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과 낯섦으로 가득 찬 혼돈의 상자 홍상수 감독의 <다른 나라에서>(2012)

by.김경묵(영화감독) 2012-08-02조회 1,395
다른 나라에서 스틸
이제 막 개봉한 홍상수 감독의 <다른 나라에서>를 보았다. 다른 나라의 작은 도시 모항에 도착한 세 명의 안느. 홍상수 감독의 전작 <북촌방향>(2011)의 북촌이 유령들이 어슬렁거리는 미로 속의 호러였다면, 모항은 활기찬 ‘오즈의 마법사’의 오솔길 같다. 도로시의 오솔길이 마법의 길이었듯, 세 명의 안느의 길 앞에도 언캐니한 마술이 기다리고 있다. 홍상수 감독의 마술상자에는 아직 사전에는 정의되지 않은 이미지들이 들어 있다. 상자의 뚜껑을 열면 우산, 소주병, 텐트, 휴대폰, 해변 그리고 작은 등대가 나타난다. 그 이미지들은 러시아 인형 마트로시카처럼 꺼내도 꺼내도 같은 형태의 모형들이 크기만 다르게 나타나 이것이 아까 그것과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다르면 뭐가 다른 것인지 종잡을 수 없다. 혹은 세잔의 사과처럼 어디에서 이 사과를 보고 있는 것인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전에도 그가 직조한 시간의 세계는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인상의 촉으로만 감지할 수 있는 익숙함과 낯섦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다른 나라에서>는 사물에마저 이 같은 마법을 부려 투명한 이미지로 만들어버린다. 이 혼돈의 상자에서 꺼내온 것들은 오직 우리의 기억 안에서만 무한히 상상 가능한 것들이다. 사과 혹은 우산은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존재한다. 평행 우주 속의 안느들은, 첫 번째 안느의 행성에서 다른 안느의 행성으로 블랙홀을 따라 이동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우주는 신비로 가득 차 있으니까! 한국의 동시대 다른 감독들이 이야기를 창작하고 있다면, 홍상수 감독은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차원을 창조하는 중이다. 이 불가능한 차원들은 극장 밖을 나와 일상을 살아가며 기시감에 홀리게 될 때 비로소 시작되는 체험이기도 하다. 여정의 마지막에 이르러 안느가 우산을 펼치고 길목을 걸어 들어갈 때, 그녀는 새로운 행성을 찾아 떠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극장이라는 안드로메다를 나왔을 때 우리의 행성 여행은 새로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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