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국경의 왕 임정환, 2017

by.김동현(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2018-04-20조회 7,842
국경의 왕

이 영화는 동유럽 낯선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공항에 도착해 생수를 단숨에 들이켜는 유진(김새벽)의 첫 쇼트는 호기심과 긴장이 교차하는 여행자의 시선으로 반짝인다. 캐리어를 끌고 가는 그녀의 몸짓에서 매혹적인 여행지의 마법을 기대한다. 하지만 영화는 이내 엉뚱한 사건과 상황이 중첩되며 관객을 혼란에 빠뜨린다. 같은 인물 비슷한 대사가 반복되고 시간과 공간이 모호하게 혼재된다. 이야기를 좇는 길목마다 퀴즈를 푸는 만만치 않은 모험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난 캐릭터, 거침없는 대화, 자유로운 연기, 예상치 못한 사건이 빚어내는 젊은 패기와 활력이 영화를 힘있게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폴란드에 도착한 유진은 한국 남성들을 우연히 만나고 고려인에게 행운의 꽃을 선물 받는다. 선배 동철(조현철)과 만난 바에서 인상 나쁜 한국인을 다시 만나자, 유진은 언짢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친구 원식(정혁기)을 만나러 우크라이나로 간 동철은 세르게이(박진수)가 벌이는 위험한 사업에 말려든다. 이 과정에서 원식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되고 동철은 원식과 함께 도망 중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맞는다. 여기까지가 ‘국경의 왕’ 챕터이다. 이어지는 ‘국경의 왕을 찾아서’ 챕터에 동일 인물이 다시 등장하지만 전혀 다른 설정이다.
 
국경의 왕

구성상 ‘국경의 왕’은 허구이고 ‘국경의 왕을 찾아서’는 실제이다. 거칠게 구분하면 ‘국경의 왕’은 동유럽에서 영화를 찍고자 하는 유진과 동철이 쓰고 있는 허구의 시나리오고, ‘국경의 왕을 찾아서’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를 여행하는 유진과 이곳에 거주하는 동철의 이야기이다. 은경(이유진)을 가운데 두고 만나는 이들은 영화와 미래에 대해 얘기하고 새로운 친구(정혁기, 박진수)를 사귀기도 한다. 후반의 챕터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유진과 동철의 실제 경험과 감정이 어떻게 각자의 시나리오에 반영되었는지 흥미롭게 발견할 수 있다. 우연히 여행지에서 만나 동행한 친구가 범죄 장르물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타인이 겪은 경험과 이야기가 시나리오에 천연덕스럽게 배치된다. 말 못하는 관계의 감정 또한 조심스레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 시나리오고 어디까지가 실제라는 주장은 그리 간단치 않다. 영화의 구분점이 무색하게 이야기가 파편적으로 전개되고, 영화를 지배하고 있는 인물의 장난스런 말과 행동은 앞뒤의 개연성에 의존하지 않고도 충분히 유머러스한 완결성을 가진다. 정교한 내러티브 서사를 포기한 순간 죽은 사람이 다시 일어났다 해도 농담이라 퉁치면 그만이다. 무엇보다 감독이 절친한 동료와 실제 여행하며 영화를 찍었다는 제작 배경은 영화 속 작은 퍼즐을 압도한다. 전작 <라오스>에 이은 이러한 방식의 영화 만들기는 진짜와 가짜, 허구와 실제에 대한 논의를 본질적으로 확장시킨다.

전작과 비교했을 때 이번 작품 <국경의 왕>은 더욱 복잡하고 미묘한 인간의 심상을 탐구하고 있다는 인상을 두드러지게 받게 된다. 영화 속엔 인기 아이템 포켓몬에 열중하며 손쉽게 일확천금을 꿈꾸는 유치한 세대의 표상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론 여행하며 영화와 인생을 고민하는 진지하고 고독한 개인이 존재한다. 마음, 소원, 믿음 등 이성적 세계와 동떨어진 종교적 언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따뜻하며 기이한 정서는 불현듯 등장하는 유령(임철)의 존재처럼 영화에 일정한 태도와 방향을 지시하고 있는 것 같다. 왁자하고 떠들썩한 인물 가운데 도시를 여행하는 유진의 걸음이 부지런하다. 카메라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회색의 풍경을 가로지르는 미지의 가능성과 불안을 묘하게 포착한다. 어디로 갈 것인가?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할 것인가? 마음에 평화는 찾을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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