어 돌아왔다. 그래서 베이징에 펑타이(豊天) 사진 스튜디오를 차렸다. 아마 사진이 ‘활동’을 하는 이 신기한 발명품에 그는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을 것이다. 그래서 베이징에서 상영되는 서양의 영화를 보는 데 만족하지 않고 직접 찍기로 했다. 그때 런칭타이는 (뤼미에르처럼) 베이징의 길거리를 찍는 대신 베이징 오페라 가수인 탄신페이(譚培)를 모셔다가 「삼국지연의」에서 황충 장군이 정군산에서 조조의 군대와 맞서 싸우면서 공명의 꾀에 따라 하후연을 물리치는 대목을 찍었다. 물론 무성영화였기 때문에 노래를 담을 수 없었고 연주가 담긴 것도 아니다. 다만 탄신페이가 무대에서 하던 몇 가지 퍼포먼스를 카메라 앞에서 실연했다. 하지만 중국인들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베이징 오페라는 (오직 중국인들에게)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그저 이미지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거기서 노래가 흘러나오고 연주가 들렸을 것이다. 촬영은 펑타이 사진 스튜디오 뒤뜰정원에서 했고, 탄신페이는 무대 의상 그대로 입고 연기했다. 기록에 따르면 촬영은 런칭타이가 직접 했다고 한다.

런칭타이가 영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거나 영화의 미래를 내다보았을 리가 없다. 아직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그는 호기심을 안고 그걸 찍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영화가 베이징 오페라를 찍는 데서 시작했다는 사실이 이상할 정도로 내게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지아장커에게 이걸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러자 그는 약간 우쭐거리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는 길을 잃을 때마다 어디서 시작했는지를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때 영화는 예술을 찍었고, 우리 마음속의 역사를 찍었고, (서방세계에서 가져온 기계로) 우리 자신을 찍은 거지요.” 그들은 그렇게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항상 다시 시작했다. 그것이 배움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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