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걸작, 살아 있는 걸작 <오발탄>(유현목, 1961)

by.김려실(부산대 국문과 교수) 2012-01-04조회 2,235
오발탄

아마 ‘걸작의 재발견’의 의도는 세월 속에 잊힌 빛바랜 보석 같은 작품을 찾아내 글심(文勢)으로 닦아 본래의 광채를 되돌려 주자는 데 있을 것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이 꼭지를 읽는 주된 재미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걸작, 즉 관객이나 평론가에게 버림받은 ‘진흙 속 진주’를 건져낸다는 의외성일 것이다. 그런 기대치를 배반하는 것 같아 송구스럽지만 내가 추천하는 영화는 한국적 리얼리즘의 대명사로 빛나는 살아있는 걸작 <오발탄>(1961)이다.

자유당 말기, 영화인들이 쏘아 올린 <오발탄>

<오발탄>의 원작은 1959년에 발표된 월남 작가 이범선의 동명 소설이다. 불혹의 늦깎이 작가였던 그는 이 소설에서 실향민의 절망적인 삶을 통해 전쟁이 남긴 상흔을 묘파하며 남한 사회의 ‘자유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어머니, 그래도 남한은 이렇게 자유스럽지 않아요?” 가자,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노모를 설득하기 위해 철호는 이렇게 말해보지만 죽지 않기 위해 선택한 자유는 그의 가족을 죽지 못해 사는 빈곤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해방촌이 폭격으로 무너지던 날 노모는 미치고 말았고, 상이군인인 동생 영호는 제대 후 2년째 무직이며, 양공주가 된 여동생 명숙의 나일론 양말은 뒤꿈치가 뚫렸다. 철호가 치료비가 없어 치통을 참는 동안 영호는 강도가 되고 아내는 아이를 낳다 죽는다. 압도하는 현실 앞에 무기력한 가장 철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썩은 이를 뽑아내는 것뿐. 어딘가 가야만 하지만 그는 조물주의 오발탄인 양 갈 곳을 알지 못한다. 입에서 선지피를 흘리며 까무룩 의식을 잃어가는 철호의 귓가에는 노모의 “가자!” 소리가 환영처럼 들린다.

1950년대 후반의 한국영화는 멜로드라마의 전성기, 코미디영화의 개화기였다. 입도선매 식으로 지방 흥행사들이 시나리오를 보고 제작비를 대주던 시절, 이 암울한 소설을 영화화하겠다는 데 나서는 투자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더 늦기 전에 시대의 모순을 바로 잡아야한다는 대명제에 공명했음일까. 영화인들이 한뜻으로 뭉침으로서 이 걸작이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 해방 전부터 잔뼈가 굵은 거장 김학성(촬영)과 김성춘(조명)이 신예 감독에게 찬동해 동인제로 크랭크인했고, 당대 최고 인기 배우였던 최무룡과 김진규를 비롯해 전 배우와 스태프가 노 개런티로 참여했다.

<오발탄>이 조명한 전후 한국사회

유현목 감독은 <오발탄>을 1년여에 걸쳐 나누어 찍었다. 어려운 자금 사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필름 한 자도 허투루 낭비할 수 없는 열악한 조건이 도리어 철저한 사전 구상과 혼신의 연기를 낳았다. 감독은 재능과 아이디어를 총동원해 빈약한 세트를 치밀하게 짜인 구도와 동선으로 채웠으며, 배우와 스태프들은 늘 우동 한 그릇으로 식사를 대신할 수밖에 없어 실제로 배가 고팠다. 그러니 늦봄이 배경임에도 종종 화면을 흐리는 배우들의 입김은 옥의 티라기보다는 그들의 고군분투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인 셈이다.

촬영 도중 <오발탄>은 4•19를 맞이했고 카메라는 더 과감하게 현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영화는 충치를 우직하게 썩히고 있는 소시민 철호보다는 영호와 그의 전우들, 국가를 위해 몸 바쳤지만 갈 곳 없는 청춘들의 울분에 초점을 맞추었다. 상이용사에 대한 직업 알선도, 연급 지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젊은 상이용사들의 염세자살 사건이 종종 신문에 실리던 시기였다. 그런 맥락에서 영호의 범죄는 생계형 범죄, 사회적 범죄인 셈이다.

시나리오에는 없지만 영화에는 영호가 복개 중인 청계천 수로를 따라 도망가는 신이 있다. 뒤쫓아 오는 경찰들을 향해 영호가 쏘아대는 총소리에 아기 울음소리가 겹치면서 목을 맨 여인의 시체가 프레임 안에 잡힌다. 생활고로 인해 자살을 택했을까? 어미의 식어가는 등에 업힌 아기의 애달픈 울음소리가 영화 속 명숙의 대사를 상기시킨다. “오빠, 어떻게 하면 미칠 수 있어요?” 이렇게 <오발탄>은 죽거나 미치지 않고서야 견디기 힘든 비정한 시대를 고발했다.

깨어진 유리, 시대적 비극

<오발탄>에는 유리가 깨지는 장면이 두 번 등장한다. 영화는 어느 술집의 유리문이 깨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술에 취한 영호들이 소란을 피우다 깬 것인데 그들은 유리값도 술값도 물지 않고 군가를 부르면서 거리로 나간다. 두 번째 장면에서는 영화사의 유리문이 깨진다. 원작에는 없지만 아프레걸 타입의 여배우 미리가 영호의 애인으로 등장해 상이군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출연을 알선한다. 그가 입은 옆구리의 관통상이 이용가치가 만점이라는 것이다. 상처를 보여달라는 조감독의 주문에 영호는 차라리 더 장사가 잘되게 눈도 코도 다리도 없는 놈으로 내용을 고치라며 유리문을 때려 부수고 나간다.

요컨대, 유리를 깬다는 액션은 시대적 울분의 발로인 것이다. 첫 장면은 전쟁으로 몸 상하고 사회의 홀대로 마음 상한 ‘상이용사’의 울분을, 두 번째 장면은 타인의 고통까지도 상품화하는 타락한 영화계에 대한 감독의 울분을 표출한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두 장면은 깨어진 유리처럼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의 전조로 기능한다. 영호는 결국 권총강도가 되어 ‘법률선’마저 깨뜨리게 되는데, 그의 마지막 대사는 자신의 범죄 역시 목매단 여인과 다를 바 없는 시대적 비극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다시 없도록 나를 저 네거리 한복판에 세워놓고 목을 매달아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오발탄>은 어떻게 살아남았나?

<오발탄>이 개봉된 것은 1961년 4월. 그러나 한 달 뒤에 들어선 5•16 군사정부는 어두운 내용과 용공성(미친 노모가 “가자!”는 곳이 북이라서)을 이유로 이 영화의 상영을 금지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영화제의 한 심사위원이 이 영화를 본선에 올려놓았기에 미국 눈치 보기에 급급했던 군사정권이 상영 금지를 철회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발탄>의 진정한 복권은 관객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예술파 감독 유현목이 상업 감독이 되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고 철호의 처지에 공감한 샐러리맨들은 영화가 끝나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밤늦도록 막걸리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리얼리즘, 그것이 바로 <오발탄>이 암담한 현실을 이기고 살아남아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재발견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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