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필 안내서]영화사의 순간들 움직이는 사진에서 누벨바그까지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6-04-06조회 16,653
이 연표를 따라가기 전에 먼저 알아둘 점. 이것은 영화사가 아니다. 그래서 제목도 ‘영화사의 순간들’이라고 했다. 물론 영화의 역사 속 (어떤 ‘중요한’) 순간들을 다루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것은 공식적인 영화사에서 관심을 갖는 순간들을 무시하고 오로지 시네필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은 장면들만을 따라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연표를 영화사의 요약본이라고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어떤 사건은 고의적으로 무시할 것이며, 반대로 어떤 장면은 호들갑을 떨면서 내세울 생각이다. 왜 그런 일이 필요해진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둘 사이의 간극을 통해서 영화의 역사 안의 원근법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데서 시네필의 영토가 생겨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도의 역사에 굴복하면 안 된다. 한 가지 더. 여기서는 어떤 균형감각도 유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금방이라도 전혀 다른 장면들로만 이루어진 연표를 다시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몫이다. 두 번째 약점이 좀 더 결정적이다. 문제는 지면의 한계이다. 그래서 여기에 단서를 달고 싶다. 나는 언젠가 가장 완벽한 시네필의 연표를 만들어볼 생각이다. 이 연표는 그걸 위한 첫 번째 지도이다.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시 한 번 환기시키자면 이건 시네필 ‘입문’ 가이드이다

1890
1890년 11월 3일 에티엔-쥘 마레는 셀룰로이드에 이미지를 연속적으로 현상한 다음 그걸 돌려보았다. 모두들 영화의 시작을 이야기할 때 극장에서 상영한 날짜를 기준으로 생각하지만 나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처음부터 1초에 24프레임이 현상된 다음 고정된 속도로 상영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에티엔-쥘 마레는 1889년부터 흥미로운 실험을 거듭했다. 그리고 그날 셀룰로이드 1m에서 10m 사이에 30개에서 120개의 연속된 이미지를 늘어놓았다. 그런 다음 1초에 10프레임에서 50프레임을 번갈아 보았다. 영화는 물론 착시현상이다. 하지만 사진이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그것은 더 이상 ‘활동하는 사진’이 아니라 영화로 질적 도약을 하였다. 사진이 영화가 된 순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거기서 영화가 시작되었다.

1894
1894년 4월 14일 토머스 에디슨은 뤼미에르 형제보다도 빨랐다. 뉴욕 브로드웨이 1155번가에 앤드루와 에드윈 홀랜드 형제가 문을 연 극장에서 에디슨 키네토스코프가 선을 보였다. 키네토스코프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25센트를 넣고 5편을 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50센트를 넣고 10편을 보는 것이었다. 각 키네토스코프는 750장의 사진이 연속으로 ‘활동’했다. 토머스 에디슨은 많은 사람이 모여서 영화를 관람하는 극장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일까? 대답은 정반대이다. 에디슨은 영화란 결국 혼자 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셈이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은 지금 집에서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로 영화를 보고, 혹은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혼자 영화를 보고 있지 않은가. 에디슨은 옳았지만 키네토스코프는 너무 빨리 도착했다. 만일 영화가 처음부터 에디슨 모델로 진화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1895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 파리, 카퓌시네가의 그랑 카페에서 오귀스트와 루이 뤼미에르 형제가 10편의 영화를 상영했다. 모두들 이걸 영화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첫 상영작은 <리옹 공장에서의 퇴근>이었고 마지막 상영작은 <바다>였다(두 편 모두 YouTube로 볼 수 있다). 그날 관객 중에 조르주 멜리에스도 있었다. 그는 그날의 모든 관객 중에서 영화의 미래를 가장 멀리 내다본 사람이다. 멜리에스는 뤼미에르 형제에게 영화의 특허 권리를 넘겨달라고 했다. 뤼미에르 형제는 이 기계는 과학적 발명품에 지나지 않으며 미래가 없을 것이라면서 거절했다. 멜리에스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자기 방식으로 극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혹은 기록과 환상. 영화의 두 개의 길은 그 첫날부터 시작된 것이다.

1900
영화에서 언제 첫 번째 클로즈업이 등장했는가, 에 대해서는 몇 가지 가설이 있다. 지금 현재 남아 있는 1900년의 영화들은 이 ‘크기’의 화면을 증언하고 있다. 영화에는 여러 종류의 ‘크기’의 화면이 있다. 하지만 영화 이론가인 벨라 발라즈는 클로즈업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화적인’ 화면의 등장이라고 주장했다. 영화는 클로즈업을 통해서 사람과의 거리에서 사회적인 거리 ‘안까지’ 들어가기 시작했다. 클로즈업의 가장 이상한 점은 단지 카메라가 다가간 것이 아니라 그 ‘안까지’ 들어가자 갑자기 인물의 내면을 찍는 것 같은 효과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영화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찍기 시작했다.

1912
1912년 7월 4일 ‘슬랩스틱 코미디의 왕’ 맥 세네트는 캘리포니아에 최초의 박스형 스튜디오 키스톤을 세웠다. 1911년 최초의 스튜디오 네스토어 컴패니가 세워진 지 1년 뒤의 일이다. 길거리의 영화는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고 영화는 시스템이 되었다. 이 스튜디오는 재빨리 전 세계 영화의 표준형이 되었고 그런 다음 고전적인 영화의 문법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 스튜디오는 매우 강력한 하나의 시스템이 되어서 야외에서 촬영할 때조차 마치 스튜디오 안에서 촬영하는 것처럼 진행되는 방식을 요구하였다. 혹은 야외를 스튜디오화했다. 영화사들은 속속 이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오늘날 할리우드라는 제국이 세워졌다. 그런 다음 할리우드는 오늘까지 단 하루도 세계 영화의 중심에서 물러난 적이 없다.

1915
1915년 2월 8일 D. W.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이 개봉하였다. 처음 상영되었을 때 16mm 프린트로 상영 시간이 3시간 10분에 달하는 이 대작은 ‘영화’를 단편영화들의 ‘묶음’으로부터 장편영화로 옮겨놓았다. 영화사는 <국가의 탄생>을 오늘날 상업영화의 표준 모델의 등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피스는 이 영화에서 여러 가지 영화 ‘기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효과는 단지 미국뿐만 아니라 지금 막 시작하고 있던 소비에트의 젊은 예술가들에게도 인상적인 영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엄청난 흥행 성공을 거둔 이 영화는 사회적인 영향을 야기하면서 이야기 속에서 다루고 있는 흑인 문제를 놓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첫 번째 ‘비평적’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한 사람은 영화배우 매리 픽포드일 것이다. “<국가의 탄생>은 사람들이 영화산업을 비로소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든 첫 번째 영화예요.”

1918
1918년 이른 여름 모스크바에서 레프 쿨레쇼프는 자신의 학생들과 함께 동일한 인물의 쇼트를 요람에 담긴 어린 아기와 빵 조각, 그리고 칼과 연결하면서 거기서 어떤 심리적인 효과가 나타나는지에 대한 실험을 시작하였다(이 예는 푸도프킨에 의해서 유명해진 사례이며 그 이외에 수많은 실험을 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것은 훗날 쿨레쇼프 효과라고 부르는 몽타주 이론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 수업에는 에이젠슈타인, 푸도프킨, 지가 베르토프, 미하일 롬, 보리스 바넷, 블라디미르 포겔이 출석하였다. 이것을 에이젠슈타인은 충돌의 개념으로 발전시켰고 푸도프킨은 벽돌 쌓기로 정식화했다. 그런 다음 이 수업의 가르침에 따라 이들은 영화를 이론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전함 포템킨>과 <어머니>는 각자의 방식으로 고전이 되었다.

1920
1920년 8월 15일 로버트 플래허티는 7만 5000피트의 필름, 전기조명발전기, 두 대의 에클리 카메라, 현상과 인화에 필요한 장비를 싣고 퀘벡에 있는 포트 해리슨에 도착했다. 그는 알래스카에 사는 북극의 에스키모를 찍을 계획이었다. 이 여행은 역사상 최초로 오로지 영화를 찍기 위한 북극 탐험이 되었다. 로버트 플래허티는 이미 네 번의 북극 탐험 경험이 있었고 그는 에스키모인 가족을 찍은 <북극의 나누크>를 만들었다. 이 촬영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몇몇 장면은 연출되었고 일부 장면에서는 배우들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앙드레 바쟁은 이 영화를 본 다음 ‘편집해서는 안 되는’ 몽타주라는 미학적 개념을 제시하였다. <북극의 나누크>는 첫 번째 다큐멘터리가 되었다.

1921
1921년 5월 20일 영화 이론의 첫 번째 세대인 루이 델뤽은 영화잡지 「시네아(Cina)」에 ‘시네아스트(Cin aste)’라는 표현을 썼다. 루이 델뤽은 1920년 2월 첫 번째 시네 클럽을 조직했으며 창간과 폐간을 거듭한 몇 권의 영화잡지를 발간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루이 델뤽이 영화와 예술가를 합친 이 말은 동시에 과학적 발명품과 상업적 구경거리 사이에 놓여 있던 영화를 예술가의 손에 쥐여주어야 한다는 선언이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은 영화에서 예술과 상업주의 사이의 기나긴 싸움에 대한 예고이기도 했다.

1923
192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촬영을 시작한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의 야심을 처음에는 잘 알지 못했다. <탐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무려 198일 동안 현장은 멈추지 않았고 결정적인 순간은 데스밸리에 마지막 시퀀스를 찍기 위해 갔을 때 벌어졌다. 기록에 따르면 사막의 기온은 33도에서 51도 사이를 오갔다고 한다. 43명의 스태프와 배우들 중에서 14명이 촬영 도중 쓰러져 실려 갔다. 하지만 정작 지옥은 편집실에 돌아왔을 때 벌어졌다. 폰 슈트로하임이 편집한 첫 번째 버전은 42릴에 이르렀다. 당시의 영사 속도와 현재의 영사 속도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상영시간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7시간 42분 상영시간의 ‘괴물’이 등장한 것이다. 1924년 1월 관계자 12명이 참석한 가운데 내부 시사를 가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걸작을 보았다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스튜디오는 이 상영시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듬해 3월 18일에 절반으로 잘라낸 다음 다시 개봉 버전으로 2시간 20분으로 축소시켰다. 아뿔싸! 그 과정에서 MGM 스튜디오는 오리지널 네거 필름을 남겨놓지 않았다. 그저 존재하는 것은 폰 슈트로하임의 콘티 북뿐이다. 오랜 시간 ‘저주받은 걸작’으로 떠돌던 전설 속의 영화 <탐욕> ‘오리지널’은 전 세계 시네마테크의 노력으로 현재 가까스로 ‘고작’ 3시간 59분 버전으로 복원되었을 뿐이다. 1999년 베니스 영화제와 텔룰라이드 영화제에서 콘티와 스틸사진을 동원해 ‘사라진’ 장면들을 추가한 (현재 할 수 있는 한 가장 원판에 가깝게 복원한) <탐욕>이 상영되기도 하였다. 영화사 책에서는 <탐욕>을 ‘영화 역사에서의 성배 중의 성배’라고 부른다. ‘저주받은 걸작’이 영화사에 등장했고 ‘감독판’을 사이에 놓고 스튜디오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1927
<집의 주인>이 성공한 다음 덴마크 감독 칼 드레이어는 프랑스에서 영화 제작 제의를 받았다. 그에게 마리 앙투아네트, 메디치가(家)의 캐서린, 잔 다르크 중 한 명에 관한 전기를 찍기를 요구했다. 드레이어는 잔 다르크를 선택했다. 영화사는 메리 픽포드를 캐스팅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제안은 무산되었다. 1927년 5월 어느 날 빅토르 마르그리트의 <사내 같은 아가씨> 연극에 출연 중인 르네 잔 팔코네티를 보러 갔다. 첫날은 별 감흥이 없었다. 이튿날 다시 보러 갔다. 그리고 자신이 잔 다르크를 발견했음을 알게 되었다. 칼 드레이어는 팔코네티를 잔 다르크로 하여 어떤 화장도 없이 머리를 삭발시킨 다음 오로지 클로즈업만으로 <잔 다르크의 수난>을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재현될 수 없는 위대한 표정의 영화를 완성시켰다.

1928
1928년 1월 루이스 부뉴엘은 학생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 살바토레 달리를 카페에서 만나 어젯밤에 면도날로 눈을 자르듯이 달을 자르는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달리는 손에 구멍이 나자 개미가 기어 나오는 꿈을 꾸었다고 대답했다. 부뉴엘은 이게 영화다, 라고 외친 다음 함께 엿새 만에 <안달루시아의 개> 시나리오를 썼다. 부뉴엘은 자신이 꿈에서 본 걸 어떤 설명 없이 카메라 앞에서 눈을 면도날로 베는 장면을 클로즈업으로 찍었고 이 장면은 영화 사상 가장 ‘쇼크’를 준 순간 중의 하나가 되었다.

1930
그레타 가르보는 공포에 질렸다. 1927년 10월 6일 <재즈 싱어>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했을 때 채플린은 천박하다고 말했다. 그레타 가르보는 그녀의 외국인 영어 악센트를 노출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 새로운 발명에 적개심을 품었다. 하지만 토키영화는 거절할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모든 스튜디오들은 토키영화를 받아들였다.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은 그녀를 설득해야만 했다. 그래서 오로지 그녀를 위해서 톨스토이 원작 소설을 영화로 옮긴 <안나 카레니나>의 제작에 들어갔다. 러시아가 무대인 이 소설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발음을 가진 그레타 가르보의 발성을 연기의 일부처럼 보이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주었다. 1930년 2월 21일 그레타 가르보는 화면에서 처음 말을 했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그레타 가르보가 토키에 투항하는 순간 토키영화는 이제 되돌이킬 수 없는 미래가 되었다.

1933
1933년 3월 28일 프리츠 랑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한 사람은 자신이 요셉 괴벨스라고 소개했다. 괴벨스는 나치 정당의 선전상이었다. 프리츠 랑은 부모 한쪽이 유대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공포에 질렸다. 하지만 그의 아내 데아 본 아르부는 심정적으로 나치 정당을 지지하고 있었다. 프리츠 랑은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다. 게다가 막 개봉한 <마부제박사의 유언>이 반(反)나치영화로 불렸다. 전화를 건 괴벨스는 이번 영화는 문제가 있지만 당신의 영화 <메트로폴리스>를 자신이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러니 독일 UFA 스튜디오에 들어와서 작업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전화를 끊고 프리츠 랑은 즉시 짐을 꾸려 독일을 떠났다. 그 여행은 예정보다 훨씬 긴 길이 되었다.

1936
1936년 9월 6일 앙리 랑글루아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문을 열었다. 이제까지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모으고 그렇게 모인 영화를 보여주는 장소는 없었다. 랑글루아는 이곳에 도착한 모든 영화는 동등한 시민권을 갖는다고 말했다. 여기서 영화 사이의 우열은 없으며 그 영화들은 어떤 편견 없이 상영될 권리를 가졌다. 이 정신은 지구상의 모든 시네마테크의 강령이 되었다. 여기서 시네 클럽 운동이 시작되었으며 또한 시네필 문화가 꽃피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날을 시네필 원년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1938
1938년 12월 23일 존 포드는 모뉴멘트밸리에서 47일간의 <역마차> 촬영을 모두 마쳤다. 이 영화는 모든 것이 불리한 조건 속에서 진행되었다. 누구보다 존 포드 자신이 1927년 <삼인의 악인> 이후 서부영화를 찍지 않았으며 이 프로젝트에 호의적이었던 제작자들은 무명에 가까운 존 웨인을 포기하기를 종용했다. 게다가 로케가 대부분인 이 영화는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었다. 하지만 존 포드는 제작사를 바꿔가면서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 <역마차>는 완성되었고 모뉴멘트밸리는 서부영화의 영원한 풍경이 되었으며 영화의 신화가 되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모든 미국영화는 여기로 흘러들어온 다음 여기서부터 흘러나갔다.

1939
1939년 2월 22일 장 르누아르는 모든 준비가 잘 안 된 상태에서 <게임의 규칙> 촬영을 시작했다. 심지어 주인공 옥타브 역할을 자신이 연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장 르누아르 자신은 이 영화의 작업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위대한 환상>의 성공에 힘입어 새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직후에 무솔리니의 초청으로 푸치니의 오페라를 원작으로 한 <토스카>를 찍을 계획이 있었던 사실에 프랑스 인민전선의 동료들은 르누아르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중에서도 아라공은 맨 앞장에 섰다. <토스카>의 계획은 (여러 가지 이유로) 무산되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고립된 르누아르는 <게임의 규칙>이 마치 오페라이기라도 한 것처럼 연출해나갔다. 이듬해 나치 독일군이 프랑스를 침공했고 파리는 함락되었다.

1939
1939년 6월 12일 할리우드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은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는 ‘영국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에게 텔렉스를 보냈다. 신작을 준비 중인데 당신이 연출해주었으면 좋겠다, 는 제안이었다. 셀즈닉은 <부인 사라지다>를 본 다음 몹시 흥미롭게 여겼고 히치콕을 할리우드로 데려오기 위해 안달이 났다. 히치콕은 이 ‘위험한’ 제안에 응했고 그 영화는 <레베카>이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지만 누군가 축하한다는 말을 건넬 때마다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셀즈닉이에요.” 하지만 히치콕은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할리우드에서 다음 작품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위대한 히치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940
1940년 9월 10일 영화잡지 「치네마」의 기자였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베니스 영화제 취재를 위해 산마르코 광장에 있었다. 영화제는 웅장했고 화려했다. 무엇보다 영화광이었던 무솔리니는 이 영화제로 자신의 파시스트 정당이 얼마나 문화적인지를 보여주고 싶어 했다. 안토니오니는 이 화려함을 지켜보면서 문득 이 부패한 화려함의 공기를 찍을 수 있다면 영화가 파시즘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안토니오니는 돌아오자마자 영화기자를 그만 두고 영화를 찍기로 결심했다.

1941
1941년 11월 아쓰다 유하루는 오즈 야스지로의 촬영‘구미’(撮影組)가 된 다음 <아버지가 있었다>의 촬영을 시작했다. 무릎을 꿇은 채로 계속되는 다다미 쇼트의 촬영을 진행하면서 오즈가 요구하는 안정적인 로 앵글의 구도를 위해 트라이포드를 고정시키는 삼각대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 아쓰다 유하루는 오즈의 그 이후 (다이에이에서 제작한 <부초>를 제외하고) 전작 촬영을 하면서 이 삼각대를 사용하였다. 이 삼각대는 오로지 오즈만을 위한 것이었다.

1947
1947년 10월 5일 리 스트라버그는 엘리아 카잔 등과 함께 뉴욕 44번가 웨스트 432번지에 액터스 스튜디오를 열었다. 리 스트라버그는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 방법을 배운 다음 다시 무대에서 메소드 액팅이라고 불리는 방법으로 배우들과 워크숍을 했다. 그는 배우들에게 자기 삶의 경험을 끌어들여 극 중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는 기술을 방법론으로 발전시켰다. 이 스튜디오를 나온 배우 중에서 말론 브랜도, 폴 뉴먼, 제임스 딘, 심지어 마릴린 먼로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할리우드 배우들의 연기 방법을 바꿔놓았다. 이후 이 방법론은 영화에서 거의 모든 배우들에게 받아들여졌다.

1947
1947년 케네스 앵거는 문득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그 사실을 영화로 보여주고 싶어 했고, 부모가 잠시 집을 떠난 동안 비벌리힐스의 집에서 일주일 동안 <파이어 웍스>를 찍었다. 그런 다음 이 영화를 주변의 소수에게만 ‘커밍아웃’했다. 이 영화가 영화사상 최초의 게이영화는 아니지만, 자서전 형식을 취하면서 언더그라운드 실험영화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14분 상영시간의 <파이어 웍스>는 스캔들이(자 동시에 고전이) 되었다. 케네스 앵거는 체포되었지만 캘리포니아 대법원에서 ‘예술’이라는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이것은 기나긴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1948
1948년 5월 8일 잉그리드 버그만은 <무방비 도시>를 본 다음 감동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이 영화를 만든 이탈리아 감독을 만나고 싶었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말은 “띠아모(당신을 사랑해요)”가 전부였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로베르토 로셀리니에게 전신을 보냈다. 로셀리니의 답장이 즉시 도착했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망설이지 않고 로마로 향했다. 하지만 로셀리니는 유부남이었고 잉그리드 버그만은 미국영화에서 순결한 여인의 대명사였다. 미국의 영화 팬들은 그녀에게 등을 들렸다. 하지만 좀 더 결정적인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영화의 길로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던 로셀리니는 잉그리드 버그만과 함께 모던 시네마의 영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여행>은 현대영화의 분기점이 되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잉그리드 버그만은 그 영화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은 곧 끝났다.

1948
1948년 11월 30일 파리의 셍제르망 데-프레이 보자르가에 위치한 ‘노동과 문화’ 사무실 3층을 찾아간 17세 소년 프랑수아 트뤼포는 그곳에서 활동하던 영화평론가 앙드레 바쟁을 처음 만났다. 이미 파리의 시네필들 사이에서 존경을 받고 있던 앙드레 바쟁은 시네클럽을 운영하던 어린 소년의 열정에 호의를 느꼈다. 이 만남은 두 사람 모두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중요한 순간이 되었다. 그런 다음 그 둘은 평생 동안 서로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을 잃지 않고 영화를 사이에 두고 우정을 나누었다. 앙드레 바쟁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완성된 트뤼포의 데뷔작 <400번의 구타>의 마지막 자막은 “이 영화를 앙드레 바쟁에게 바칩니다”이다.

1950
1950년 2월 마지막 주 어느 날. 로베르 브레송은 3월 6일에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 첫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는 촬영 전에 촬영감독 레옹스-앙리 뷔렐과 함께 캐럴 리드의 <제3의 사나이>를 보러 갔다. 조용히 영화를 본 다음 뷔렐에게 그저 한마디를 했다. “저렇게만 찍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 다음 브레송은 그의 진정한 데뷔작을 만들었다.

1951
1951년 9월 1일 베니스 영화제에서 한 번도 서방세계에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는 일본영화, 게다가 처음 들어보는 감독의 영화에 황금사자상을 안겨주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심지어 일본에서조차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미조구치 겐지는 이 소식을 접하자 첫마디로 신음을 내면서 “하필이면 구로사와가…”라는 그 유명한 탄식을 했다. 하지만 <라쇼몽>의 수상은 생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서방 세계는 미지의 영화의 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연달아 새로운 이름을 초대했다. 칸 영화제는 인도의 샤티야지트 레이의 데뷔작 <길의 노래>를 소개했다. 그것이 처음에는 오리엔털리즘에 대한 호기심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아시아와 서방세계 영화의 ‘새로운’ 만남의 신호탄이 되었다.

1952
1952년 9월 17일 찰리 채플린은 <라임라이트> 런던 시사를 위해 미국을 떠났다. 하지만 사실상의 이유는 할리우드 ‘빨갱이 사냥’으로 알려진 매카시 선풍으로 시작된 청문회를 거절하기 위해서였다. 지나치게 유명한 채플린을 ‘빨갱이’로 엮어 넣을 수 없었던 청문회는 스캔들을 빌미로 그를 청문회에 불렀다. 채플린은 두 차례에 걸친 출석 요구를 모두 거절한 다음 영국으로 떠났다. 떠나자마자 미국 정부는 귀국하면 즉시 체포하겠다고 통보한다. 채플린은 돌아오지 않고 스위스에 머물렀다. 미국을 떠난 채플린은 그 기간이 그렇게 길게 이어질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1972년 아카데미상이 명예 공로상을 수여하기로 했을 때 비로소 미국을 용서하고 돌아와서 상을 받았다.

1953
1953년 9월 16일 첫 번째 시네마스코프 영화 <성의>가 개봉하였다. 20세기 폭스사는 2.66 사이즈까지 스크린을 넓혀볼 생각이었지만 사운드가 문제가 되었다. 결국 2.35로 결정된 이 사이즈는 할리우드를 다시 한 번 뒤흔들었다. MGM도 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무도 시네마스코프가 가진 잠재력을 알지 못했다. 원래 니콜라스 레이의 <이유 없는 반항>은 스탠더드 흑백으로 찍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워너 영화사의 잭 워너는 결정을 바꾸었다. 1955년 4월 2일 잭 워너는 니콜라스 레이에게 <이유 없는 반항>을 시네마스코프 컬러영화로 찍는다고 통보했다. 제임스 딘은 니콜라스 레이의 카메라 앞에서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걸어왔다. 그 순간 진정한 시네마스코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사이즈를 모두들 찬양한 것은 아니었다. 시네마스코프로 찍은 고다르의 <경멸>에 출연한 프리츠 랑은 “시네마스코프가 필요한 것은 뱀을 찍거나 장례식을 찍을 때뿐이지”라면서 ‘경멸’했다. 반면에 존 레넌은 1965년 LSD를 피우고 난 다음 첫 소감을 묻자 “온 세상이 시네마스코프로 보여요”라는 대답을 했고 그 이후 종종 시네마스코프는 LSD 사이즈라고 불렸다.

1958
1958년 8월 알랭 레네는 그의 프랑스 스태프들과 함께 히로시마에 도착했다. 영화를 지원하기로 한 일본 스태프들은 시나리오를 본 다음 몹시 불안해졌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시나리오는 이제까지 그들이 알고 있던 영화와 진행 방식이 전혀 달랐고, 이 영화가 알랭 레네의 첫 번째 장편영화였으며, 이전에는 극영화를 만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더운 히로시마에서 촬영은 조용하게 시작되었다. 알랭 레네는 현장에서 거의 말없이 준비한 대로만 찍어나가기 시작했다. <히로시마 내 사랑>을 본 고다르는 “포크너가 스트라빈스키를 만났을 때”라고 불렀다. 그해 12월 프랑수아 트뤼포는 그의 첫 번째 영화 <400번의 구타> 촬영을 시작했다. 누벨바그가 시작되었다.

나는 의도적으로 여기서 영화사의 사건을 멈춘다. 왜냐하면 지금부터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영화사의 순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듬해 여름 샹젤리제 거리에서 고다르는 <네 멋대로 해라>의 촬영을 시작했다. 나는 여기서 시네필들이 영화사의 역사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여기서부터 새로운 영화사의 순간을 써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계속).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