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살아남은 아이 신동석, 2017

by.이도훈(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2018-06-01조회 5,560
살아남은 아이

그대는 천벌받은 자를 사랑하는가? 
말하라, 용서받지 못할 것을 그대는 알고 있는가? 
-샤를 보들레르

자식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한 가족이 있다. 어느 작은 소도시에서 인테리어가게를 운영하면서 살아가는 성철과 미숙 부부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외아들 은찬을 잃는다. 은찬은 친구들과 물놀이를 하러 갔다가 물에 빠진 기현을 구하고는 의롭게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영화는 은찬이 겪은 사고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시간이 흘러 망자에 대한 상실의 아픔을 껴안고 살아가는 성철, 미숙, 그리고 기현의 일상을 관조적으로 그려나가면서 이야기의 포문을 연다.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 그 이후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은 이 영화 속 세계의 지반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영화는 죽음이라는 고통이 일으키는 파장을 쫓아가면서 그것에 대한 긴 주석을 남기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야기의 핵심적인 인물인 성철과 미숙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은찬을 잃은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미숙의 경우, 평소 은찬과 친하게 지냈던 한 아이에게 다가가 그의 모습에서 죽은 아들의 흔적을 찾는다.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에서 사랑하는 여인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자 그녀를 찾기 위해 거리를 배회하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과 겹친다. 미숙은 아들을 잃은 결핍을 아들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다른 아이를 통해서 극복해 보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슬픔은 잠식되지 못하고 도리어 그녀의 내면의 고통이 외부로 드러나는 결과를 낳는다. 

한편 성철은 은찬의 예기치 않은 죽음을 사회적으로 선한 죽음으로 기념하는 일에 동참한다. 그는 은찬을 의사자로 지정하는 소방청의 일에 묵묵히 협조한다. 게다가 그는 은찬에게 주어지는 보상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기부하기로 약속한다. 이는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만들기 위해 유가족인 아버지가 할 수 있는 마땅한 처신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죽은 자를 사회적으로 애도하는 이 일련의 과정은 죽음의 덧없음과 허망함을 극복하기 위한 또 다른 시도로 보인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망자의 지난 삶을 도덕적이고, 명예로우며, 영웅적인 것으로 기념하려는 이상주의적인 실천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녕 죽음의 고통은 명예와 같은 이상이나 금전적인 보상 등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살아남은 아이

영화는 성철의 선택과 관련하여 윤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공을 들이지 않으며, 성철 또한 자석에 끌린 것처럼 무의지적으로 그 일련의 과정에 동참한다. 감정이 보이지 않는 그의 차가운 얼굴과 활력이 휘발된 그의 몸짓들은 다소 기계적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무기력한 성철의 모습은 그가 아직 아들을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결국 성철과 미숙의 일상을 통해서 우리는 망자의 부재가 남긴 고통과 슬픔은 그 어떤 개인적 혹은 사회적 노력으로도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영화는 성철과 미숙이 아들을 잊기 위해 선택했던 행위들, 즉 그들의 희망이 현실과 충돌하는 순간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비극을 희망으로 극복해보려는 몸부림이 다시 현실에 부닥쳐 좌초되는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현실이라는 것은 죽은 자는 결코 되살려 낼 수 없다는 단순하고 자명한 사실에 기초한다. 그러한 현실 인식은 한 번 무너져 버린 삶은 원상태로 복구하기 힘들다는 것을 말해준다. 삶의 고통을 애써 무마하려는 우리의 모든 몸부림은 삶에 대한 고통, 회의, 비관을 덮어버리려는 무의식적인 충동이 의식적인 실천으로 옮겨간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의심은 기현의 등장을 통해 증폭된다. 기현은 이 영화 전체를 비관적인 색채로 물들이는 탁한 염료와 같은 인물이다. 성철은 우연히 기현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서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지르던 것을 본 이후에 그를 찾아간다. 아들이 죽어가면서 살린 아이, 그런 기현을 바라보는 성철의 내면이 어떠할지에 대해 영화는 직접 말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친구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기현의 심리도 섣불리 묘사하려 들지 않는다. 단계적으로 영화는 찰나의 희망과 그것을 짓밟아버리는 양심적 고백을 통해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순서대로 보자면 희망이 먼저 온다. 성철은 기현을 자신의 가게에 수습생으로 들인다. 이 과정에서 성철과 기현은 사장과 수습생 또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 관계는 형제애, 동료애, 가족애, 부성애와 같은 휴머니즘적인 코드를 품을 수 있을 정도로 깊어진다. 마찬가지로 미숙과 기현 또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마침내 성철, 미숙, 기현은 유사 가족을 형성한다. 이 세 사람이 모두 은찬이라는 인물의 부재로 괴로워했다는 점에서, 이들이 임시로 만들어낸 유사 가족은 희망과 고통이 교차해가면서 만들어낸 하나의 직물과 같다. 

이 영화의 전반부가 비극을 희망으로 상쇄시키는 것이라면 이 영화의 후반부는 그 희망에 철퇴를 놓는 것이다. 희망은 찰나적이고 비극은 지속적인 탓에 잠시나마 스쳐 지나가는 희망은 다시금 비극으로 추락한다. 비극이 지속되면서 누적된 힘들이 일시적으로 솟아나는 희망을 쉬이 제압할 수 있었던 탓이리라. 또한, 이 영화는 은찬의 사고가 일어나던 그 시간을 봉인해 놓은 다음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 따라서 과거를 서서히 드러내는 서사적 전략을 택했기 때문에 애초부터 희망이 자랄 수 있는 적합한 조건이 아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살아남은 아이

실제로 기현의 입을 통해 은찬에 관한 은폐된 진실이 밝혀지면서부터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이 벌어진다. 기현은 자신의 작은 주먹으로 스스로의 가슴을 내리치듯이 자책하고, 성철과 미숙은 그런 기현을 바라보면서 어찌해야 할지를 모른다. 기현의 양심 고백은 한때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을 거짓으로 만들고, 이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을 적으로 돌려 세운다. 그 결과 현실의 모든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지반은 완벽하게 붕괴된다. 지반에 금이 간 상태로 시작해 끝끝내 그것이 붕괴되는 세계. 그 폐허의 자리에는 세 개의 이야기가 안정적인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고 있다. 기현이 스스로에게 내리는 죄와 벌에 관한 이야기, 성철과 미숙이 자식을 잃은 아픔을 감내하지 못하고 고통의 수렁에 빠지는 이야기, 그리고 이웃과 조물주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서로를 지탱해주고 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죄와 벌, 상실의 아픔, 붕괴된 세계를 압축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이 죽었고 여러 사람이 살아남았다. 누군가는 망자의 부재에 따른 상실감에 고통스러워하고 다른 누군가는 망자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영화는 모든 사람이 고통 받는 세계 속에서 고통의 경중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또한, 그러한 지옥과 같은 곳에서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다는 태도를 보인다. 대신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후에도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를 보여주려고 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성철, 미숙, 기현이 필사적으로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면서 자신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즉 자신들이 여전히 현실을 감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 모습은 흡사 멸망해가는 세계 속에서도 삶의 의지는 남아 있다는 강력한 증거와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살아남은 자들이 다시금 살아남았다는 것을 웅변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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