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은하해방전선 윤성호, 2007

by.한동균(영화애호가) 2014-11-20조회 5,731
은하해방전선

장편 영화 감독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는 주인공 영재(임지규)의 상황은 영화 초반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그의 연인 은하(서영주)가 이별을 고하고, 준비 중인 영화의 제작자와 프로듀서는 캐스팅과 시나리오 등의 문제로 그를 압박한다. 일련의 사태에 의해 영재는 실어증에 걸리게 되고, 그의 실어증은 점차 발화시에 몸에서 악기 소리가 나는 기이한 형태로 심화된다. -<은하해방전선>의 간략한 줄거리.

아무 의미 없이 허공을 맴도는 공허한 수다, 그 수다로 인해 벌어진 소동,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지나간 고요한 소강상태 속에서 오가는 한두 마디의 진솔한 말. 이것이 영화감독 윤성호가 가장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순간들의 공식이다. 

단편 <두근두근 배창호>(2008)는 이러한 윤성호의 공식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좋은 예시다. 배창호의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의 대사를 ‘영화 속 영화’로 차용한 이 영화는 영화 촬영장의 소동을 담고 있다. 테이블 대화 씬을 찍는 와중에 남자 배우는 급히 자리를 떠나고, 이 영화의 감독(감독 윤성호가 직접 연기했다.)이 대역을 맡게 된다. 촬영을 이어나가기 위해 감독이 내뱉는 임기응변식의 말들이 범람하기 시작하고, 영화 속의 영화가 방향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일 때 촬영 장소인 카페의 주인(오마주의 대상인 배창호가 이 역할을 맡았다)이 감독에게 다가가 건넨 몇 마디 말로 인해 영화 촬영은 다시 순조롭게 흐르게 된다.

윤성호의 장편 데뷔작 <은하해방전선>(2007)에서 그의 공식은 더 흥미로운 형태로 적용된다. 이 공식이 적용된 다른 영화들이 그저 공허한 수다와 진솔한 몇 마디의 말을 구분하는 정도에 그치는 반면, <은하해방전선>은 실어증과 다국적의 언어 그리고 텍스트(인터넷 채팅과 필담)를 활용해 대화와 언어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영재가 말을 할 수 있었을 때, 그는 말이 많았다. 거의 쉬지 않고 말하는 영재이지만, 은하는 그에게 우리는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대화를 하지 않고, 그저 자기가 말할 차례를 기다릴 뿐이었다. 은하를 제외한 그의 주변 인물들도 영재와 별반 다르지 않다. 감독의 의사와 상관없이 시나리오를 수정하는 등,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말만 내뱉을 뿐이다. 이 영화는 정말 많은 대사와 대화로 구성되어있지만 이 모든 말들은 사실 진정한 의미의 대화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공격과 질문들을 항상 수다와 궤변으로 받아치던 영재는 실어증으로 인해 그의 유일한 방어수단을 잃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듣는 사람의 위치에 서게 된다. 일련의 소동들이 지나가고 환상 속에서 영재와 은하가 재회할 때, 영재가 여전히 악기 소리밖에 낼 수 없지만 그들은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를 대화한다. 비록 제대로 된 언어의 형태는 아니지만, 그의 진심은 은하에게 닿는다. 그리고 이 대화로 인해 영재의 실어증은 치유된다.

정리하자면 이 영화는 타인의 말을 듣지 않으며 자신의 말만 내뱉던 어린 소년이 어른이 되는 이야기를 담은 성장극이다. 청각장애를 가진 은성(이은성)과의 새로운 연애는 영재가 성장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이다. 비록 일상적인 음성 언어의 대화를 할 수 없지만 그들은 소통의 문제를 겪지 않는다. 영재가 다르게 말하는 법과 듣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화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그는 마침내 (자신의 말에 의하는) ‘인간’과 ‘소통’을 다루는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면서도 각자의 핸드폰 액정만 들여다보고, SNS로 서로 의미 없는 말들을 남발하면서 소통하는 스마트폰 시대에 질려 피처폰 시대의 영화와 대화를 다시 꺼내보았다. 대화하는 법을 다시 깨닫게 된 영재처럼 우리 모두도 언젠가 다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길 바란다.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