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영화]톰, 톰, 피리꾼의 아들(켄 제이콥스, 1969~1971) 영토 없는 영화들을 위한 지도: 1950년대 이후 실험영화⑪

by.유운성(영화평론가) 2018-04-03조회 3,336
톰, 톰, 피리꾼의 아들 스틸

영화의 여명기, 당시 ‘움직이는 사진’(motion picture)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던 에디슨 사(社)는 자신들이 제작한 단편 필름 작품의 저작권 등록을 위해 프레임 전체를 종이에 프린트해 미의회도서관에 납본하는 방식을 택했는데, 초기 무성영화의 이런 저작권 등록 방식은 실물 프린트를 통해 저작권을 등록하고 돌려받는 식으로 정책이 바뀐 1912년까지 지속되었다. 즉 1912년 이전까지 미국에서 영화는 사진의 형태를 취함으로써만 저작권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보면 번잡하기 짝이 없는 이런 저작권 등록 방식 덕분에 당대의 영화 상당수가 보존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아이러니다. 화재에 취약한 질산염 필름(nitrate film)으로 제작되었던 초기 영화의 상영본과 오리지널 네거티브 대부분이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동안, 미의회도서관에 보존되었던 이 ‘종이 프린트’(paper print)들은 자신이 소중하게 품고 있는 형상들의 그림자를 스크린에 다시 투사할 그날을 망각 속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에디슨 사에서 제작한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용 단편 <재채기>(1894)의 종이 프린트.
에디슨 사에서 제작한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용 단편 <재채기>(1894)의 종이 프린트.
총 45프레임. 저작권 등록(1894년 1월 9일)된 최초의 영화.

 
1942년, 당시 미의회도서관 저작권관리국 직원이었던 하워드 월스(Howard Walls)는 저작권 관련 자료들을 검토하던 중 그때까지 방치되어 있던, 1894년부터 1912년 사이에 제작된 3,000여 편의 영화의 종이 프린트 더미들을 발견한다. 월스는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의 지원을 얻어 종이 프린트들을 다시 셀룰로이드 필름에 옮기는 프로젝트에 착수했지만, 종이에서 필름으로의 매체 전환 문제를 기술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이 프로젝트가 결실을 보게 된 것은 켐프 니버(Kemp Niver)를 통해서였다. 1950년대 초부터 니버를 통해 프로젝트가 다시 활성화된 이후 1965년 즈음에는 종이 프린트 대부분이 16mm 필름 프린트로 전환되기에 이른다. 월스와 니버, 그리고 종이 프린트에 얽힌 이 흥미로운 역사는 사실과 허구를 뒤섞은 빌 모리슨의 아름다운 단편 <그녀의 영화 The Film of Her>(1996)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종이 두루마리에서 되찾은 미국 역사>(1953, 19분)
종이 프린트를 16mm 셀룰로이드 필름으로 전환하는 공정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당시 복원된 초기 영화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켐프 니버가 대본을 쓰고 연출했다.

 
미의회도서관 소장 종이 프린트의 복원 소식에 관심을 가진 이들 가운데는 미국 아방가드르 영화감독 켄 제이콥스도 끼어 있었다. 세인트존스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그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보여줄 요량으로 몇 편의 복원 프린트를 대여했다. 이 가운데 한 편의 영화가 특별히 그의 관심을 끌게 된다. 1905년에 빌리 비처(Billy Bitzer)가 촬영하고 연출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 릴짜리 작품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이 그것이다. 스콧 맥도널드(Scott Macdonald)와의 인터뷰에서 켄 제이콥스와 그의 부인 플로 제이콥스는 이 작품을 소재로 작업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플로 제이콥스 : 하지만 이 영화들을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전에 필름들이 저희 집에 배송되어 왔고 그래서 그가 그것들을 살펴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보면서 이래저래 만지작거리곤 했는데 요즘에 신경시스템(Nervous System: 켄 제이콥스가 고안한, 잔상효과를 이용한 환각적 영사 방식)을 가지고 하는 식은 아니었고요, 그보다는 “와! 이거 봐, 내가 이 남자를 뒤로 움직여볼게!” 하는 식이었죠.
 
켄 제이콥스 : 점점 더, 저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하듯 이 필름들을 다루기 시작했어요. 그리고는 친구들을 불러 그들 앞에서 퍼포먼스를 해 보였죠. 한 번은 퍼포먼스가 끝났는데, 제 친구인 화가 존 쿠스(John Koos)가 다가왔어요. 전 그때 완전히 기진맥진해져서는 벽에 등을 기대고 영사기 옆에 서서 어질어질한 가운데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물건들을 정리하려던 중이었거든요. 그런데 그가 말하길 “켄, 이거 끝내주는데! 이건 꼭 촬영해둬야 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러려고 생각했어.”라고 대답했죠. 실제로 그럴 생각이었고요. 그가 제 어깨를 꽉 붙들면서 말했죠. “꼭 그렇게 해!”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방가르드 영화사(社)의 기념비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톰, 톰, 피리꾼의 아들(Tom, Tom, the Piper's Son)>(1969~1971)이다. 종종 이 작품은 1905년의 무성영화 필름을 소재로 작업한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작품으로 기술되곤 하는데 아주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한 기술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이다. 원본 영화의 필름 복제본이나 디지털 영상클립을 가지고 작업하는 통상적인 파운드 푸티지 작품들과는 달리, 제이콥스의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은 반투명 스크린에 1905년 작 원본 영화를 구식 칼라르트-빅터(Kalart-Victor) 16mm 영사기로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뒤로 그리고 다시 앞으로, 때로는 깜빡이게, 때로는 멈추는 식으로 영사한 것을 16mm 카메라로 스크린 반대편에서 재촬영한 기록물을 토대로 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 작품은, 에이빈 뢰사크(Eivind Røssaak)가 지적한 대로, “아카이브적인 것과 퍼포먼스적인 것 사이의 인터페이스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윌리엄 호가스의 판화 <사우스워크 장터>
빌리 비처의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의 첫 번째 장면
윌리엄 호가스의 판화 <사우스워크 장터>(위)와 빌리 비처의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의 첫 번째 장면(아래)
 
제이콥스의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은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보는 이를 끌어당기는 작품이다. 이를테면 물성(materiality)에 집중하는 아방가르드 영화의 한 경향에 매혹을 느끼는 이라면, 때론 더 이상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필름의 세부를 확대해 입자(grain)를 감촉하게 하면서 미적 경험을 끌어내는 부분에 흥미를 가질 것이다. 혹은 매체를 가로질러 이루어지는 표현의 역사에 관심을 지닌 이라면,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rgath)의 판화 <사우스워크 장터 Southwark Fair>(1733)에 묘사된 광경이 빌리 비처를 통해 운동감을 얻고, (종이 프린트 형태로 미의회도서관에 보관되었다가) 제이콥스의 손을 통해 다시 떠들썩한 영화적 환영으로 되살아나는 과정에 흥미를 느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환각적 경험의 힘은 굉장하다. 원본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형상들을 멈추고, 확대하고, 깜빡이게 하는 영화적 안무의 광경을 지켜보는 동안 관람자는 일시적으로나마 다른 우주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제이콥스의 영화가 도취의 경험에만 탐닉하면서 원본 영화를 무정형적인 시각적 덩어리로 재가공하고 있느냐 하면 또 그렇지 않다. 몇몇 평자들이 지적한 대로 제이콥스의 작품은 일종의 “세미나 같은”(뢰사크) 분석적 구조 — 원본 영화 전체를 보여주고, 이어 제이콥스 자신에 의해 꼼꼼히 탐사되고 변주된 영화를 보여주고, 다시 원본 영화를 보여준 후에 짧은 에필로그로 마치는 방식 — 를 취하고 있다.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의 전체적 구조에 실제로 자신이 학교에서 영화를 가르치는 방식이 반영되어 있음은 제이콥스 스스로도 인정한 바 있다. 이 때문에 니콜 브레네즈(Nicole Brenez)와 같은 평론가는 언어에 기반을 둔 종래의 이론적 연구를 확장시키는 ‘시각적 연구’(visual study)의 탁월한 사례로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을 꼽기도 한다. 브레네즈에 따르면 제이콥스는 “기술적 선도라는 면에 있어서나 텍스트적이고 영화적인 표명에 있어서도 중요한 이론의 창조자”이다. 하지만 결국 <톰, 톰, 피리꾼의 아들>에 대해 가장 근사한 설명을 내놓은 것은 제이콥스 자신이다. “예술은 타격을 가해 당신을 수백만 조각으로 토막을 내고는 다음 타격을 위해 결합시킨다. 작품에는 질서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질서는 정신없는 경험을 자극하기 위한 방안(recipe)일 뿐이다.”

한편으론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는 것도 가능하겠다. 여기서 제이콥스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필름을 조작하면서 내뱉은 “와!”, 혹은 그의 16mm 퍼포먼스를 본 친구 존 쿠스가 내뱉은 “끝내주는데!” 같은 감탄을 불러일으켰던 ‘바로 그’ 시공간의 특이성 자체를 영화화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즉 여기서 제이콥스는 퍼포먼스라고 하는, 일시성과 현장성(actuality)에 속박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사건 자체의 경험을 영화적 장치로 포착하고 재구성한다는 대담한 모험에 뛰어든 것이다. 3D와 가상현실(virtual reality) 기술이 본격적으로 우리의 경험을 재구조화하기 이전에 시도된, 전통적 시네마토그래프 장치를 통한 ‘경험의 복제’라는 실험.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이 영화사(史)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희유한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서 제이콥스의 야심은 카메라 앞에 놓인 사물, 인물, 혹은 사건과 같은 현실을 복제하고 이를 재구성함으로써 영화적 경험을 제공한다는 익숙한 영화관(觀)을 이미 훌쩍 넘어서 있다.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퍼포먼스는 그것을 단순히 카메라에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경험의 질감과 양감을 상실한 건조한 사건으로 남게 된다. (예컨대 무대극을 현장에서 기록한 영상물들은 어쩐지 생기 없는 인형놀이와 같은 느낌을 준다.)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은 제이콥스가 1905년 작 원본 영화로 16mm 퍼포먼스를 행하고 있는 광경이나 그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동안 반투명스크린에 비친 영상을 단순히 기록한 것이 아니다. 이 퍼포먼스가 이루어지는 동안 스크린에 비친 영상은 삼각대를 장착한 핸드헬드 카메라를 통해 다양한 크기로 촬영되었고 이후 이 촬영본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정교하게 편집되었다. (반면 오늘날 신경시스템을 이용한 제이콥스의 퍼포먼스는 스크린에 비친 시각적 형상들을 고정된 카메라로 장시간 촬영해 편집 없이 상영용 디지털 버전으로 제공되곤 한다.) 이따금 제이콥스는 어둠 속 한가운데 조그맣게 빛나는 스크린을 보여주거나, 필름이 되감기는 광경을 보여주거나, 영사 중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그림자놀이를 하는 광경을 삽입함으로써, <톰, 톰, 피리꾼의 아들>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원본 영화 자체가 아니라 스크린에 비추어 재촬영한 영화의 표면임을 꽤 직접적으로 환기시키기도 한다. (아래 그림 참조)
 
1905년 원본 영화의 프레임 일부가 확대되어 보이다가(좌) 갑자기 어둠 속에서 빛나는 스크린 전체가 보인다(우)
1905년 원본 영화의 프레임 일부가 확대되어 보이다가(좌) 갑자기 어둠 속에서 빛나는 스크린 전체가 보인다(우)
 
   필름이 되감기는 광경
   필름이 되감기는 광경

스크린 왼쪽에 영사 도중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는 누군가의 손가락이 보인다
스크린 왼쪽에 영사 도중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는 누군가의 손가락이 보인다

 
제이콥스의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이 경험의 복제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은, 이 영화가 그에 걸맞은 상영 환경을 영화적 장치로서 요구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이 영화는 통상적인 영화관 환경보다는 (제이콥스가 1905년 원본 영화를 가지고 그의 16mm 퍼포먼스를 행한 환경과 유사하게) 영사기가 영사실이 아닌 객석 가운데 자리한 상태에서 주기적으로 모터 소리를 공간에 퍼뜨려가며 스크린에 이미지를 투사할 때 비로소 과거의 퍼포먼스라는 사건 자체를 현재적 경험으로 되살려 놓는 것처럼 보인다. 국내에서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이 필름으로 처음 상영된 것은 2016년 10월 16일 문래예술공장에서였는데 —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을 주관하는 무빙이미지 포럼이 마련한 『영화에 관한 3개의 강연과 노트』 행사의 일환으로 —이때 상영환경 또한 바로 그러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상영될 때,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은 어느 순간 그것의 영사를 감싸고 있는 공간을 기묘하게 유령적인 활력으로 물들인다. 과거의 퍼포먼스라는 사건 자체가 지극히 감각적으로 현전하게 되지만 어디까지나 곧 부서질 것 같은 환영적인 느낌으로만 그러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강의를 들을 때 으레 그러하듯) 때론 졸음을 부르기도 하는 나른한 긴장 속에 임하면서, 유령화된 공간 저편에서 빛나는 스크린으로부터 문득 생생한 유령들이 튀어나와 춤추는 것을 목도할 때, 그 춤이 절대적으로 지금/이곳(now/here)에서 펼쳐지는 어디에도 없는(nowhere) 춤이라는 것을 감히 부인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 본문에서 집중적으로 다룬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은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켄 제이콥스의 작업에 관심을 가진 이라면 옥스퍼드대학출판부에서 나온 선집 『Optic Antics: The Cinema of Ken Jacobs』(2011)를 참고하면 좋다. 본문에서 인용한 에이빈 뢰사크의 글 「Acts of Delay: The Play Between Stillness and Motion in Tom, Tom, The Piper's Son」과 니콜 브레네즈의 글 「Recycling, Visual Study, Expanded Theory: Ken Jacobs, Theorist, or the Long Song of the Sons」 또한 이 책에 수록되어 있다. 본문에서 인용한 인터뷰는 캘리포니아대학출판부에서 나온 스콧 맥도널드의 『A Critical Cinema 3: Interviews with Independent Filmmakers』(1998)에 수록되어 있다. 제이콥스의 영화세계 전반과 신경시스템 혹은 신경환등기(Nervous Magic Lantern)의 원리에 대한 개괄적인 안내를 얻고 싶다면 『씨네 21』에 실린 중앙대학교 김지훈 교수의 글 「무한과 역설의 영화」를 참고하길 바란다. 신경시스템의 원리를 활용한 제이콥스의 장편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작품 가운데 하나는 <로렐과 하디가 등장하는 시각적 익살광대극: 안녕, 몰리 Optic Antics Starring Laurel and Hardy: Bye, Molly>(2005)인데 이 또한 유튜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켄 제이콥스의 아들인 에이저젤 제이콥스(Azazel Jacobs)는 촉망받는 독립영화 감독 가운데 한 명으로, 그의 <마마스 맨 Momma's Man>(2008)에는 켄과 플로 제이콥스 부부가 주인공의 부모 역으로 출연해 거의 그들 자신을 연기하다시피 한다. 1965년 이후 이들이 거주해 왔던 뉴욕 맨해튼 아파트(꼭대기 층)가 영화의 주요 무대가 되고 있어 흥미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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