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필 안내서]10권의 책

by.정성일(영화평론가,영화감독) 2016-04-06조회 1699
이번에는 영화(에 관한) 책을 읽을 차례이다.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하나는 교과서에 해당하는 책은 일단 피할 생각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누구나 말하는 데이비드 보드웰과 크리스틴 톰슨의 「Film Art: 영화예술」은 일단 제외한다. 그 책이 훌륭하긴 하지만 그건 교실에서나 하는 말이다. 혹은 앙드레 바쟁의 「영화란 무엇인가」도 권하지 않을 생각이다. 물론 이 책은 고전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읽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이제 와서는 마치 철학 전문가들이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자구(字句) 해석하듯이 읽어나가야만 맥락이 붙잡히는 까다로운 책이 되어버렸다. 두 번째 원칙은 한글로 출판된 책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런 다음 먼저 말리고 싶은 책을 골라보겠다. 물론 이 책들은 몹시 중요한 책들이다. 그래서 이미 풍문으로 들어본 적이 있거나 아니면 벌써 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독서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특집은 시네필 ‘입문’을 위한 가이드라인이다.

지금은 독서를 말리고 싶은 책
우선 당장 달려가고 싶은 책은 질 들뢰즈가 쓴 두 권의 영화책 「시네마 1: 운동-이미지」와 「시네마 2: 시간-이미지」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시작하는 건 아무래도 안 되겠다. 당신이 철학 프로그램에 훈련되어 있다 할지라도 이 책에 등장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제목과 영화감독 이름에 질릴 것이다. 반대로 시네필들은 첫 장부터 베르그송에 관한 긴 주석으로 진이 빠질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의 전문적인 해설서들조차 들뢰즈가 파리 시네필들의 ‘나쁜’ 영향 아래 놓여 있어서 종종 핵심을 흐려놓는다고 불평한다. 또한 많은 개념이 때로 임의적이고 다소 희미하다. 여기에 두 권의 책을 서로 다른 번역자가 옮겼는데 그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도 난독을 유발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2권이 훨씬 훌륭하다). 하지만 이렇게 말려도 당신의 호기심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은 마음을 달래면서 지나치게 도식적인 감은 있지만 두 권의 「시네마」 책에 관한 요약 판본처럼 정리해놓은 로널드 보그의 「들뢰즈와 시네마」를 먼저 읽기를 권한다. 아마도 전체의 윤곽을 재빨리 잡을 수 있을 것이며 들뢰즈를 인용하는 책들을 읽어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두 번째로 말리고 싶은 책은 발터 벤야민의 논문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다. 이미 한글로 번역돼 여러 판본이 나와 있다. 벤야민의 이 글은 영향력이 어마어마해서 꼭 영화에 관심을 갖지 않더라도 이미 그 존재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짧은데도 불구하고 이 글이 목표로 하는 것이 무언지 그저 신비롭기만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무작정 읽으면 약간 낭패를 맛볼 것이다. 브레히트로부터 받은 영향과 나치 시대의 파시즘 영화들을 바라보면서 영화와 대중 관객의 역할을 ‘기대하는’ 이 미래의 영화를 위한 ‘서설(序說)’을 읽고 나서 감동을 받으려면 예비 훈련이 필요하다. 당신이 이 글을 처음 읽을 때는 할 수만 있다면 좋은 안내자를 만나서 먼저 설명을 들었으면 좋겠다.
세 번째는 슬라보예 지젝의 세 권의 책 「삐딱하게 보기」와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할리우드의 정신분석」 「진짜 눈물의 공포」이다. 물론 지젝의 다른 책도 영화에 대한 끝없는 인용과 조크로 가득 차 있지만 아마 이 세 권이 가장 영화와 직접 맞닿아 있을 것이다(오히려 요즘 책들은 영화로부터 좀 멀어진 감이 있다). 자, 첫인상은 재미있긴 한데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다, 는 게 주변의 불평이다. 당연하다. 이 책들은 영화책인 척하면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용어를 해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걸 차례대로 설명하는 대신 지젝은 독자에게 당신도 라캉을 잘 알고 있잖아, 라고 다소 거만하게 전제한 다음 막무가내로 논의를 전개해나간다는 것이다. 게다가 가끔은 곡예가 지나쳐서 이래도 괜찮은가, 하고 망연자실해질 때도 있다. 자, 당신에게 독서 방법을 제시하겠다. 번거롭긴 하겠지만 라캉에 관한 브루스 핑크의 해설서 「라캉의 주체」를 먼저 읽기 바란다(내가 알고 있는 한 가장 쉽고 명료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런 다음에는 이 요설들이 제자리를 잡을 것이다. 하지만 지젝이 영화를 잘 설명하고 있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어쩌면 거의 동시에 얼마 전에 나온 하스미 시게히코의 「영화의 맨살」을 꺼내 들고 싶을지 모르겠다. 이 책 앞에서는 만감이 교차한다. 물론 하스미 시게히코는 그냥 한마디로 ‘영화 광인(狂人)’이다. 자기 글을 모아놓은 (일본판) 책 제목을 그렇게 붙였고 또한 그 말에 한 점 부끄럼이 없는 분이시다. (나를 포함해서) 내 동료들 중에서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탄식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하지만 이 책은 몹시 위험하면서도 유혹적인 무시무시한 책이다. 읽고 나면 괴상하게도 하스미 코스프레를 하고 싶어진다(일본에서는 아예 ‘하스미 벌레(蓮實蟲)’라고 부른다). 괜히 큐브릭은 이류감독이지, 라고 중얼거려보고 싶어지고 역시 영화는 아무래도 존 포드지, 라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외치고 싶어진다. 잉마르 베리만이 우스워 보이고 이마무라 쇼헤이쯤은 무시하고 싶어진다. 그건 하스미 ‘센세이(先生)’의 견해이지 당신의 생각이 아니다. 게다가 거의 기적에 가까운 통찰력만큼이나 이상할 정도로 부정확한 장면 설명이 부조리할 정도의 조화(?)를 이룬다. 나는 당신이 하스미의 영향력을 견딜 만큼 힘센 시네필이 된 다음에 읽으라고 ‘경고’하고 싶어진다.

바로 지금 시작하면 좋은 책
그러면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요, 라고 반문할 것이다. 나는 약간 입체적인 추천을 제안해보고 싶다. 시작하기에 좋은 단 한 권의 책이라는 건 없다. 다섯 권의 책을 동시에 약간 번잡하게 읽어나가면 어떨까. 나는 그 쪽이 오히려 균형을 잡아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네필에 입문하겠다면 맨 먼저 마음을 가다듬는 의미로 앙투안 드 베크와 세르주 투비아나가 쓴 전기 「트뤼포」를 읽어야 한다. 파리 시네마테크의 악동. 비평가로서 ‘프랑스 영화의 묘지기’라고 소문났던 사람. 그런 다음 29세에 찍은 첫 번째 영화 <400번의 구타>를 들고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이 책은 영화 사상 가장 유명한 시네필의 기록이기도 하다.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마치 소설처럼 읽기에 딱 좋은 수준의 독서. 이 책은 동시에 누벨바그의 입문서이자 프랑스 영화문화에 대한 탐색이기도 할 것이다.
두 번째 책은 약간 의외라고 생각하겠지만 로버트 맥키의 「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이다. 물론 이 책은 시나리오 ‘예비’ 작가들을 위해서 쓴 책이고 교재로서는 ‘고전’에 속한다. 하지만 동시에 시네필들에게 자기가 본 영화들이 어떻게 영화가 되기 위한 밑그림을 그리는지에 관한 몹시 흥미로운 훈련 과정이 될 것이다. 21세기의 시나리오, 라는 주제로 특집을 다루면서 누군가는 이렇게 이 책을 평가했다. “무조건 외울 것. 그런 다음 이 책의 반대로만 하면 새로운 영화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당신이 새로운 이야기의 형식을 떠올렸더라도 이 책을 읽다 보면 소스라칠 것이다. 이미 당신은 낡은 공식을 반복하는 중이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은 다소 지루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결국 이야기라는 것을 생각해주기 바란다.
세 번째 책은 가방에 넣고 들고 다니기에 부담을 주지 않는 추천이다. 프랑스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손바닥 안에 들어갈 만한 사이즈로 가이드하는 ‘카이에 뒤 시네마 영화이론’ 시리즈가 출간되었고 그 중 9권이 번역됐다. 그중에서 「쇼트」와 「시점」 「몽타주」는 특별하게 읽을 만하다. 얇지만 그러나 읽기에 쉽지는 않다.
집에서는 (이 표현이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로저 이버트의 「위대한 영화」 두 권을 화장실에 꽂아두고 하루에 세 번 (혹은 좀 더 자주) 틈틈이 그저 손 가는 대로 제목이 잡히는 대로 두서없이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다 읽을 것이다. 이건 말하자면 당신 주변을 모두 영화로 포위해보자는 전술적 제안이다. 한 가지 더. 이 책에 실려 있는 영화들은 최소한 모두 봤으면 좋겠다. 제목처럼 모두 ‘위대하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영화에 관한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중요한 영화들인 것은 사실이다. 할 수만 있다면 영화를 먼저 본 다음 그 글을 읽는 편을 권하고 싶다.
하지만 아무래도 시네필 입문을 위한 교양으로 영화의 역사를 피해가긴 어려울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나면 그 영화의 자리를 찾아줘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의 역사가 이미 100년을 넘었고 게다가 영화의 역사는 전 지구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이 부담스럽다. 그러니 여기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책상에 앉는 편이 좋겠다. 두 권의 책 중에서 아무 쪽이나 선택해도 괜찮다. 하나는 데이비드 보드웰과 크리스틴 톰슨이 쓴 「세계영화사」인데 두 가지 난점이 있다. 하나는 이 책이 3권으로 분재되어 있고 게다가 절판되어서 중고 서적을 찾아야 한다. 다른 하나는 제프리 노엘 스미스가 편집하고 각 장마다 전문 필자들이 쓴 「세계 영화 대사전」인데 책 제목에서 보는 것처럼 항목별로 나뉘어 있고 분량이 1000페이지에 이른다. 하지만 현재 한글로 구할 수 있는 책 중에는 둘 중 하나가 최상의 선택이다. 독서 가이드. 시험 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면 절대로 처음부터 읽지 말 것. 당신이 관심 있는 영화들의 시대를 중심으로 읽어나가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드웰의 말처럼 영화는 “선형 진화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쫓아왔다면 나는 당신에게 일기를 쓰는 기분으로 당신이 본 영화에 대한 비평을 써보라고 권하고 싶다. 부디 영화를 본 다음 별점을 매기고 나서 난 이미 그 영화에 대한 비평을 썼는 걸, 하지는 말아주었으면 고맙겠다. 할 수만 있다면 그 글을 길게 써보는 편이 좋다. 그래서 그 영화에 대한 생각을 밀고가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끝까지 가보는 경험을 해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은 어떻게 쓸까, 하고 궁금해질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쓴 책을 추천하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일기처럼 쓰여진 영화비평이라는 점에서 허문영의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을 곁에 두고 이따금 들춰 보면서 음, 이 영화를 이렇게 볼 수 있구나, 라고 음미하면서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러고 나면 어렴풋하게 영화에 문법이 있구나, 라고 중얼거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왠지 그런 종류의 책을 붙들기에는 끝내 망설여질 것이다. 우선 인류의 적이라고 불러 마땅할 ‘귀차니즘’이 발동하기 때문일 것이고, 두 번째는 어차피 난 영화를 만들 것도 아니고 그냥 보러 다니고 싶을 뿐이야, 라고 일찌감치 알리바이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나는 좀 다른 방법의 독서를 권하고 싶다. 당신은 이미 카메라를 가지고 있다. 주머니 속에 든 스마트폰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걸로 영화를 만들어보는 것이다. 갑자기 의욕이 생기지 않는가. 이때 당신에게 구스타보 메르카도의 「필름메이커의 눈」은 마치 매뉴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영화는 실패해도 상관없다. 대신 이 책을 읽으면서 영화 한 편을 만들고 난 다음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아아, 저기서 저렇게 시선이 맞지 않는 건 곤란하잖아, 라고 신음소리를 내거나 혹은 저걸 이렇게 편집하다니, 역시 대가는 다르구나, 라고 끄덕거리는 당신을 발견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당신 자신도 모르는 괴력을 발휘해서 스마트폰으로 찍은 영화로 칸 영화제에 갈지 누가 아는가!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이건 당신이 시네필에서 시작해서 영화감독으로 가는 가이드라인이기도 하다. 약간 주문처럼 한 번 더 당신에게 환기시켜주겠다. 같은 영화를 두 번 볼 때 시네필의 첫 번째 단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당신이 본 영화를 써보는 것이다. 물론 세 번째는 영화를 찍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내게 네 번째는 없느냐고 물었다. 물론 있다. 그걸 얼마 전에 깨달았다. 그건 두 번째 영화를 찍는 것이다. 당신의 영화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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