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4월의 영화 이장호, 1987

by.권은선(영화평론가) 2021-04-02조회 4,191

이장호는 70년대 '영상시대' 활동과 더불어 ‘청년영화의 기수’였으며 ‘최초의 스타감독’이라고 불린 시대적 문화 아이콘이었다. 특히 80년대는 이장호의 전성시대였다. ‘80년의 봄’, 4년여의 공백을 깨고 발표한 <바람 불어 좋은 날>은 당시 청년 영화인들의 교과서였다. 당대 발표된 ‘80년대 한국영화 베스트 10’에는 그의 영화가 4편이나 선정되었다. <바람 불어 좋은 날>,<바보선언>,<과부춤>과 더불어 그 목록에 포함된 영화가 바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이다. 85년도 '이상 문학상'을 수상한 이제하의 단편 소설을 영화로 옮겼다. 85년 영화제작 자율화 시행 이후 그가 설립한 판영화에서 제작하였는데, 87년 어렵게 허리우드 극장에서 개봉을 했으나 관람 숫자는 미미했다. 당대의 지배적인 한국영화 관람 체험 속에서 이 영화는 낯설었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영화는 편안한 관람 행위를 허하지 않는다. 수려하지만 그 수려함을 세피아톤으로 톤 다운시켜 놓은 강원도 산길을 익스트림 롱 쇼트의 롱테이크로 찍은 화표면은 마치 정지된 스틸의 그것 같다. 화면 왼쪽으로 원경에서부터 쭉 뻗은 길로 남자와 여자가, 그리고 한 무리의 아이들이 천천히 다가온다. 그러나 화면 앞 가장 가까운 거리에 도달할 때 까지도 그들은 식별되지 않는다. 아울러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다른 내재적 사운드가 소거된 상태에서 마치 보이스오버처럼 원근감 없이 들려오는 남자와 여자의 대화 소리는, 현재 그들이 나누는 대화인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이미지와 비동조화된 사운드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인과법칙에 기초하지 않은 서사의 진행, 행위에 대한 동기와 설명의 희박함, 현실과 환각의 경계를 지우는 쇼트의 배열, 극적 흐름과 맥락을 단절시키는 몽타주 시퀀스들은 시공간적 통일성과 연속성의 감각을 흩뜨리면서, 샤머니즘적인 운명론적 세계관의 묘사와 맞물려, 종국에는 불가해한 재현의 지점에 다다른다. 영화는 크게 황토 빛 모노크롬과 푸른 빛 모노크롬으로 처리된 두 개의 의미 계열체로 구성되어 있다. 몇 개의 시간적 재배치가 있으며 간헐적으로 현실과 환각의 경계를 허무는 주관적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황토 빛 모노크롬의 세계는 대체로 3박 4일의 여정을 연대기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적 현재를 재현한다. 반면 그 황토 빛 시공간을 절단하고 틈입하는 푸른 빛 모노크롬의 의미 계열체는 인물들의 회상, 주관적 플래시백, 의식의 흐름, 운명적 암시 같은 현재 시제를 벗어나, 충돌하며 운동하는 이미지들의 배열이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두손을 잡고 걸어가는 이보희와 김명곤

이장호는 <바보선언>에서 실험했던 즉흥적이고 연상적인 연출법을 재도입하는데, <나그네>에서 그러한 연출 방식은 명확한 좌표 없이 강원도를 떠돌며 예기치 못한 사건들에 직면하는 인물들을 그리는 데에는 더없이 잘 맞아 보인다. 개성이 고향인 사내와 전쟁 통에 고향이 어딘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아내, 휴전선 부근 월산이 고향인 노(老) 회장 모두 전쟁으로 인하여 이산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속초, 원통, 강릉, 경포, 인제에 이르는 영화적 공간에서도 원통, 속초 등은 분단과 그 결과인 휴전선 아래 마을들이다. 영화는 이러한 공간의 지정학적 의미를 예민하게 포착한다. 예컨대 여행 첫날 사내가 아내의 유골을 바닷가에 뿌리려다 군인에게 제지를 당하고 결국 철수하는 것이라든가, 강릉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쓰며 회를 파는 전주식당의 사장이 "전쟁 통에 나같이 된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냐"고 반문하는 것 등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몇몇 장면은 자유연상과 자동기법으로 이러한 역사적인 지정학적 트라우마 의미를 기입한다. 백사장에 놓은 가방 속 아내의 유골을 바라보던 시선이 “고향이 원산은 아니라예”라는 아내의 목소리 사운드와 연결되면, 강릉 앞바다 위로 포화와 피난 행렬을 담은 한국전쟁 당시의 뉴스릴이 오버랩 된다. 그리고 영화의 중반부, 시선의 주체를 알 수 없는 일련의 국도 이미지의 몽타주 시퀀스 끝에, 우리는 국방 한계선과 상판이 없이 끊어진 다리와 마주하게 된다. 그러한 시도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담대하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누워있는 이보희 앞에서 생각하는 김명곤

영화 전체에 걸쳐 산포되어 있는 분단의 트라우마가 영화적 주요 배음을 이루고 있다면, 후반부로 갈수록 샤머니즘적 운명이라는 또 다른 배음이 날 선듯한 감각으로 강화된다. 사내의 주체의 중심 없음 혹은 부유(浮遊)함은 실향(失鄕)과 상처(喪妻)의 중층 결정의 결과물이다. 실향의 감각은 아내의 죽음과 이중 노출되어 있으며, 그와 연합된 상실감과 죄책감은 노정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성매매 여성과 ‘색시’, 그리고 ‘미세스 최’에게 투사된다. (아내, ‘색시’, ‘미세스 최’는 모두 이보희가 연기한다) 서사가 진행될수록 영화는 최가 몇 해 전 받았던 점괘, 즉 “나이 서른에 물가에서 관을 세 개 짊어진 남자를 반드시 만날 것, 그가 전생의 남편”이라는 운명론적 예언을 향해 가는데, 기실 색시와 최는 모두 아내의 더블들이다. 그와 간밤에 관계를 가졌던 ‘색시’의 죽음은 아내의 죽음에 대한 환시(幻視)로 대체된다. 최가 고향을 언급하며 “아우라지강을 아세요”라고 언젠가 죽은 아내가 했던 말을 똑같이 사내에게 건넬 때, 최는 정확히 아내의 도플갱어로 확증된다. 

‘미세스 최’란 인물은 철저히 대리보충적인데, 그녀는 지난 2년간 중풍환자 회장의 ‘인간 핫 팩’으로서 그가 결여한 혹은 상실한 온기, 활력, 고향의 따스함을 대리보충 해왔다. 그 역할은 사장 아들이 특파한 상무에게 끌려가면서 회장이 손에서 놓아 버린 낡은 사진과 기능적으로 같다. 또한 그녀는 남자에게는 죽은 아내의 대리보충이며, 마지막에는 오구굿 중 신내림을 받음으로써 영혼에게 몸을 주는, 사령(死靈)들의 대리보충 역할이 된다. 결국 남자의 주체성의 위기는 복구되지 않으며 파국을 맞는데, 그것은 죽은 아내의 대리보충으로써는 온전한 애도작업을 완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완수되지 못하는 개인적인 동시에 집단적인 애도작업은 신내림의 형태로 최에게로 전이되며, 민족적 해원의 무게는 그녀의 무속 연행에 맡겨진다.

이장호의 80년대 작품 연보에는 사회적 참여의식이 강한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들과 대중추수적인 흥행 영화들, 그리고 작가의식이 녹아든 영화들이 교차했다. ‘황토빛 모노크롬 영화 한편 찍고 싶다’는 로망을 실현하고자 이장호가 직접 제작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처음부터 지방흥행업자들의 투자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그 결과 그의 작품연보에서 그리고 한국영화사에서 아주 낯설고 특별한 순간을 만들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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