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요동하는 역사와 함께 성숙해가는 씩씩이들: <핑크페미>, <길모퉁이가게> 남아름, 이숙경, 2018

by.채희숙(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2019-04-23조회 4,352
핑크페미 스틸
 
갈등의 민낯을 보는 일은 어렵다.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하기 때문에, 일궈온 것이 무너질까 무섭기 때문에, 과오를 인정하는 것이 괴롭기 때문에, 부끄러운 모습이 드러날 것 같아 불안하기 때문에 등등으로 갈등 상황 및 그 안의 사람들을 마주하는 일은 미뤄지거나 외면당하기 일쑤다. 그러나 2018년 두 편의 다큐멘터리 <핑크페미>(남아름)와 <길모퉁이가게>(이숙경)는 갈등의 역사 속에서 헤쳐가야 할 문제를 응시하는 용기를 지니고 있다.

페미니스트를 엄마로 둔 감독이 가족사를 되짚으며 페미니즘과 자신의 관계를 탐색하는 <핑크페미>는 여러모로 깨는 작품이다. 헌신적인 엄마와 철부지 자식의 구도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엄마는 일찍이 사회활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꾀했으며, 초등학생 때부터 딸은 자식을 위해 대기하는 엄마의 모습을 요구하지 않을 만큼 철이 들었다. 이 영화는 여성이기 때문에 분홍 리본 달린 공주 옷을 입었던 시절 대신 페미니스트보다 공주병으로 불리는 편이 사회적으로 낫다는 것을 체득했던 시절을 가진 청년의 이야기다. 페미니스트 엄마를 상대로 살아온 딸의 투쟁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녀에게는 페미니즘의 부재가 아니라 너무 무거운 페미니즘의 역사가 문제였던 것이다.
 

감독이 엄마와 함께 오랜 회포를 푸는 과정에서 우리는 두 가지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그 첫 번째는 우리사회에 지속해온 페미니즘 역사와의 반가운 만남이다. 한국사회에는 엄마의 역할을 우선시 하라는 것은 남녀차별이라고 어린 딸에게 말하며 세월을 헤쳐 온 쎈언니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거인 같은 엄마의 역사를 딛고 진격하는 딸의 역사다. 여유롭게 대화에 임하는 엄마 앞에서 울먹이며 그간의 사정을 고백하는 딸이 있다. 마냥 기대고 싶은 사람에게서 지극히 이성적인 태도를 요구받는 것은 매우 야속한 일이고, 신뢰하는 대상으로부터 평가를 받는 위치에 서는 건 자기를 부정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앞에 서는 일이다. 그러므로 울먹거림과 함께 조목조목 나오는 딸의 이야기에는 진실한 용기가 담겨 있다. 위험을 각오하고 자기 역사의 거인 앞에 선 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핑크페미니스트’는 엄마에게 딸로서의 자기를 고백하는 한편 엄마의 그늘에 있기를 경계하면서 스스로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자신을 껴안고 주체적으로 페미니즘을 질문해간다. 역사는 우리를 가르치고 억압하고 좋고 나쁜 여러 영향력을 행사한 우리의 조건 중 하나다. <핑크페미>는 이런 역사의 자산 및 도전의식과 함께 다시 커나가는 존재의 힘에 대한 호기로운 보고서다.

<길모퉁이가게>는 사회적 기업의 일원인 청년들과 기업을 이끄는 수장을 소개하되 이들의 사연을 파고들지는 않는다. 영화에서 응시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 기업이라는 프로젝트를 이끌어 가는 시간 속에서 ‘사회’와 ‘기업’이 어떻게 성장해가는가이다. 정규 학업 과정에 적응하지 못했거나 그 과정을 거부한 젊은이들과 함께 하는 도시락 제조 기업 ‘소풍가는 고양이’는 두 가지 과제 수행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것은 멤버들이 사회적 관계 안에서 스스로 또 함께 성장해가는 것, 그리고 기업의 운영이나 문화가 성장해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저런 불안정한 운영상황에 직면하여 이를 극복하기 위한 ‘소고’의 노력은 매출 증가라는 목표를 향하게 되고, 이러한 기업 성장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애초에 꿈꿨던 성장의 위상을 위태롭게 한다.   
 

영화는 조용하게 ‘소풍가는 고양이’의 세월을 따라가는 것만 같지만 작고 세세한 긴장과 변화의 국면을 놓치지 않는다. 웃으면서 하는 회의지만 그것은 회사에 어떻게 기여할지 이야기해야 하는 잔인한 자리기도 하다. 전문 인력이 들어오고 효율적이고 철저한 서비스 관리가 시작되지만 이는 예민한 직원들을 사회적으로 좀 더 나이스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통제하는 문제와 맞닿는다. 이것은 그전에 멤버들 각각이 자기 상황을 헤쳐가기 위해 필요했던 성장을 이야기 나누던 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리고 직원들이 쉬는 시간에 옹기종기 아이스크림을 먹던 풍경 대신 밤늦게 혼자 짐을 내려놓거나 코에 휴지를 꽂고 있는 모습들이 대치된다.
 

감독은 서서히 풍경이 바뀌어 가는 ‘소고’의 변화를 기록한다. 이는 기업의 성장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 언뜻언뜻 보이는 인물들의 표정과 이야기가 이 영화를 갈등하는 시간의 기록으로 만들어준다. 좋은 의도나 이미지에 숨지 않는 영화의 기록은 갈등을 봉합하지 않고 막을 내린다. 직원을 다그치는 주방의 소리와 함께 영화는 자본주의 하에서 규정되는 기업의 운영을 질문한다. 그리고 청년들이 자신의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태도를 일터의 성장과정과 함께 지켜가는 일이 요원해지는 우리사회의 한계점에 대해서도 묻는다.

<핑크페미>와 <길모퉁이가게>는 대결하기 어려운 갈등 앞에 기꺼이 선다. 자기 앞의 대상에게 휘둘리거나 주눅이 들지 않고 잘 이해하기 위해 역사와 대면하고 대상의 본질적 경향과 마주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 한가운데를 젊은 청년들이 걷고 있다. 그들은 망설이기도 하고 뛰쳐나가기도 하면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역사 속에서 역사에 지지 않으려는 인물들과 연출자의 자세가 씩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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