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영화를 찾아서]필름 찾아 삼만리 영상자료원 미보유 필름 수집기

by.장광헌(수집부) 2011-01-06조회 625

이런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 영화는 어떻게 발굴한 건가요?” 단순한 질문이지만 반대로 대답하기에 가장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한 편의 영화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영화필름 수집 작업은 한마디로 “맨땅에 해딩”이다. 또한 어떠한 제보라도 1%의 가능성만 있다면 시작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몇 년이 걸리는 지난한 작업이기도 하다.

최근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대한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국가 간 협력 강화 차원에서 프랑스는 도서를 한국에 반환한다고 발표했지만 정작 프랑스국립도서관(BNF) 사서들은 이를 반대하고 있다. “왜 남의 나라 문화유산을 안 내놓는 것이냐” 라고 욱! 할 수 있겠지만 영상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해외 아카이브들을 자주 접하는 필자의 경험으로는 열에 아홉은 절대 반환하지 않는다. 억울하지만 원본 자료는 절대 건네주려는 곳이 없다. 단지 굴욕적이지만 “복사라도 해주시면 안될까요?”라고 부탁할 뿐이다.

영화필름 수집은 일반에 공개된 것보다 훨씬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고, 때에 따라 머리싸움을 해야 하지만 매번 좋은 성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때론 지저분한 쓰레기더미에서 자료를 찾아야 하는 경우도 있고 이 정보 저 정보를 종합해서 정보를 캐가는 탐정놀이(?)를 할 때도 있다. 필름을 수집하면서 경험한 재미있는 혹은 황당했던 에피소드에 대한 글을 청탁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는 요즈음 몇몇 경우를 되짚어보려 한다.

도사견이 품고 있던 영화필름

꽤 오래전 얘기다. 이태원에 거주하는 김모 감독님이 이사하는데 오래된 외화필름을 처치할 곳이 없어 버리고 간다는 연락을 받았다. 부리나케 달려가 보았으나 이미 고물상으로 넘어가버린지 오래. 수소문 끝에 김포 언저리에 있는 (난지도 쓰레기장을 연상시키는) 고물상으로 갔다. 사정 설명과 설득 끝에 “저쪽 끝에 있으니 가져가라”라는 귀찮은 듯한 말투의 대답을 뒤로한 채 필름박스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높게 쌓인 고물 한켠에 개집이 있었는데 그 안에 필름 박스 두벌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다행이다 싶어 필름을 가지러 가는데… 아~~~ 이것 참!! 필름 박스 옆에는 어른만한 도사견 2마리가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름 개를 좋아하지만 그 녀석들은 어찌나 무섭던지… 개들 얼굴만 바라보길 30~40분. 결국 개주인을 수소문해 협조를 구했고, 개집 안에 있는 필름 두 벌을 무사히 꺼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녀석들이 어찌나 필름에 애착이 있었던지 무수한 영역표시를 해놓아 그 냄새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가시지 않았다. ‘그래도 필름을 찾아온 게 어디냐?’라고 되뇌며 회사에서 필름박스를 열어본 순간 또 한 번의 좌절! 두 벌 모두 우리가 이미 보유하고 있는 외화 프린트였다. 그날 하루 종일 온몸에서 악취가 난다며 회사 직원들의 눈총만 받았다.

이처럼 허탕을 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직접 들고 와 확인해야만 수집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얻을 수 있다. 그래서 항상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고 벌레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창고에 들어가 필름을 일일이 확인하는 작업이 일상이 될 수밖에 없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성 극영화 <미몽> 극적으로 찾아내

2004년 중국전영자료관에서 <군용열차>(1938) 등 일제강점기 영화 4편을 발굴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듬해인 2005년 <반도의 봄>(1941) 등 2편의 필름에 대한 소재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했다. 중국에 가기 전 필요한 사항을 점검했다. 당시만 해도 1945년 이전 한국영화의 보유율은 7% 이하였기 때문에 영화제목, 감독, 배우 등 170여 편에 달하는 초기 영화의 한자로 된 제작정보가 필요했다. 또한 일제감정기에 한국영화가 만주를 거쳐 중국에 소개되었다는 등 필름의 이동경로도 가능한 한 상세히 파악해야 했다. 중국에 도착한 첫날, 우리는 중국전영자료관 관장을 만나 협조를 구했다. 우리는 미로와 같은 복도를 따라 귀빈실로 안내를 받았고 그곳에서 관장과 사무국장, 국제담당 간부를 만났다. 내부 시스템을 이용해 데이터베이스를 보다 상세히 검색하기 위한 협조를 구하고자 말을 꺼내려는데 관장은 일 얘기는 그만하고 우선 술을 마시자고 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 중국전영자료관 관장이 엄청난 주당이라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중국전영자료관 직원 300여 명 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주당이었다. 그래서 사전에 같이 간 직원과 합의해 한 명은 관장과 함께 술을, 다른 한 명은 정신을 차리고 업무 논의를 하자고 했다. 그 운명은 가위바위보로 결정되었다. 내가 졌다. ㅠ.ㅠ 딱 죽기 직전까지 마신 것 같다. 동석한 전영자료관 사무국장이 “수고했다”고 말한 것은 기억이 나지만 숙소에 들어온 후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영화 수집을 위해서는 각 나라의 특성에 맞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 다음날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아침 9시30분에 전영자료관을 다시 방문했다. 신기하게도 DB 검색 허락이 떨어졌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DB검색은 중국전영자료관 내의 직원들에게조차 접근이 제한된다고 한다. 

먼저 우리가 확인하기로 한 2편의 작품을 확인하고 한국고전영화임을 확실히 확인했다. 그리고 우리가 가져간 한자로 명기된 목록과 출연진 등을 하나씩 검색해나갔다. 3~4시간을 쉬지도 않고 진행하자니 전영자료관 직원도 약간 짜증이 난 듯했다. 그래서 DB 검색 화면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고 쳐다보는 우리 눈길도 빨라져야 했다. ‘문예봉’을 검색해 화면을 넘겨버리려던 순간, 동행한 직원과 난 동시에 “Back!! Back!!”을 외쳤고 화면을 뒤로 넘기니…’迷夢’이라는 제목과 함께 필름 정보가 있었다. “찾았다” 우리는 급하게 사전에 조사해 간 <미몽>에 대한 나머지 정보를 중국 직원에게 보여주고 그 자리에서 이 작품에 대한 복사도 요청했다. 지금 생각해도 짜릿한 경험이었고 극적인 순간이었다.

기적의 질산염필름 <청춘의 십자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영화 <미몽>(1936)을 무사히 반입, 국내 영화인들의 흥분이 서서히 가실 무렵 또 하나의 짜릿한 경험을 하게 된다. 어느 날 국내 개인 자료소장자가 중요한 필름을 가지고 있다고 연락해왔다. 한창 바쁠 때였기 때문에 자료수집 담당자와 필름을 확인할 복원담당자가 소장자의 자택을 방문했다. 그리고 바로 내게 연락이 왔다. “어~이거 질산염필름인데?” 머리가 띵~했다. 영상자료원이 보유한 질산염필름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국내에서 질산염필름은 네거티브가 1930년대 말까지, 프린트가 1950년대 초까지 쓰였기 때문에 ‘최소 1950년대 초 필름이겠다’라는 조심스러운 추측을 했다. 하지만 수화기 저편에서 들린 한마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만들었다. “이거 네거티브 필름이야”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선 소장자를 설득해 그 필름을 영상자료원으로 가지고 왔다. 우리를 더 들뜨게 했던 것은 필름 캔에 적힌 <아리랑><장한몽><무지개> 때문이었다. 전체 9롤 중 1롤은 엔딩타이틀이었고 1롤은 안타깝게도 필름 훼손의 말기암이라고 하는 백화현상이 진행되어 있었다. 나머지 7롤은 수축도가 높긴 했지만 외형상 놀랍게도 양호한 편이었다. 필름수축도가 높아 정상적인 기계에 확인할 수는 없었고 작품 판별을 위해 중간 중간 이미지 프레임 출연자 스틸컷 추출 작업에 들어갔다. 이원용, 신일선, 김연실 등 DB상 출연진을 조합 검색한 결과 당시 영화사연구팀 담당자는 안종화 감독의 작품 <은하에 흐르는 정열>(1935)일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좀 더 세부적인 출연자 정보 추출작업을 통해 최종적으로 이 필름은 안종화 감독의 1934년 작품작 <청춘의 십자로>로 밝혀졌다. 한마디로 대~~~박! 한국영화사를 2년이나 앞당기다니! 그 오랜 시간 동안 적절한 보존환경 속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필름 상태가 양호했던 것은 필름을 꺼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소장자는 1980년대 초 그중 한 캔을 확인하기 위해 열어봤는데 이후 훼손이 급속히 진행되어 백화현상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자료소장자의 부친은 6?25전쟁 발발 직후까지 단성사를 운영하신 분이었으며 이후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중요한 필름이니 버리지 말고 꼭 가지고 있으라고 당부하셨다고 한다. 

필름이 확인된 이후 몇몇 자료소장자와 자료원 간의 요구사항이 맞지 않아 생각보다 협상 기간이 길어졌다. 그리고 양도·양수 절차가 진행된 후 국내에서는 복원작업을 할 수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복원작업을 의뢰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질산염필름은 자체만으로도 폭발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비행기에 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수소문 끝에 특수포장과 국내와 일본의 여러 행정사안을 거쳐 무사히 복원을 마칠 수 있었다. <청춘의 십자로>는 이듬해 변사 공연 기획물로 재탄생해 우리 자료원의 가장 인상적인 상영 영화가 되었다. 오랜 시간, 그것도 국내에서 이 필름이 온전하게 보존되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수집 담당자들은 국내 시골 극장에서부터 해외의 아카이브까지 찾아다니며 유실된 영상자료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 작업은 잃어버린 그 기간만큼 아니 그 이상이 걸릴 수도 있다. 오래전 어느 직원이 수집 출장을 가면서 내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만약 찾지 못하면 어쩌죠?” 못 찾을 수도 있다. 못 찾을 때가 더 많다. 하지만 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계속 노력해야 한다. 어딘가에 잠자고 있을 우리의 문화유산을 찾아내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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