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고교얄개: 3월의 영화 Ⅰ 석래명, 1976

by.김형석(영화저널리스트, 전 스크린 편집장) 2020-03-02조회 5,564
고교얄개 스틸
1970년대 한국영화가 청년 문화와 만나면서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을 낳았다면, 그 반대편엔 당대의 하이틴 문화를 담은 <고교얄개>(석래명, 1976)가 있었다. 전자가 유신 시대와의 불협화음이었다면, 후자는 순응적인 화음에 가까웠다. 반공 영화, 새마을 영화 등 ‘국책 영화’가 창궐했던 1970년대, 이른바 ‘얄개 영화’는 십대 청소년들이 주인공인 명랑 드라마로 사랑 받으면서 한편으론 ‘어른’들의 가치관을 별 저항 없이 수용했다. 

여기엔 ‘우수 영화 제도’라는 미끼도 있었다. 좋은 영화로 선정되면 제작사에게 외화를 수입할 수 있는 쿼터 하나가 주어졌던 것. 이후 심사 대상에서 하이틴 무비가 제외되자 이 장르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1975년 <여고 졸업반>에서 시작해 1978년 옴니버스 영화 <우리들의 고교시대>까지, 고등학생들의 로맨스와 일상을 다루었던 그 영화들은 4년 남짓한 기간 동안 쏟아지다 갑자기 사라졌던 시한부 트렌드였던 셈이다. 그 중심은 임예진-이덕화 커플의 '진짜진짜' 시리즈와, 이승현-김정훈 콤비의 '얄개' 시리즈였는데, 전자가 순애보라면 후자는 코미디에 가까웠고, 특히 <고교얄개>는 1970년대 하이틴 영화의 간판 스타 같은 영화였다.
 

귀여운 반항아들의 요절복통 스토리처럼 보이지만, 유신 시대라는 시대 배경을 감안할 때 <고교얄개>는 의외로 복잡한 텍스트다. 이 영화는 1970년대 국가 이데올로기를 충실하게 담아내면서, 한편으론 그 시절 억눌린 청소년들을 위한 작은 해방구 역할을 했다. 체제 선전과 대리 만족을 동시에 수행하는 기묘한 프로파간다 영화였던 셈이며, 그 어떤 국책 영화보다 순수하게 메시지를 전달했던 작품이기도 했다.

첫 신은 예배 장면이다. 주인공 두수(이승현)는 미션 스쿨에 다니는데, 이때 강당을 가득 채운 까까머리 교복 차림 남학생들의 모습은 그 시대의 집단주의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두수는 돌발적 행동을 하는 개인이다. 낙제 때문에 유급을 한 두수는 입시나 교칙 같은 제도를 거부한다. 그저 학교 생활이 지루하기에 매일처럼 장난을 일삼고, 우연히 알게 된 여학생 인숙(강주희)과의 로맨스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는 두수는 어쩌면 지극히 정상적인 보통 십대이다. 하지만 유신 시대의 세계관에서 두수는 자기 절제를 하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꿈도 없는 '잘못된' 청소년이다. 
 

그러기에 '교화(敎化)의 서사'가 시작된다. <고교얄개>의 이야기를 추동시키는 원동력은 두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주변 인물들의 노력이다. 교장 선생님을 비롯해 부모와 국어 교사인 백상도(하명중)와 그의 하숙집 딸인 인숙 그리고 같은 반 친구인 호철(김정훈)까지 이 과정에 동원된다. 특히 호철과의 관계는 핵심이다. 두수의 장난으로 안경이 깨진 호철은 다리를 다쳐 학교를 나오지 못한다. 어떤 죄책감을 느낀 두수는 호철의 집을 찾아간다. 이층 양옥에 사는 부잣집 아들 두수와 달리, 가난한 달동네에서 살고 있는 호철. 이때 호철이 두수에게 하는 말은, 영화의 테마를 지나칠 정도의 직설법으로 전한다.

“두수야, 저길 좀 봐. 저 장관을 이룬 즐비한 고층 건물들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었겠니. 모두가 피와 땀이 이뤄놓은 기적이야. 난 비탈진 언덕 길을 오르내리면서도 한 번도 힘들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어. 발길은 가볍고 마음은 늘 무럭무럭 자라지. 난 열심히 공부해야지, 어서 자라야지, 그리고 저 많은 빌딩 속에 뛰어들어 주인공이 되어야지. 난 늘 이렇게 결심한단다. 가난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다만 불편할 따름이지. 얄개야, 우리에겐 밝고 희망찬 내일이 있어. 그 풍요한 내일의 세계를 이룩하려면, 학생 시절에 열심히 공부하는 거야.” 이 시기 청소년들을 길들이기 위한 산업화 이데올로기의 성공 신화와 성장주의적 가치 체계를 내화한 호철은, 성인이 되기 전에 '아버지의 법'을 체득한 소년이다. 여기서 <고교얄개>는 호철을 두수가 따라야 할 인간형으로 설정한다. 두수는 호철처럼 새벽에 우유 배달을 하고, 호철처럼 수업 시간에 열심히 공부하며 '호철화'된다. 이 영화는 이러한 방식으로 두수를 '유신 청소년'으로 교화하며, 그 대가로 '인숙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이성애적 로맨스의 성공을 선사한다. 두수는 그렇게 어른이 되는 것이다.


 
물론 <고교얄개>는 밝은 구석이 많은 영화다. 두수가 만들어내는 악의 없는 유머의 에피소드들은 관객을 미소 짓게 하며,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데이트”(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데이트) 같은 대사는 당시 유행어가 될 정도로 재치 있는 언어 유희였다. 남녀 학생들의 하이킹이나 운동회의 차전놀이는 해방감을 준다. 하지만 이러한 장면들을 즐기다가도, 학교 건물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표어(“오늘의 안보 없이 내일의 번영 없다”)나 “북괴의 야욕에 맞서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선생님 말씀이나 '근대화 연쇄점'이라는 동네 구멍가게 간판을 맞닥트리게 되면, 군대식 사회였던 '1970년대'를 환기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고교얄개>는 분열증적이면서도 순응을 요구하는, 당대의 시대 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는 작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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