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용]스피디한 템포의 에너지 넘치는 액션영화 이두용 감독론③: 액션영화

by.주성철(영화평론가) 2012-08-30조회 5,470

이두용 감독의 액션영화는 남성적 박력으로 넘친다. 단둘이 대결하건 여러 명이 뒤엉키건 동작은 군더더기가 없고짧은 호흡의 편집 리듬은 그러한 에너지를 배가시킨다. 선 굵은 장인의 내공으로 그가 다뤘던 여러 장르 중에서 액션영화가 가장 돋보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두용표 액션영화의 시작

박노식이 ‘점백이’로 나와 북한 도적들과 싸웠던 <날벼락>은 반공영화를 코미디와 액션으로 풀어낸 그의 첫 번째 액션영화라 할 수 있으며, 당시 포스터에는‘스피디한 템포와 액숀’이라는 광고 카피가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이두용의 액션영화를 규정하는 대표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박노식・신성일주연의 첩보액션물 <체포령>(1972), 황해 주연의 스펙터클한 사극액션물 <홍의장군>(1973) 등을 만들며 자신의 장기를 뽐냈다. 하지만 1970년 데뷔한 그를 두고 이때까지 그를 ‘액션영화 감독’이라 부르진 않았을 것이다.그러던 그가 1974년 3월 개봉한 <용호대련>을 시작으로 ‘차리 셸’이라 불린 한용철과 함께 <죽엄의 다리>(4월), <돌아온 외다리>(7월), <분노의 왼발>(9월), <속돌아온 외다리>(10월), <배신자>(10월) 등 그해에만 무려 6편의 태권도 액션영화를 만들었다. 합동영화사 곽정환 사장과 이두용 감독은 해외시장 개척을 목표로 태권도를 소재로 한 액션영화를 만들고자 했고 대대적인 오디션을 개최했다. 하지만 국내 오디션만으로 마땅한 주연급 액션배우를 찾지 못하던 중 카지노 대부 정덕진의 소개로 미국에 있던 한용철과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미국에서 날아와 최고의 발차기를 선보인 한용철은 ‘발차기로 악당 귀싸대기를 파바 박 때리는’ 장면을 원했던 이두용과 함께 단숨에 최고 액션스타 반열에 올랐다.하지만 당시 불과 스물두 살에 불과했기에 나이가 들어보이게 수염을 기르게 했고, 유난히 긴 다리를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나팔바지를 입혔으며, 적당히 태권도 7단이라 속여 마케팅을 했다.

‘만주 웨스턴’ 장르의 권격 버전

<용호대련>를 비롯한 일련의 태권도 액션영화는 기본적으로 이전 ‘만주 웨스턴’ 장르의 권격 버전이자, 단순한 움직임으로 일정한 동선을 벗어나지 않던 이전 ‘다찌마리’ 액션 장르에 대한 현대화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먼저<용호대련>에서 1940년대 만주시장 장면 등은 흡사 스파게티 웨스턴의 무대를 연상시키는데, 이야기 구조 또한 셀지오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1964)와닮았다. 독립군 자금으로 쓰일 백만불을 두고 대립하는 일본 가라테 사부 사사키와 중국 무술 고수 왕, 그리고 주인공 한용철의 삼각 구도는 <황야의 무법자>에서 두 세력을 사이에 두고 자신의 이익에 따라 오가던 주인공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그것은 <황야의 무법자> 역시 앞서 차용했던 구로사와 아키라의 <요짐보>(1961)로도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용호대련>은 검이나 총이 아닌 철저히 권격 액션으로 대결을 풀어냈다. 한용철의 의상은 딱 봐도서부 건맨의 그것이지만 그는 신기에 가까운 발기술만으로 악당들을 제압하는데, 시장통과 바 같은 마치 웨스턴의 무대에서 동양의 고수를 보는 듯한 그 키치적 활력만큼은 기이한 매력을 뿜어낸다. 다음으로 이들 영화는 이전 다찌마리 맨손 액션영화의 단순한 무술 연출을 실제고수들의 몸짓으로 치환해 가공할 파괴력을 뽐냈다. 오디션을 통해 발굴한 30여 명의 액션배우가 그 비중을 가리지 않고 스크린을 가득 채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근본적으로는 이소룡 이후 홍콩식 권격영화의 활력을 그 모델로 삼았지만 한국 태권도 특유의 유려한 발차기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이전다찌마리 액션영화들보다는 한결 전문적이고 합이 길게 연출됐지만, 홍콩 권격영화의 그것과 비교해서는 보다 다대일 대결 지향의 간결하고 힘 있는 편집으로마치 실제 싸움을 보는 듯한 사실성을 높였다.

이두용의 태권도 액션영화

<용호대련>의 성공에 힘입어 불과 한 달 만에 순식간에 만들어졌지만 이들 6편의 영화 중 가장 큰 흥행을 거뒀던 <죽엄의 다리> 이후, 그는 <돌아온 외다리>라는 이름으로 흥미롭게도 한용철을 그대로 두고 6편 안에서 일종의 액자 같은 연작을 만든다. 이들 6편의 영화는 모두 ‘항일 만주 웨스턴’의 공식을 따르고 있는데 <돌아온 외다리>의 경우 장철 감독의 <독비도> 시리즈처럼 신체적 장애를 지닌 고수로서 한용철을 외다리로 만들고, 수수께끼의 고수 김승(권영문 분)을 등장시켜 시나리오 구성상의 반전 요소를 집어넣었다. 이것은 매번 다르게 출연하더라도 마치 한용철 1인의 6부작처럼 느껴지는 이들 영화에서, 이두용 감독이 빠듯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작가적 독창성을 발휘했다는 증거다. 한용철 못지않은 실제 태권도 고수인 권영문이 무술지도에 깊이 관여해 남다른 액션 설계를 보여줬고, 단순히 스파게티 웨스턴의 실내 세트처럼 느껴지던 전작들과 비교하면 마치 표현주의적 디자인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의 독특한 미술감각을 보여줬으며, 이제 막 단역으로 활동하기 시작한(이후 홍콩으로도 건너가 최고의 액션 용병으로 활약했던) 황정리와 정진화도 그 모습을 비췄다. 특히저벅저벅 울리는 구둣발 소리에 긴장하는 매복한 적들과의 일전, 철길과 철교를 사이에 두고 한용철이 야마모토 졸개들을 ‘싹쓸이’하는 액션신은 실내외를넘나드는 로케이션의 해방감과 더불어 특유의 박력으로 넘친다. 극단적인 다대일 대결을 즐겼던 이두용 감독은 조그만 공간에 빈틈없을 정도로 사람들을 밀어넣고 발차기의 쾌감을 만끽했다. 말하자면 앞서 두 편의 작품을 함께 하며 호흡을 맞췄던 그들의 ‘합’이 화려하게 만개한 느낌이다. 한용철이 간도에서 고통받는 한인들을 위해 싸우는 <분노의 왼발>은 군중 액션신에 관한 그의 과도한 집착과 매혹을 드러낸다. 영화가 시작하면 폐공사장으로 보이는 낡은 건물들 사이에서 쉴 틈 없는 발차기의 쾌감으로 가득 찬 극단적인 다대일 대결의 아수라장이 펼쳐진다. 카메라를 향해 무섭게 달려드는 주먹과 무질서하게 착지하며 쓰러지는 남자들의 동물적인 움직임, 그렇게 이두용의태권도 액션영화는 간결하고 절제된 검술의 일본 찬바라 영화나 중력의 지배를받지 않는 듯한 화려한 움직임의 홍콩 무협영화의 그것과 비교해 그야말로 실전을 방불케 하는 직선의 파괴력을 과시했다.

이두용 액션영화의 새로운 도전

이후 한용철이 더 높은 개런티로 타 영화사와 계약해 떠나면서 둘의 협업은 <배신자>로 종결됐고, 이두용은 새로이 강대희를 발굴해 <무장해제>(1975)를 완성했다. 일본군에 붙잡힌 강대희가 풀려나는 조건으로 가라테, 유도 등 일본 무술로 무장한 고수들과 차례로 대결을 벌이는 장면이 이채로우며 도끼를 사용한 액션 등 이전 태권도 액션영화들과 비교해 보다 하드코어한 액션 연출을 선보였다. 곧이어 현길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사생결단>(1975)을 만들었지만 이전과 달리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지 않은 현재 시제의 액션영화였다. 이후 황정리가 주연을 맡은 <해결사>(1981)는 이두용 태권도 액션영화의 장대한 마침표라 할 만하다. 사악한 해결사인 황정리가 더 사악한 적들과 대결하기 위해 강유진(신우철 분)과 힘을 합치는 설정이 흥미로우며, 거의 멀쩡한 건물 하나 박살낼 것 같은 파괴력을 열린 공간의 해방감으로 연결시키는 마지막 벽돌공장 액션신은 단연 압권이다. 태원영화사가 제작하고 전영록이 ‘한국판 성룡’처럼 출연한 <돌아이>(1985) <돌아이2> (1986)는 당시로선 주류시장의블록버스터 급액 션영화였다. 이두용식 액션 연출과 별개로 위험천만한 카체이스와 스턴트 등 당시 충무로 무술인력들의 최고 지점을 선보였다. 이후 새로이 발굴한 신인 여자 액션배우 이진을내세워 <흑설>(1991)을 만들었고, 이전의 격투 액션영화들과는 달리 저격수를소재로 한 액션스릴러 영화 <위대한 헌터 G.J.>(1995)를 만들었다. <돌아이> 시리즈 이후 문예영화 감독으로서가 아닌 액션영화감독으로서 새로운 조류와 만족스럽게호흡하지 못했던 점은 아쉽지만, <장군의아들>(1990) 이후 손쉬운 아류작을 만들기보다여성 주인공과 새로운 킬러 캐릭터의 현대 액션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점은 그의 고집과 색다른 도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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