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희]영화의 시간 나는 왜 이만희를 사랑하게 되었는가? ①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5-03-13조회 3,368
이만희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내가 지금 보는 것이 영화임을 과시하는 순간이 등장한다. 그때마다 그걸 영화적인 순간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좀 다른 장면들과 마주치게 된다. 나는 그것이 몹시 신기하다. 그런 순간이 올 때마다 이만희는 마치 될 대로 되라는 듯 이제부터 벌어질 일을 영화에 맡겨둔다는 인상을 준다. 내가 지금 떠올리는 장면은 <휴일>에서 허욱과 지연이 남산에 올라가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벤치에 앉아 있는 숏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17분 41초 부근에 이르렀을 때다. 물론 아름다운 구도이며 카메라는 두 사람을 가련하게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누구라도 여기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갑자기 몰아치면서 이들을 단숨에 날려버릴 것만 같은 바람이다. 거기 그 바람이 없었다면 이 장면은 그렇게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갑자기 무언가 영화 안에 침입했을 때 이만희는 그걸 내버려둘 때가 있다. 이때 나를 감동시키는 것은 이만희가 영화를 믿는다는 것이다. 괜찮아, 이 문제를 영화가 해결해줄 거야. 여기서 갑자기 이야기를 잠깐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영화가 세상과 직접 대면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 된다. 마치 세계의 비밀을 순간적으로 열어 보인 수수께끼와 같은 지혜의 암호라는 숏. 당신이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나는 이만희를 리얼리즘의 계보, 혹은 인상주의라는 식으로 범주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검은 머리>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있으면 너무 황당무계해서 이제까지 내가 뒤따라온 모든 이야기를 갑자기 무효화해버린다는 두려움과 마주하게 된다. 시체들을 뒤로하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그들이 느리게 걸어 내려가는 계단과 그 폐허의 롱숏. 그런데 여기는 어디일까. 땅 밑 저 깊은 곳 지옥에 온 것만 같은 어둠. 두 세계의 공존. 이렇게 진행해도 괜찮은 것일까. 그저 공사 현장 건물에 불과했던 이곳이 일순간에 세트장처럼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킬 때, 그래서 누구라도 곤란하군, 이라고 할 만한 순간에 이만희는 영화를 믿고, 오로지 영화를 믿고, 경계를 순식간에 넘어가버린 다음 돌아오지 않고 그냥 거기서 끝낸다. 상투적으로 설명을 요구하면 여기는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의 사이 그 어딘가라고 진술할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의 롱숏은 그런 곳이 아니다. 차라리 여기서 그들은 자기 발로 자신들의 무덤으로 걸어 들어간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유령의 시간, 폭력을 중심으로 접혔던 세계가 죽음을 통해서 가까스로 펼쳐지는 운명의 무대. 차라리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표현의 표현주의, 그때 영화는 침울한 표정을 짓는 것만 같다. 아니, 차라리 지금 진행하는 이야기가 재난에 아주 가까이 다가갔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이만희는 종종 모험적으로, 그래서 가끔 기적적으로, 재난을 영화에 주어진 선물로 만든다. 그때마다 그 장면 앞에 서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 영화의 임무가 무엇인지 생각하도록 만든다. 영화의 영화로서의 수행. 숏의 능력. 그건 마치 영화 안에서 언제라도 영화가 이야기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러면서 이야기 안의 아무 순간에 갑작스럽게 그 모두를 내어 준 다음 그것과 그 숏을 맞바꿀 것인 양 구조를 요청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적어도 내 생각에는 필시 아마도, 여기에 이만희의 영화를 보는 기쁨이 있다. 나는 그런 기쁨을 (그저 떠오르는 대로) <암살자>, 혹은 <생명>, 그리고 <물레방아> <삼포가는 길>에서 보았다(그리고 의식적으로 <귀로> 혹은 당연히 여기에 포함되어야하는 제목을 비켜갔다). 영화를 보면서, 한국영화를 보면서, 나쁜 한국영화를 보면서, 1961년에 시작해서1975년 4월 13일까지의 나쁜 한국영화를 보면서, (물론 거기서 멈춘 것은 나쁜 한국영화가 아니라 이만희의 새 영화다) 종종 영화가 나쁜 이야기에, 나쁜 주인공에, 나쁜 이미지에, 거의 부패되어버린 것만 같은 기진맥진한 슬픔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영화를 보면서 그럴 때마다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그런데 영화는 어디에 있나요? 끝없는 구조 요청. 그런데도 몹시 사나운 파도. 이만희가 영화를 만들었던 시간과 고스란히 겹치는 박정희라는 이름. 게다가 변덕스러운 날씨. 장사꾼들. 검열위원들. 반공법. 10월유신. 어떤 결단을 내리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 휩쓸려가는 자기 영화를 바라보는 심정이란 어떤 것일까. 그때 문득 우리의 기쁨은 불안해진다. 내내 그 안에 놓여 있던 이만희를 우리는 정말 잘 알고 있는 것일까. 그 안에서 만들어진 영화에 대해서 우리는 정말 잘 보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다시, 몇 번이고 다시, 이만희의 영화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느 순간 이만희는 나쁜 한국영화라는 상황 속에서 영화를 갑작스럽게 출현시켰다. 달리 설명할 수 없는 거의 그것. 하지만 이만희 이전에 아무도 하지 않은 그 어떤 일. 누구도 그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출현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게다가 그것이 무슨 대가를 치르고 이루어진 것인지에 대해서 더는 잘 알지 못한다. 아마도 내 동료들이 그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대신 나는 이만희의 영화에서 재난이라고 불릴 그 하나의 숏(들)을 찾고 또 찾을 것이다. 단 하나의 숏.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전체를 긍정하는 숏. 아니 차라리 세계를 긍정하는 숏. 그러므로 그 숏는 영화사 속에서, 우리 영화사 속에서, 우리 나쁜 영화사 속에서 사건이 된다. 몹시 드물게 좋은 사건. 그때 그 사건이 영화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우리에게 미처 상상할 수도 없게 큰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그냥 간단하게 말하겠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사건을 보아야 한다. 영화에 대한 믿음이라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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