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과 나운규의 신화를 묻다 나운규의 <아리랑>(1926), 무성영화의 시대 | 1925~1929년

by.정종화(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2016-10-27조회 2,359
누구도 본 적 없는 영화, 누구나 알고 있는 신화
한국영화사에서 <아리랑>은 신화와 같은 존재다. 필름도 남아 있지 않은 이 영화가 무성영화 시대의 걸작이자 한국영화사의 대표작으로 회자되고 기록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왜 그렇게 대단한 작품인가. 지금 우리는 1926년 작 <아리랑>을 볼 수가 없고, 본 적도 없다. 인화성 강한 질산염(nitrate) 소재로 만들어졌을 이 영화의 필름을 다시 찾을 가능성도 매우 희박하다. 어쩌면 <아리랑>은 물론이고 나운규가 연출하고 배우로 등장한 영화들을 전혀 볼 수 없기 때문에, 그와 그의 영화가 한국영화사의 신전에 올려졌을 가능성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나운규의 <아리랑>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결합되고 이러한 맥락 속에 공고하게 놓이기 시작한 것은, 이영일의 「한국영화전사」 초판본이 나온 1969년 즈음부터다.
영화사가 이영일의 말대로, <아리랑>이라는 텍스트에는 “민족저항적인 리얼리즘의 영화미학”이 담겨 있을지 모른다. 또한 그의 표현대로,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의 검열을 피하고 당국을 속이기 위해, 재조선 일본인 흥행사의 영화사에서 제작하고 일본인의 이름을 감독으로 올린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1926년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과연 일제의 탄압과 저항의 구도로만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리랑> 촬영 현장의 기념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영화인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어울려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인 흥행사는 조선 관객에게 조선영화를 선보여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자본을 투자했고, 조선 영화인은 그 자본으로 조선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물론 다음 영화를 이어가야 하는 조선 영화인의 입장에서도, 흥행 성공이라는 상업적 지향을 공유하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초창기 영화제작 현장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인 촬영기사는 일본영화계에서 초빙했다. 이처럼 <아리랑>이라는 신화는 이 영화가 등장한 당시의 맥락에서 정교하게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아리랑>, 일본과 서구영화의 착종
<아리랑>을 만들기 직전 나운규가, 당시 일본 신파영화의 모방으로 조선영화 연출의 실마리를 찾던 선배 감독 이경손에게, “화나는데 서양 사람 흉내를 내서 한 작품 만들어봅시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조선 극장가에 “그리피스의 <폭풍의 고아>를 보던 관중은 참다 못하여 발을 굴렀고 더글러스의 <로빈 후드>는 조선 관객의 손바닥을 아프게 하였다”는 서양영화의 ‘대작 연발 시대’가 도래하자, 조선 사람이 조선 옷을 입고 활동사진에 나온다는 것만으로 관객들이 몰려들던 시기는 종언을 고했기 때문이다(「조선영화」 제1집).
당시 조선영화의 제작 경향은 크게, 윤백남이 감독하고 이경손이 조감독으로 참가한 <운영전>(1925) 등 조선 고대소설을 원작으로 한 사극/시대극 장르와, 이경손이 연출한 <장한몽>(1926)처럼 일본 신파극을 모방한 영화로 볼 수 있다. 나운규가 대단한 것은 첫 영화를 만들면서 서사적으로도 스타일적으로도 기존의 방식을 넘어섰다는 점이다. 그는 조선의 현실을 반영한 이야기를 직접 썼고, 일본 신파영화의 영향하에서도 서구영화의 스타일을 지향하고 또 실천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아리랑>은 영화 소설과 유성기 음반, 그리고 영화 잡지의 기사나 광고 등을 통해 그 면모를 추적해볼 수 있다. 일본 개봉을 앞두고 일본의 대표적인 영화잡지 「키네마준포(キネマ旬報)」에 실린 광고는 영화 <아리랑>이 일본영화와 서구영화 사이에서 직조된 텍스트임을 짐작하게 한다.

조선 무성영화의 기념비를 세우다
우리는 ‘극 중 극’이라고 소개된 <부활(카추샤)>과 <열사의 춤(熱砂の舞)>이라는 두 제목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먼저 톨스토이의 「부활」을 원작으로 한 <카추샤>는 일본 신파영화의 출발점과 같은 텍스트다. 일본 닛카쓰(日活) 영화사의 현대극 스튜디오인 무코지마(向島) 촬영소의 첫 히트작이 바로 매춘부로 전락한 소녀와 귀족 청년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옮긴 1914년 작 <카추샤>였다. 서구 연극/문예영화에서 일본, 그리고 조선의 신파극/신파영화로 이어지는 간(間)장르적이고 초(超)지역적인 복잡한 흐름 속에, 대중적 서사/스타일 방식의 또 다른 이름인 신파 역시 조선의 것으로 소화되었다.
다음으로 <아리랑>을, 사막을 배경으로 한 루돌프 발렌티노 주연의 활극 <열사의 춤(족장의 아들, The Son of the Sheik)>(조지 피츠마우리스, 1926)과 연관 지은 것 역시 이 영화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나운규의 증언을 옮기면, 졸음 오는 영화가 아니라 우스운 작품이었고, 느리고 어름어름하는 영화가 아니라 템포가 빠르고 스피드가 있었다. 이처럼 “외국영화를 흉내 낸 이 작품”에 조선 관객들은 열광적으로 호응한 것이다.
나운규가 <아리랑>을 만들면서 일본 신파영화와 서구 활극영화 스타일을 취했다는 것은 표면적 차원의 분석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만든 이야기라는 점이다. “전 조선영화를 통하여 가장 우수한 장면”(「동아일보」 1926.10.7)으로 기록되는 사막 장면에서 한 나그네가 여자를 취하려는 악마와 같은 상인을 살해한 것은, 주인공 영진이 여동생 영희를 겁탈하려는 지주의 하수인 기호를 환상 속에서 살해하는 것으로 정확히 반복된다. 물론 지주도 그 하수인도 조선인이라는 설정이지만, 돈으로 민중을 괴롭히는 자본가 계급의 폭압성을 조선인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짐작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아리랑>은 민족영화가 되었고, 조선 무성영화의 기념비적 작품이 되었다. 나운규는 당시 조선 극장가를 휩쓴 미국 대작 멜로드라마와 활극영화의 스타일을 직접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들었고, 식민지 조선인의 민족적 정서를 그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시 조선인 대부분이 처음 영화라는 매체를 알게 된 계기가 <아리랑>을 통해서였다고 할 정도로, 이 영화는 널리 퍼져갔다. 해를 거듭해 상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중인 1952년까지 상영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아리랑>은 조선/한국 사람들의 문화적 정서를 형성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아리랑>이 남긴 것들
다시 <아리랑>의 촬영 현장 사진으로 돌아가보자. 가운데 어린이(후일 촬영기사로 데뷔한 홍일명)를 안고 있는 이가 나운규이고, 바로 옆에 중절모를 쓴 이가 촬영기사 가토 교헤이(加藤恭平), 그 아래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청년이 이후 촬영기사가 되는 이명우, 그 옆이 현구 역의 배우 남궁운이다. 그 위로 조명기를 들고 있는 이가 총지휘 쓰모리 슈이치(津守秀一), 카메라 왼쪽이 이후 촬영기사로, 또 조선영화 최고의 프로듀서로 활약하는 이창용, 바로 아래가 배우 신일선이다. 이 영화의 제작 현장은 일본인 촬영기사의 도제로 조선영화 인력이 길러지는 장소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후 나운규는 계속해서 일본인 흥행사 요도 도라조(淀虎藏)의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통해 <풍운아>(1926), <야서(들쥐)>(1927), <금붕어>(1927)라는 신파활극을 연이어 연출했고, 이창용과 이명우는 가토 교헤이의 촬영부에서 공동 촬영기사로 성장해갔다. 그리고 나운규는 나운규프로덕션을 세워 <사랑을 찾아서>(1928) 등 자신의 감독・주연작을 이어나간다.
<아리랑>으로 촉발된 조선의 무성영화 붐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즉 카프(KAPF) 소속의 영화인들이 영화 매체의 선동적 힘을 인식하고 좌파적 실천을 위해 영화를 제작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 1930년대 전반의 무성영화 후기까지 상업영화의 노선으로 가장 유효한 장르인 신파활극이 유행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윤백남의 연극과 영화에서 주연배우로 활동하던 안종화가 대중영화 감독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이 바로 이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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