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악마와 미녀: 8월의 영화 Ⅰ 이용민, 1969

by.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2020-07-31조회 7,307
악마와 미녀 스틸
이용민 감독은 한국영화계에서는 불모지에 가까웠던 공포영화 장르를 개척한 선각자이다. 공포의 양식화라는 측면에서 그는 이탈리아의 지알로 호러를 대표하는 마리오 바바나 일본 괴담영화의 거두인 나카가와 노부오와 유사한 부류로 범주화할 수 있다. 공포와 스릴러, 판타지를 혼융한 <악마와 미녀>(1969)는 공포영화 감독으로서 이용민의 개성과 스타일에 대한 유용한 개요를 제공한다. 이용민 감독은 여기서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 모티프를 병합한 설정을 중심축으로 삼아 한국적인 원귀 서사, 사무라이 활극, 폐쇄적인 실내극 양식, 표현주의 스타일을 다층적으로 쌓아올린다. 특히 프랑켄슈타인 서사는 이용민의 후기작 <공포의 이중인간>(1975) 등에서 반복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귀기서린 괴 저택을 무대로 한 괴담이라는 일부 설정은 나카가와 노부오의 <망령의 괴묘저택>(1958)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몇 개의 촬영 세트에서 진행되는 조잡한 프로덕션 디자인에서는 저예산 속성 제작의 흔적이 여실하지만 이런 흠결은 장르의 특장을 손상시키지 않으며 도리어 기이한 스토리를 증폭하는데 도움이 된다.
 

영화의 무대는 으슥한 숲속 한 가운데에 위치한 서양식 병원이다.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병원의 수장인 곤도(이예춘)는 유리관에 누워있는 아내(도금봉)를 위해 매일 생피를 주입한다. 곤도의 계획은 뇌수이식에 성공하여 빈사 상태의 아내를 구제하고 인간의 영생을 이루는 것. 신선한 피를 얻기 위해 곤도는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어느 날 미스터리한 가족사를 품은 간호사 옥경(오은이)이 조수로 들어오면서 곤도의 계획은 조금씩 틀어진다. 옥경의 수상한 활동을 기점으로 거악(巨惡)의 씨앗이 발아하게 된 경위가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면서 미친 과학자의 스토리는 번개처럼 앞으로 나아간다. 이야기의 절반이 곤도의 음모와 옥경의 복수에 전념하는 동안, 나머지 절반은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사를 기술하고, 곤도의 한국인 조수 원석(김석훈)과 옥경의 로맨스도 양념으로 첨가된다. 팜므 파탈의 이미지로 등장한 옥경이 점차 동정적인 캐릭터로 변모함에 따라 초자연적 복수 미스터리의 균형이 조정되면서 곤도와 옥경의 대립관계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킨다.
 

<악마와 미녀>의 각본은 허흥이라는 작가가 썼다. 허흥은 유일하게 이 영화의 각본가로만 기록되어 있는데 감독 자신의 가명일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악마와 미녀>의 스토리는 갈짓 자를 그린다. 허무맹랑한 신념에 강박된 의학박사의 맹목을 따라가다가 그의 악마성이 폭로되는 과거 장면들 이후에는 복수의 스토리로, 옥경과 원석의 대립과 공모로 국면이 전환되자 멜로드라마의 정동이 느닷없이 폭발한다. 현실과 단절된 장소에서 벌어지는 순수한 허구이지만 스토리 안에 있는 우매한 믿음과 광기, 냉담한 복수와 같은 요소는 우리들의 실제 생활에도 있다. 음모나 배신의 트라우마로 복수를 다짐하는 원한에 찬 여성의 스토리는 한국 고전 공포영화의 공식이다. <악마와 미녀>도 이 공식을 따르지만 원녀(怨女)의 존재가 인간과 유령의 경계에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반면에 인류의 삶을 뒤바꿀 의학기술의 신기원에 도달하겠다는 망집에 빠진 의학박사는 서양 공포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상투형이다. 영화의 주요한 소재로 채택된 수혈과 흡혈은 역시 드라큘라 전설에서 파생된 설정이다. 생명 연장을 위해 타인의 생피를 주입한다는 설정은 생명의 기원으로서 피의 의미를 강조한다. 피의 순환이라는 관점에서 곤도의 야심은 옥경으로 전이되는데,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온 옥경이 우연히 피맛을 알게 되어 흡혈에 집착하는 모습이 이에 해당한다. 피에 굶주린 살인광 박사를 전형적인 공포와 구별하는 독특함은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지는 서사에 새겨진 무국적성일 것이다. 이처럼 <악마와 미녀>에는 상이한 뿌리를 갖는 이야기의 요소들과 사물들, 영화 기술, 정서들을 두서없이 교배한 흔적들이 넘친다. 고립된 서양식 병원과 일본식 장검을 휘두르는 곤도의 표상, 액션 활극에나 어울릴법한 옥경의 초인적인 퍼포먼스, 곤도의 어수룩한 일본인 조수의 생뚱맞은 사랑 고백 등 예측할 수 없는 요소들의 결합이 태연자약하게 이루어진다.
 

두 대의 카메라를 사용한 전통적 방식의 3D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둥둥 떠다니는 원귀들의 얼굴, 무덤을 뚫고 나오는 손, 카메라를 향해 날아드는 몽둥이와 램프 등 입체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의도적인 연출도 눈에 띈다. 영화의 색조는 시종일관 어둡고 여러 면에서 특이하게 보일 뿐 아니라 과장된 연극적 연기로 일관하는 배우들의 뻣뻣한 말투는 비현실적이어서 더욱 이목을 끈다. 촬영감독으로 영화 이력을 시작한 감독답게 이용민의 장면 연출은 카메라의 활용을 중심에 둔다. 옥경이 수행하는 역동적인 액션 신을 제외하면 대다수 장면을 실내 세트에서 촬영하여 속성 제작의 효율성도 성취한다. 곤도의 정신을 어지럽히는 원귀들의 환영은 조잡한 특수효과로 제시되어 B급 공포영화의 무드를 조성하고, 시각적으로 로우 키 조명으로 방과 복도 세트를 채우면서 공포영화의 표현 스타일을 확실히 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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