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괴시: 3월의 영화 Ⅱ 강범구, 1980

by.주성철(영화평론가) 2020-03-16조회 8,077
괴시 스틸

“죽은 지 3일이 지난 용돌이가 되살아났다.” 저작권 개념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던 시절의 <괴시>(강범구, 1980)는 사실상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합작영화인 <Let Sleeping Corpses Lie>의 표절작이라고는 하나, 여러 한국적 상황과 변주가 더해진 명실상부 ‘한국 최초의 좀비 영화’로 기록돼 있다. 주인공이 백담사로 향하는 강원도 계곡에서 마주친, 초점 없는 얼굴로 느릿느릿 다가온 정체불명의 괴한에 대해 얘기하자, 마을 사람 누군가는 며칠 전 술 마시고 물에 빠져 죽은 용돌이에 대해 얘기하며 “용돌이가 살아 돌아왔나?” 라고 얘기할 뿐이다. 용돌이가 죽은 것은 경찰과 동행한 마을 사진관 주인이 직접 찍었으니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게 한국영화계에 처음으로 좀비가 등장했다. 어쩌면 지금 관객들은 물 맑고 공기 좋은 대자연에서 마주친 좀비라는 점에서 <곡성>(나홍진, 2016)에서 외지인(구니무라 준)의 등장과도 같은 충격적인 이미지를 떠올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쨌건 제작 당시로 보자면, 누군가는 홍콩영화의 좀비 ‘강시’도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공교롭게도 이후 수많은 아류작들을 양산했던 홍콩 강시 영화의 원조 <귀타귀>와 <괴시>는 1981년 4월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함께 개봉했다. 
 

<괴시>의 가장 독특한 점은 도시가 아닌 강원도 산골을 배경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대만에서 온 강명은 강원도 백담사로 가던 길에 수지의 차를 얻어 타고 가게 된다. 미국에서 살던 수지는 5년 만에 한국을 찾아 언니를 만나기 위해 수리마을에 있는 별장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언니는 건강 문제로 요양차 남편과 함께 강원도에 머물던 중이었다. 그런데 차가 낯선 곳에 이르러, 강명이 길을 살펴보려고 떠난 사이 수지는 계곡에서 첫 번째 좀비와 마주친다. 이후 그의 정체가 마을 사람들의 얘기와 경찰의 수사를 통해 3일 전 죽은 용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는 수지의 얘기를 그 누구도 믿지 않는다. 결국 강명과 수지는 공동묘지 안치실에 찾아갔다가 용돌의 시체가 없음은 물론, 그 안에서 부활한 시체들에게 공격당한다. 그런 사이 강명과 수지의 뒤를 쫓던 형사와 집을 나간 수지의 형부도 좀비로 변하고 만다. 그렇게 마을 전체가 ‘괴시’로 인해 공포에 떨게 된다. 


영화는 무엇보다 좀비나 강시에 비해 괴시(怪屍)라는 제목 자체가 기괴하고도 독특한 아우라를 풍긴다. 거기에 더해 좀비물은 영화사적으로 완전한 영화적 피조물이라 할 수 있는 좀비라는 존재에 어떤 흥미로운 상상력을 불어넣었느냐가 중요하다. 말하자면 좀비가 사람을 흡혈귀처럼 물어서 전염시킨다는 기본적인 상식(?)에 지속적인 변주가 더해지며 그 장르성이 확장되어왔다. 가령, 과거 좀비 영화의 좀비는 느리고 최근 좀비 영화의 좀비는 빠르다는 것이 가장 즉각적으로 인식하는 변화일 텐데, <웜바디스>(2012)에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눈 뜬 좀비가 등장했고, <부산행>(연상호, 2016)에는 빛에 반응하는 좀비를 등장시켜서 터널에 머무는 시간을 긴장감의 요소로 훌륭하게 활용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괴시>는 단순히 ‘느리게 걸어 다니는 옛날 좀비’라고 치부하기에는, 좀비 장르의 상업 블록버스터화를 이끌었던 <월드워Z>(2013), 한국계 배우 스티븐 연의 존재를 알리며 무려 10시즌까지 이어지고 있는 AMC TV 시리즈 <워킹 데드>와 비교해도, 영화역사상 아마도 가장 내구성이 강한 괴력의 좀비를 등장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좀비 영화에서 ‘가장 확실한 제거 방법’으로서 좀비의 머리통을 권총으로 날려버리는 일이 <괴시>에는 불가능한 것은 물론, 좀비로 변한 수지의 형부 역시 차로 치어도 끄떡없이 일어나고 만다. 어쩌면 지금의 관객들, 혹은 좀비 영화의 팬들이 매력을 느낄만한 지점이 바로 거기 있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사진관에 걸려 있는 배우 율 브리너의 사진이 잊혀지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마이클 크라이튼의 <이색지대>(1973)에서 율 브리너는 마치 좀비처럼 주인공을 끝까지 쫓아다니는 인조인간으로 등장했었고, 첨단과학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영화 속 휴양지 ‘웨스트월드’는 마치 사람들 모두 비밀을 쉬쉬하는 수리마을을 떠올리게도 한다. 억지 비유일 수도 있겠으나, <괴시>의 용돌이 역시 <이색지대>의 인조인간 율 브리너처럼 포기를 모르는 좀비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시체를 다시 깨어나게 만든 것은 과학 실험 때문이다. 해충을 퇴치하는 초음파를 연구 중인 실험실에서 발생시킨 초음파가 시체의 신경을 건드려 부활시킨 것이다. 게다가 그 이전부터 수리마을에는 기형아가 발생한다는 보고도 있었지만, 과학자들은 이를 묵살해왔다. 좀비 창궐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된 주인공이 실험실을 찾아가 “사람 잡는 기계를 당장 꺼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그를 그저 미친 사람취급하며 외치는 “우리는 과학자에요!”라는 말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보통 좀비 영화에는 그 발생 원인에 대해 탐색하는 경우는 드문데, 신종 바이러스 문제와 결합하여 백신까지 만들어낸 <월드워Z>처럼 <괴시> 역시 원작의 설정처럼 환경파괴 문제로 나아간다. <괴시>의 초음파 실험실에 미국인 과학자가 있다는 점에서,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 도입부에서 유독성 화학물질을 아무런 죄책감없이 한강에 흘려보냈던 미국인 장교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괴시>의 초음파 실험은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선의로 시작한 실험이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괴시>의 강범구 감독은 범죄 액션영화 <북극성>(1962)으로 데뷔한 뒤 황해, 김지미, 박노식 주연 <검은 꽃잎이 질 때>(1963), 인기 가수 남진 주연 <울려고 내가 왔나>(1967), 남궁원 주연 <국제 암살단>(1971) 등 반공과 첩보 소재가 가미된 액션영화들을 주로 만들며 흥행 감독으로 인정받아왔다. 연출 경력의 후반기에는 <일대영웅>(1973), <풍운의 권객>(1974), <사망탑>(1980), <몽녀한>(1983) 등 대만이나 홍콩과의 합작영화들을 여러 편 만들며 실험성이 돋보이는 액션과 공포영화에 더욱 치중했다. <괴시>의 경우 원작이 된 해외 영화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오는 등 한국 장르영화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뚜렷한 자기만의 세계를 일군 감독은 아니지만, <괴시>를 비롯해 크리처 무비 <몽녀한> 등 그가 아니면 만들어지지 못했을 영화들로 한국 장르영화의 외연을 의미있게 넓힌 감독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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