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마의 계단 이만희, 1964

by.김성욱(영화평론가) 2017-02-17조회 3,618
마의 계단 스틸

이만희 감독의 <마의 계단>에서 ‘계단’에 대해 말하고 싶다. 제목 때문은 아니다. 이만희 영화의 전작을 살펴보고 싶은 생각에서 출발했지만, 그럼에도 다른 이유도 있다. 이 영화와 관련한 몇 편의 글을 읽으면서 이상한 일이지만 계단이 중요하게 논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단에 대해 말하는 것을 피한다는 인상도 들었다. 어떤 이는 동시대 김기영의 <하녀>에 비해 계단이 이야기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도 한다. 일단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계단이 이야기에 결정적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에 결정적이지 않아도 계단은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풍경과 장소가 그러하듯, 건축(물) 또한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중요하게 작동한다. <하녀>에서처럼 계단을 상징적으로 활용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는데,<하녀>의 계단이 상징적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반대로 나는 김기영의 영화에서 계단이 지극히 물질적이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마의 계단>에서 건물 안팎의 계단이 상승과 추락이라는 주제로 활용된다는 의견에 반대 입장을 갖는 것은 아니다. 계단이 주인공 현광호(김진규)의 계층 상승의 욕망을 대변하며, 결국 계단에서의 추락이 신분상승에의 열망이 실현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한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다만, 이런 주장이 계단을 이야기와 관련해서만 부각시킨다는 점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계단이 이야기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있다거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반적 체험에 대한 이야기로 끌어오자면, 영화를 보는 나의 경험이 그렇다. 이야기와 무관해 보이는 대상에의 끌림이야말로 영화체험의 기이한 매력이다. 따라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야기와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계단의 중요성이다. 

 <마의 계단>에는 확실히 계단이 있다. 카메라는 여러 차례 반복해서 계단을 보여준다. 영화의 첫 장면, 아직 주요 인물들이 등장하지 않은 크레딧 시퀀스에서 우리는 영화의 주요공간인 병원 내부와 외부의 계단을 보게 된다. 영화의 결정적 사건, 즉 세 번의 추락이라는 돌발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계단에서다. 계단은 영화에서 자명하게 존재한다. 이런 즉물성이야말로 <마의 계단>에서 계단이 지닌 일차적 힘이다. 계단이 거기에 있고 영화는 그것을 담아낸다. 물론, 이 영화가 철저하게 세트에서 촬영됐다는 점을 미리 말해야만 하겠다. 서정민 촬영감독에 따르면 이 영화의 주요 건축물들, 즉 병원과 저수지 등은 모두 한남동, 유엔 빌리지 근처의 공터에 만들어진 세트라고 한다. 원래 있던 로케이션이 아닌 경우라면(물론 로케이션을 흥미로운 이야기의 장소로 전환하는 것도 영화감독의 진정한 능력이다), 세트의 설계는 일차적으로는 이야기의 장소로서 만들어진다. 가령, 니콜라스 레이의 <실물보다 큰>에서라면 계단은 이야기의 결정적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이자 영화의 근본적 이야기, 즉 삶보다 더 큰 환상 혹은 망상이 (물리적으로) 깨어지는 것을 표현한다. 1950년대 아메리칸 드림이 악몽이 되어가는 약물과 쇼크의 시대에 니콜라스 레이와 사무엘 풀러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 스며든 악몽, 잠복했던 불안감의 분출을 표현했는데, 거기서 발견되는 것은 계단과 (충격의)복도이다. 나는 <마의 계단>의 건축적 공간으로서의 계단이 니콜라스 레이(나 사무엘 풀러)의 영화와 다소 유사하게 영화의 불안정성에 기능한다고 생각한다(이만희 영화의 60년대성에 대한 한국적 상황은 여기서는 거론하지 않을 생각이다). 계층 상승의 욕구와 좌절이라는 주제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차라리 이 영화의 물리적 측면, 즉 건축물이 원래 갖고 있어야 할 견고함, 안정성, 정주성, 영구성 등과 비교할 때 <마의 계단>의 건축물과 계단은 불안정성, 잠정성, 허구성의 특성을 갖고 있다. 나는 이러한 계단의 불안정성이 그 자체 이만희 영화의 특징이라고도 생각한다. 

병원의 계단, 정확하게 말하자면 계단 중간의 난간이 원래부터 부실한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설명이 없다. 어찌된 일인지 계단의 난간은 처음부터 부실해서, 세 번이나 인물들이 추락하는 돌발사건을 불러온다. 주의를 요하는 법도 없이, 계단은 원래부터 망가져 있었다. 가령,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간호사 남진숙(문정숙)이 현광호와 헤어져 늦은 밤 병원에 홀로 돌아와 복도를 걸어 다닐 때(그녀는 처음에는 계단을 오르려 했었다), 화면의 배경으로 보이는 계단에는 외관상 별 이상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병원장의 딸 광자(방성자)가 병원을 찾았을 때 계단 난간은 이미 파손되어 수리공이 수리를 하고 있다. 카메라는 그녀가 계단을 오른 후에도 부감 쇼트로 파손된 난간을 수리하는 장면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다시 말하자면 계단은 처음부터 이유 없이 부실하다. 이를 이야기의 결함이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로서는 반대로 이런 부실함이 이야기를 파열시키는 구멍이라 생각한다. 

계단의 불안정성에 대해서는 그러므로 다른 지점에서 살펴봐야만 한다. 이야기와는 별개로 표상적 측면에서 보자면, 수직적 구조를 갖는 건축물과 계단은 일단 가로로 긴 시네마스코프 화면과 충돌해, 불안정한 구도를 보인다. 수평과 수직의 충돌. 사실 이 영화의 건축적 구도와 관련해서는 히치콕의 <사이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사이코>의 건축물은 수평으로 긴 베이츠 모텔과 고딕풍의 수직적 구도의 어머니 저택으로 구조화되었는데, <마의 계단>에서 주요한 두 공간 또한 수직과 수평의 구도로 표현되어 있다. 수평의 긴 시체보관소와 수직의 병원, 혹은 계단이 그러하다. 여기서 더 자세한 논의를 하지는 않겠지만, 이 영화의 주요한 세 가지 공간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하고 싶다. 가령, 병원의 계단, 시체보관소, 그리고 물웅덩이가 그러하다. 이 세 공간은 영화에서 한 번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면서도 가장 중요하게 사건과 관련된 장소이다. 여인은 계단을 오르다 추락하고, 물웅덩이에 처박혀 죽었다가, 시체와 뒤바뀌어 다시 살아난다. 이 설명되기 힘든 이상한 일은 세 공간을 오가면서 벌어지는데, 영화는 이에 대해 어떠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장소들이 모두 이야기의 블랙홀처럼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의 첫 장면은 그런 점에서 인상적이다. 우리는 시체를 운반하는 의료인들의 행렬을 보게 된다. 누구의 시체인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행렬의 움직임에 따라서 카메라가 건물과 장소의 세부들을 부각시키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카메라는 복도를 걸어가는 사람들을 그리고 건너편의 병원 시체보관소를 이어서 보여준다. 여기서 시체보관소는 한 번도 내부가 보이는 법은 없지만, 결국은 가장 미스터리한 장소로 남는다. 시선을 그 쪽으로 옮기는 인물의 운동이 몇 번이나 반복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가령, 남진숙이 늦은 밤 병원으로 왔을 때 그녀는 계단을 오르려다 잠깐 멈추어 현광호의 사무실 문을 열려고 하는데, 이때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병원 문이 열린 쪽으로 걸어간다. 그녀는 바깥으로 나와 병원의 외부 계단을 쳐다보고, 이어 건너편의 시체보관소를 눈길을 돌린다. 나중에 우리는 현광호가 그 비슷한 운동을 반복하는 것을 보게 된다. 바람이 불어와 병원문이 열리는 순간, 곧바로 이 바람은 시체보관소로 인물과 우리의 시선을 향하게 한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시체보관소에 보관되었던 시체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의 계단>에는 그러므로 이야기의 서스펜스보다 먼저 건축물의 서스펜스가 있다고 봐야 한다. 계단, 혹은 시체보관소의 비밀이 있다. 그렇다고 이 비밀이 이야기에 적절하게 기능한다고는 볼 수 없다. 도리어 이야기로 해명되지 않고, 이야기를 미끄러지게 하고, 작동불능의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잔여가 있다. 그리하여, <마의 계단>에서 계단(혹은 시체보관소)는 이 영화의 이야기를 위한 세트 안에 있는 또 다른 세트, 다른 식으로 작동하는 무언가를 일깨운다. 영화 바깥이 작동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실제로 이 영화에서 계단 수리공은 도무지 영화내적 존재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혹은 이야기의 시간성을 미끄러지게 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다른 시간성을 작동시킨다. 계단에서의 추락이 반복될수록 사태는 점점 현실에서 비현실로 확장되고, 심화되어 간다. 이는 또한 현재의 시간에 파묻혔던 과거의 시간을 분출하도록 한다. 계단은 그러므로 인물을 추락시키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탈구시키고 시간을 함몰시키는, 특별한 장소이다. 이는 영화의 결함이 아니라, 도리어 이야기와 의미에서 벗어나는 방식이다. <마의 계단>에서 계단이 갖는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계단에서의 추락은 그러므로 상징도 은유도 아닌, 영화의 이야기 자체를 중단시키는 돌발사건이다. 오즈의 영화에서, 미조구치의 영화에서, 나루세의 영화에서, 김기영의 영화에서, 그리고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에서 그들 각자의 돌발사건을 보여주는 장소로서, 계단이 거기에 있다. 계단은 모든 것을 미끄러지게 만드는 장소이다. 인물들은 단지 이곳에서 추락하는 것만이 아니라, 비어 있는 어떤 지대로 향한다. 그러므로 나는 <마의 계단>에서 이만희가 이뤄낸 성취가 서스펜스 장르의 모방이나 시도라는 통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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