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용왕궁의 기억 김임만, 2016

by.임종우(영화평론가) 2019-01-17조회 4,068
용왕궁의 기억

기다란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린다. 어디에서 온 바람일까. 어디에 있는 식물일까.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여기 경계인 한 명이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용왕궁의 기억>은 그렇게 시작된다. 연출자 김임만은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재일조선인 2세이고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다. 영화 연출과 제작이 본업은 아니며 수입이 불안정한 일용직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그의 경제적인 문제는 그가 지속적으로 부모와 갈등을 맺는 원인 중 하나다. 혼인을 하고 슬하에 자녀를 두고 있으나 배우자가 재일조선인인지 혹은 지금까지 혼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영화를 통해 확인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정보가 영화 안에서 생략되어 있는데, 대신 영화는 김임만과 그의 부모의 관계, 즉 재일조선인 1세와 2세의 관계에 집중한다.    

영화가 전면화하는 문제는 김임만 자신과 어머니 사이의 소통 불가능성이다. 소통은 언어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김임만과 어머니의 언어가 다르다는 게 문제다. 이는 재일조선인 2세가 보편적으로 마주하는 일이다. 재일조선인 1세는 한국어로 말하지만, 일본에서 태어난 2세는 제1언어(생활 언어)로 일본어를 사용한다. 여러 조선학교 다큐멘터리에서 확인할 수 있듯 2세와 3세 등 후세대도 한국어를 배우기는 하지만 이러한 언어 교육 기회가 모든 재일조선인에게 제공되는 것은 아니다. 김임만의 경우 집안 문제로 유년기 혹은 청소년기에 한국어를 배우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부모는 일상에 필요한 일본어는 할 줄 알지만, 그가 영화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를 완전하게 구사한다고 보기 어렵다. 한편, 영화에서 그들은 서로 한국어로 대화한다. 여기서 김임만과의 단절이 발생한다. 그는 부모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제외되고 소외된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대화해야 할까. <용왕궁의 기억>은 김임만 감독이 재일조선인 2세로서 경험하는 딜레마와 어머니와의 대화의 어려움에서 오는 상처를 고백하고 토로하는 사적 다큐멘터리다.

용왕궁의 기억

김임만이 느끼는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물론 재일조선인을 향한 일본 당국의 차별과 억압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그가 고백하는 일종의 수치는 어머니에 대한 것이다. 가령 그녀의 외적인 초라함이나 능숙하지 못한 일본어 등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 그녀가 집에서 벌였던 굿판이다. 김임만은 어린 시절 어디선가 굿판 소리가 들려오면 혹시 자기 집에서 하는 것은 아닐까 불안했다고 회상한다. 재일조선인임을 숨겨야 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울리는 굿판의 소란을 그는 기억하고 있다. 굿판을 벌이는 심방이 주로 활동했던 장소가 바로 용왕궁이다. 용왕궁은 재일조선인 1세 여성들이 가족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굿판을 벌였던 굿당이자, 정신적으로 한반도와 이어지는 공간이었다. <용왕궁의 기억>은 이곳에 대한 아카이브 영화이기도 하다1)
  
용왕궁의 기억

<용왕궁의 기억>은 김임만이 부모와의 갈등을 해결하는 드라마를 지향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단언컨대 그들의 갈등은 해결되기 어렵다. 소통 불가능성의 원인인 언어의 장벽은 쉬이 극복되지 않는다. 김임만이 한국어를 학습한다고 해서 일본어로 이루어지는 사고가 온전히 번역되는 것도 아니다. 이 불가능성이 재일조선인 사회의 비극임을 그는 순응하고 있다. 오히려 이 사실을 전면에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갈등을 극복하고 화해하기에 이미 ‘늦었다’는 점에 있다. 그가 부끄러워했던 어머니는 나이가 들고 쇠약해져 끝내 언어를 상실하기에 이른다. 더는 ‘제주도에 가자’는 그의 제안에 반응할 수 없다. 표정이나 행동을 통한 소통조차 불가능해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사과하고 애도하는 일이다. 그는 끝내 어머니가 알려주지 않았던 과거의 상처를 직접 추적해나간다. 

김임만이 용왕궁을 기록하거나 제주도로 이동해 제주 4.3사건의 기억을 탐색하는 일련의 과정은 어머니와의 단절을 극복하기보다는, 어머니와 연관된 공간과 기억들로 우회하여 그것의 근원에 조심스레 다가가는 일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어머니의 상처와 염원이 잔존한 사물과 장소에 접속하는 주술로서 김임만은 영화 제작에 임하고 있다. <용왕궁의 기억>이라는 영화를 만드는 일은, 사라진 어머니의 기억에 가까워지고 그녀를 비롯한 다수의 국가폭력 희생자를 애도하는 일종의 굿판이 된다. 앞서 재일조선인 1세가 가족에 대한 사랑과 염원을 담아 한반도와 일본을 연결했던 정신적 공간이 용왕궁이라 했다. 그렇다면 영화 <용왕궁의 기억>이 그 자체로 용왕궁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김임만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1)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듯 용왕궁은 모두 철거되었다. 용왕궁에서 심방이 사용했던 도구나 그곳에 있었던 물건들은 현재 제주대학교 재일제주인센터에서 보관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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