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파'와 '배고파'의 갈림길, 金東振 대 金東珍

by.이준희(대중음악비평가) 2011-01-11조회 1,350

같은 계통에서 활동하는 여러 사람의 이름이 같다면, 설령 한자 표기가 다르다고 해도 곤란한 경우가 종종 생기게 마련이다. 이 사람을 저 사람으로 오해하기 쉽고, 오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일일이 자료를 찾아야 하는 일도 꽤나 번거롭다. 그런 면으로 볼 때 한국 대중가요계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이름이 바로 김동진이다. 한자 표기는 각각 다르지만 김동진이라는 이름이 셋이나 등장하니, 누구라도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먼저 가요계에 등장한 김동진은 金東進이다. 1930년대 중반에 작사가로 활동하며 10여 곡 작품을 남긴 인물인데, 그밖에는 더 이상 알려진 정보가 없다. 그나마 활동 시기가 1930년대로, 활동 분야가 작사로 한정되어 있으므로 이 김동진은 다행히 다른 두 김동진과 크게 헷갈리지는 않는다. 처음 이름을 접했을 때 ‘설마 김동진이 대중가요 가사까지 썼나?’ 의아하게 생각하다가, 대개는 곧 ‘그러면 그렇지!’ 하고 의혹이 풀리게 된다.

반면 다른 두 김동진, 즉 金東振과 金東珍의 구별은 꽤나 골치 아픈 문제다. 두 사람 모두 작곡가로 활동했고, 대중가요 분야에서 주로 활동한 시기도 1950년대 중후반으로 정확히 겹친다. 1950년대 당시 자료, 즉 음반 딱지나 가사지, 잡지 등 각종 인쇄물에는 대개 사람 이름이 한자로 표기되어 있으므로, 확인만 하면 구별이 가능하기는 하나, 한자와 친하지 않은 후인(後人)들에게 하나하나 찾아보기란 아무래도 번거로울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김동진이라 하면 떠올리게 되는 작곡가는 金東振이다. 지난 2009년에 96세로 타계한 그는 ‘가고파’의 작곡자로 잘 알려져 있고, 그밖에도 ‘내 마음’, ‘목련화’ 등 지금도 대중적으로 애창되고 있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런데 金東振의 이력과 작품 중에는 ‘예술원 종신회원인 유명 가곡 작곡가’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흥미로운 점들도 상당히 많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괴뢰정권 만주국에서 활발하게 음악 활동을 했고, 광복 이후에는 고향(평남 안주)으로 돌아와 북한에서도 지명도 있는 음악가로 활동했다. 6.25전쟁 때 월남한 뒤에는 이북 출신들에게 쏠린 이념적 의심의 눈길을 불식시키기 위해서였는지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6.25의 노래’ 같은 정책적 작품을 여럿 만들었고, ‘신창악’이라는 이름으로 판소리 현대화에 몰두하기도 했다. ‘백치 아다다’ ‘축배의 노래’ 등 기억할 만한 1950년대 대중가요도 그의 작품이다.

金東振보다 네 살 정도 아래인 金東珍은 부산 출신이며, 일본에서 음악을 공부해 주오(中央)음악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 직후 1954년 무렵부터 대중가요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한때 자신의 이름을 딴 KTJ라는 레이블로 직접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다. 1950년대 중후반에 나름대로 꽤 열심히 활동한 작곡가인 것은 틀림없으나, 어찌 된 일인지 이렇다 하게 꼽을 만한 작품은 별반 없다.

한 사람은 대중가요 전문 작곡가가 아닌데도 지금까지 불리는 작품을 남겼고, 한 사람은 대중가요 작곡가이면서도 기억되는 작품을 남기지 못한 셈인데, 두 사람이 활동하던 당시부터 이미 그러한 사정을 반영해 이들 동명이인을 구분해 부르기 위한 호칭이 있었다. 즉, 金東振은 ‘가고파’ 김동진으로, 金東珍은 ‘배고파’ 김동진으로 통했다고 한다. 실소를 자아내면서도 한편으로는 별다른 히트곡 없이 궁핍한 삶을 살았던 작곡가에 대한 애처로운 느낌이 들기도 하는 별칭이다.

그러면 ‘가고파’ 김동진과 ‘배고파’ 김동진의 대중음악 행로가 달라진 갈림길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물론 일단은 타고난 음악적 역량의 차이가 많이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기는 한다. 신이 나를 낳고 어찌 다시 모짜르트를 낳았는가 탄식했던 살리에리의 독백을, 잘 나아가는 동명이인을 보며 ‘배고파’ 김동진도 읊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것뿐이었을까. ‘가고파’와 ‘배고파’의 갈림길에는 하늘이 내려준 능력 외에 한국영화의 부흥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판단 역시 어느 정도 개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백치 아다다> 등의 예를 거론하기도 했지만, 사실 金東振의 대중가요는 모두 영화주제가였다. 지금은 통상 가곡으로 분류되는 ‘저 구름 흘러가는 곳’도 영화 <길은 멀어도>(1960년 개봉)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다. 1950년대 중반 이후 한국영화의 부흥이 가시화되면서 1950년대 후반에는 영화주제가 붐이 크게 일었고, 金東振은 바로 그 흐름을 제대로 잡아 탔던 것이다. 영화음악에 가담하게 된 것이 단순한 호구(糊口) 문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대중적인 음악 영역을 새롭게 개척해보려는 적극적 의도 때문이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보아 그가 주력 분야였던 가곡과는 또 다른 차원으로 대중가요 영역에서도 성과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영화주제가에 착목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찍이 작곡가 황문평(黃文平)이 스스로 가요인이 아닌 영화인으로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듯이, 金東振 또한 스스로 대중가요를 만든다는 생각은 애써 아니 했을 수도 있다.

金東振과 달리 金東珍의 작품 중에서는 영화주제가를 발견할 수 없다. 당대 유행을 선도한 영화주제가에 손을 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서는 도리어 퇴출 종목이었던 악극을 놓지 않으려 한 흔적까지 보인다. 정확한 이유는 역시 알 수 없지만, 웬만한 대중가요 작곡가치고 영화주제가 한두 곡 쓰지 않는 사람이 없던 시절 金東珍의 그러한 행보는 여하튼 의아한 일이다.

타고난 역량의 차이야 하늘이 정한 것이라 해도, 안목의 차이는 결국 자신의 몫일 수밖에 없는 법. 그러고 보면 ‘가고파’의 길도 ‘배고파’의 길도, 결국은 모두 김동진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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