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상상의 시네마테크: 3D, 영화의 역사 어딘가에서 놓친 잠재적 가능성을 제시함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4-06-12조회 3,363
사실 아직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다. 나는 3D가 극장 효과의 일부인지 아니면 미디어로서 영화의 새로운 기능이 발명된 것인지에 대해서 어느 쪽도 미심쩍게 바라보고 있다. 물론 누군가는 오늘날 영화의 경험을 과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면 영화관의 테크놀로지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바타>를 보았을 때까지만 해도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이프 오브 파이>와 <그래비티>를 보고 난 다음 망설이게 되었다. 물론 이 영화들이 걸작인지의 여부는 다른 문제다. 나는 지금 3D라는 효과에 한정 지어서 말하는 중이다. 효과? 그렇다. 지금 당신은 즐기는 법에 대해서 말하는 중인가요? 그럴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원치 않지만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견딜 수 있는 유연한 수영법을 익힐 수밖에 없게 생겼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즐길 것이다.

고전적인 견해를 주장하는 이들은 맹렬하게 반대할 것이다. 영화는 기술적 한계 때문에 예술이 된 거예요. 아른하임의 오래된 주장. 우리는 영화관에 가야만 해요. 영화는 쳐다보는 미디어가 아니라 바라보는 예술이랍니다. 레지스드브레의 하소연. 미안하지만 현대 영화의 경험에 우리는 IMAX 극장에서 시작해서 손바닥 안에 있는 스마트폰의 모니터까지를 모두 포함시켜야할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나와 내가 보는 영화 사이의 수많은 채널과 코드. 스티브 잡스는 21세기 영화사의 일부이기도 하다. 좀 더 단순하게 말하고 싶다. 우리의 몸과 감각은 미디어의 경계에 놓인 인터페이스가 되었다. 따분하게 덧붙이자면 거기서 어디까지가 주체이고 어디서부터가 대상인지는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다. 사라져가는 경계. 무너져가는 방어선. 자본과 테크놀로지는 끊임없이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면서 사실상 우리의 감각과 지각을 재구성하는 중이다.

3D 영화가 앗아간 영화적 상상들

나는 기계를 찬양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바보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트랜스포머> 자체가 현대 영화 관객의 우스꽝스럽지만 비통하리만큼 정확한 알레고리처럼 보인다. 내가 지금 몹시 위험한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물론 중요한 건 지금도 영화 그 자체이지요. 잔뜩 토라져서 다소 단호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 싶다. 그러나 현대 영화에서 점점 더 밀도 높아지는 화질의 이미지와 청각을 장악하는 녹음 방식의 사운드는 간단하게 괄호 칠 수 있는 성격의 영역이 아니다. 영화 제작 과정에 개입한 디지털 시네마의 새로운 변화만큼이나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극장에서의 새로운 체험도 분명히 계산된 연출의 일부일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3D(와 IMAX, 그리고 돌비 ATMOS)는 극장을 떠나자마자 그 효과를 중단한다. 나는 시네마스코프 화면이 극장을 떠난다고 해서 마치 3D처럼 무용지물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상 속의 확장. 그래서 3D를 조롱하는 가장 전형적인 전술은 단지 극장에 관객을 다시 끌어모으려는 바람잡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저 가볍게 무시하는 것이다.

물리적(일 뿐만 아니라 직접적이고 제한적)인 기계적 체험. 게다가 입장료까지 올려놓았다. 덧붙여진 잉여가치. 종종 3D를 구태여 2D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들을 사람들은 (철지난 유행어지만) ‘용자(勇者)’라고 한다. 그러나 예찬론자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3D는 영화의 일부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해올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디지털 영화의 새로운 혁명은 네트워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3D와 IMAX는 영화를 극장이라는 플랫폼에 고정시킨다는 점에서 오히려 고전적인 정의에 의지하고 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재빨리 나는 질문을 짓궂게 뒤틀고 싶어졌다. 자, 극장이 새로워졌다는 사실은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구식의 문법과 전통 속에서만 작동하고 있다. 모순된 사실은 정작 미학적으로 가장 멀리 나아간 감독들은 3D영화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만일 제작비 문제와 연결시켜 반론을 할 작정이라면 대중적 아방가르드라고 부를 크리스토퍼 놀란을 내세울 수도 있다. 그래서 모순된 동거를 반대 방향으로 밀고 나가보고 싶어졌다. 3D가 혹시 전통적인 영화의 로망 중에서 가장 늦게, 너무 늦게, 아마도 마지막으로 도착해서, 그래서 철 지난 세기의 유산인 극장을 지키려는 최후의 전선이라면 어쩌겠는가. 말하자면 논쟁의 반격. 그렇다면 좀 더 대담한 가설을 제시하고 싶다.

상상의 시네마테크를 위한 몇 가지 제안

만일 영화가 처음부터 3D 기술의 스크린으로 제작되었다면 우리는 영화사를 다시 쓸 수 있을까. 여기서 몇 개의 모델을 제시할 생각이다. 그런 다음 상상의 시네마테크를 만들어보고 싶다. 아마도 누군가는 여기서 새로운 3D영화의 미래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3D 스크린의 수용을 둘러싼 논쟁이 갑자기 영화 이론에서 인지주의에 근거해 의식과 자아 사이의 새로운 가교를 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동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 주장은 결정적으로 기계적인 행동심리학과 따분한 서사 분석 그 사이 어딘가에서 맴돌고 있다. 나는 그런 설명에 한눈팔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영화의 역사 어딘가에서 놓친 잠재적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재난의 필연을 경유해 이미 그려진 경계선의 바깥으로 나가보고 싶다.

무중력으로서의 첫 번째 모델.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2D 영화에서 <시민 케인>이 했던 역할을 만일 3D로 찍었다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했을 것이라는 확신은 3D영화를 보면 볼수록 더 갖게 된다. 신기하게도 이 영화는 3D영화들이 부딪친 거의 모든 문제를 이미 해결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영화라는 중력 공간 안에서 무중력의 이미지를 만든 다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거의 모든 감각을 다시 제로로 돌려놓는다. 나는 단지 스타 게이트를 통과하는 장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큐브릭은 인간을 중심으로 배열된 영화 문법을 차례로 탈구시키면서 공간 속에서 영화를 보는 우리를 다시 배치시키고 있다. 어제 다시 보면서 가장 놀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종종 몇몇 장면에서 자꾸만 화면을 터치하고 싶은 충동을 참기 힘들어지는 학습 효과다. 게다가 70mm 슈퍼 파나비전으로 찍은 다음 무성영화처럼 배치된 인물의 동선과 카메라와의 거리는 컷이 바뀐다기보다는 쇼트가 윈도를 열고 닫는다는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말하자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는 이제까지 없었던 영화와 영화를 보는 관객 사이의 거리를 만들어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3D영화를 보기 위해 미래 관객을 위한 예행연습처럼 보일 때가 있다.

상호 교환으로서의 두 번째 모델, 당신은 그건 대형 화면의 효과 때문이라고 반문하고 싶을지 모른다. 나는 재빨리 히치콕의 <이창>을 제시하고 싶다. 물론 발에 골절상을 입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 제프의 방은 그냥 우리가 알고 있는 2D 그대로 보면 된다. 하지만 맞은편 아파트의 창문을 통해서 들여다보는 모든 장면은 3D로 다시 보고 싶다. 이때 교훈은 영화가 한쪽 방향으로만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종종 우리의 시지각은 3D를 볼 때 영화가 시작하고 10분이 지나면 화면에 ‘동동 떠 있는’ 자막을 제외하고 3D로 진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2D로 되돌아버린 듯한 퇴행을 경험한다. 나는 차라리 2D와 3D를 번갈아 교차시켜서 감각을 반복적으로 낯설게 만드는 편이 훨씬 효과적인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이 있다. 이때 다시 본 <이창>의 딥 포커스는 전칭 시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프레임에 만들어진 수많은 창의 불록 효과처럼 보였다. 만일 이 영화를 다시 3D로 ‘트랜스퍼’한다면 그 화면은 IMAX가 되어야 한다.

현실 효과(l’effet de rel)로서의 리얼리티 모델. 영화 이론은 편집 효과나 촬영 기법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착시로서의 현실감이 아닌 사진적 의미에서 그렇게 찍을 수밖에 없는 리얼리티로서의 현실 효과를 꽤 복잡하게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바쟁의 예를 빌려) 단순하게 말하겠다. 사자 우리에 들어간 채플린을 아슬아슬하게 보여주는 방법은 사자와 채플린을 반드시 한 프레임 안에 찍은 쇼트가 포함되어야 관객이 믿는다는 것이다. 무성영화들은 종종 당시 기술 수준으로 믿을 수 없게 목숨을 건 촬영을 했다. 20세기 초 사진작가들은 무거운 사진기를 들고 별다른 안전장치도 없이 종종 공사 중인 수십 층 높이의 빌딩에 올라가 촬영을 감행했다. (약간의 트릭이 있지만) 해럴드 로이드가 <마침내 안전!!>(샘 테일러 외, 2013)에서 건물 빌딩에 한없이 높이 기어 올라가 거대한 시곗바늘에 매달리면서 악전고투하는 장면은 숨을 멎게 만든다. 1923년에 찍은 이 장면은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스파이더맨을 즐기던 누구에게라도 고소공포증을 일깨울 것이다. 나는 이 장면을 3D로 옮긴 다음 관객에게 원래의 감각을 되돌려주고 싶다.

프레임 안의 프레임(안의 프레임 안의…) 모델. 누군가 내게 단 한 편의 3D 모델로서의 영화를 말하라고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자크 타티의<플레이 타임>을 떠올릴 것이다. 잘 알려진 이야기. 이 영화를 70mm로 찍기 위해 타티는 악전고투를 했고 그런 다음 오손 웰스처럼 저주받았다. 만일 21세기에 다시 이 영화를 만든다면 <플레이 타임>을 3D로 타티 월드를 창조해냈을 것이다. 이 영화는 프레임을 커다란 면으로 설정한 다음 거기서 다시 각자 활동하는 면을 만들어나갔다. 상투적으로 말한다면 타티는, 몬드리안이 회화에서 한 것을 해냈다. 말 그대로 프레임의 신조형주의. 이때 나는 타티에게 잘게 나뉜 각자의 면 안의 각자의 사운드를 위해서 ATMOS를 권하고 싶다. 그러면 이면들은 스크린이라는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마치 교향곡과도 같은 화음을 만들어내기 시작할 것이다. 말하자면 현대 영화의 3D에서 아직 아무도 하지 못한 경지.

네 번째 모델의 반복, 혹은 변주. 그런 다음 나는 전편을 3D로 촬영한 오즈의 집에 방문하고 싶다. 이 집은 누구라도 종종 길을 잃게 만든다. 혹은 (하스미 시게히코의 말을 빌리면)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기 몹시 힘들다. 게다가 일단 앉으면 일어날 생각을 앉는다. 그때 방문과 문턱 사이로 이어진 직사각형과 마름모꼴은 마치 인물 동선을 따라서 회전하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어느 영화를 3D로 옮겨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무래도 마지막 6편의 컬러 영화가 좋을 것이다. 그중 단 한편을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안녕하세요>(1959)의 그 이상한 동네를 3D로 보고 싶다.

롱테이크로서의 모델. 하나의 시점을 고정한다는 점에서는 롱테이크가 3D에 가장 적합한 테크닉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동이라는 문제가 남는다.) 3D를 터치의 문제라고 생각한 사람은 <다이얼 M을 돌려라>에서 살인마에게 목을 졸리면서 화면 바깥으로 손을 버둥거리는 그레이스 켈리를 찍은 알프레드 히치콕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 문제를 상상선을 사이에 두고 시선의 분열과 소외의 과정에서 어떻게 분리로 이행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입장이 있다. 하나의 대안이 있다. (3D로 찍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서편제>에서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아버지 유봉과 배다른 남매 송화와 동호가 저 멀리 청산도 굽이굽이 언덕길을 걸어오는 5분 10초의 장면을 보고 싶다. 사뿐사뿐, 느릿느릿, 장단에 맞춰 걸어오는 발걸음. 그 길가에 내리는 오전 햇살. 당신이 유심히 본다면 그 빛은 조금씩 이동하는 중이다. 그때 거기 슬그머니 끼어드는 바람결. 이때 이 장면은 대부분의 액션영화들이 보여준 ‘튀어나오는’ 효과와는 전혀 상관없이 시간의 3D 효과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3D가 정신적 모델이 될 수 있는 예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기술적으로 멀리 나아가도 만일 여전히 지금 같은 지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3D는 영화와 테크놀로지 사이의 수많은 불장난 중의 하나로 금방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3D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지금 영화에서 일어나는 이 변화는 단지 기술적인 호기심이나 특수효과의 차원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영화가 관객의 지각에 직접적인 충격을 주려고 한다. 이때 이 충격은 영화에서 멈추지 않고 영화와 연결된 수많은 네트워크가 일제히 작동되면서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만일 이 충격이 감각에 미치는 반복적인 학습을 지성이 조정하지 않는다면 이미지와 포스트 휴먼의 내적 긴장은 매우 위험한 것이 될터이다.

봉주르, 영화에게 아침 인사

이제 마지막으로 미래의 모델이 남아 있다. 여기서 이 모델의 분류를 무한정으로 열어놓고 싶다. 나는 아직 3D 기술이 영화에서 하나의 형식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대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지금 간절히 기다리는 영화는 고다르의 첫 번째 3D 영화 <아듀, 언어에게 작별인사>이다. (올해 칸 영화제에서 상영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꾸준히 돌고 있다. 어쩌면 이 글이 실린 <영화천국>이 나올 즈음 이미 공개되었을지도 모른다.) 고다르는 언제나 영화 자체를 새롭게 다시 정의했다. 그건 20세기 영화에 대해서도 그렇고, 비디오에 대해서도 그랬다. 여전히 노트북 대신 타이프라이터로 작업을 하는 고다르가 왜 3D에 손을 댔는지에 대해서는 영화를 보기 전에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고다르는 영화에서 디지털을 건드리면서 ‘아름다운 노이즈’라고 불렀다. 이 말에는 왠지 1956년에 쓴 <몽타주 나의 멋진 근심>을 떠올리게 만든다. 고다르의 새로운 근심. 차라리 영화의 근심. 3D는 영화에서 새로운 노이즈가 될 수 있을까. 아니, 무엇보다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고다르의 새 영화를 그 어떤 영화보다도 극장에서 경험하고 싶어졌다. 지금 경험이 영화의 새로운 언어로 떠오르고 있다. 어쩌면 그 영화를 보게 되는 날, 나는 이 글을 다시 써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글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봉주르, 영화에게 아침 인사” 지금 막 영화의 새 아침이 시작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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