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제야 온 거야

by.부지영(영화감독) 2010-03-17조회 594
부지영감독

영상자료원에 처음 갔던 건 2000년, 나이 서른에 입학한 한국영화아카데미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였다. 오리엔테이션의 일환으로 그곳에서 고 유현목 감독님의 <오발탄>이 상영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들어온 친구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분위기는 (받아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예비군 훈련 받는 분위기랄까…. 하지만 영화광도 아니요, 고전영화는 더더욱 모르는 나는 엄숙해 보이는 흑백영화에 잔뜩 쫄아서 ‘꼼짝 마’ 하고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난다. 게다가 예술의전당 안에 있었던 그 시절의 영상자료원에 들어서자, 화학용품 냄새와 필름 냄새가 내 후각을 자극하면서 마치 오래된 도서관 서가에 서 있는 것처럼 내 볼품없는 영화적 자의식이 사정없이 나동그라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렇게 영상자료원은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열패와 좌절의 기억으로만 존재할 것 같았는데…. 옴마나! 그 후 6년의 시간이 흐르고 이사 간 상암동 아파트 바로 앞에 자료원이 이사를 온다는 것이 아닌가. 굴러서도 갈 수 있는 거리. 새로 단장한 자료원을 두 딸과 녀석들의 친구들과 만화영화를 보기 위해 방문하였다. 예전의 그 엄숙함 대신 ‘왜 이제야 온 거야’ 라는 원망 섞인 친밀감이 환청처럼 들리는 듯했다. 인연은 돌고 도는 것이라 했던가. 그 후 영상자료원은 나의 작업실이자, 도서관이자, DVD방이자, 친정엄마의 고전영화 극장이자, 아이들의 만화영화 극장이 되었다. 온 가족이 애용하는 문화시설이 되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자료원을 자주 애용하는 것을 안 아이들 어린이집 엄마의 권유로 지하 1층 시네마테크의 작은 상영관을 빌려서(의외로 대관료가 싸다) 어린이집 아이들과 부모들이 함께 단체관람을 한 적도 있다.

요즘엔 시네마테크의 주옥같은 기획전들을 달력에 표시만 해두고 제대로 챙기지 못해 아쉬움이 너무 크다. 하지만 영화 작업이 끝나고 다시 나의 쉼터이자 놀이터로 돌아올 날을 학수고대한다. 참, 시네마테크 안 ‘까페 1895’의 커피도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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