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박서방 : 9월의 영화 I 강대진, 1960

by.우혜경(영화평론가) 2019-09-02조회 8,760
박서방 스틸

강대진 감독의 세 번째 영화 <박서방>(1960)은 '1960년대 & 한국영화'라는 범주에 가장 안정적으로 놓인 작품처럼 보인다. 한국전쟁 후 상처입고 무기력 해져버린 아버지, 전근대와 근대의 충돌, 그리고 이와 정확하게 맞물려 있는 세대 간의 갈등과 아버지-어머니, 그리고 아들-딸로 변주되는 젠더 문제까지, 어느 하나 빠지는 부분이 없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적, 사회적 맥락이 <박서방>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면 다른 한 축에는 '가족 & 멜로 & 드라마' 라는 서사적 맥락이 가로지른다. 흥미로운 것은 라디오 드라마를 원작으로 하는 만큼 이렇게 다양한 결들을 하나로 응집해내기보다는 각각의 에피소드들을 쌓아가는 방식으로 영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동네 잡일을 도맡아 하는 박서방(김승호)에겐 번듯한 제약회사에 다니는 아들 용범(박진규)이 가장 큰 자랑거리이다. 용범은 같은 회사에 다니는 여자친구와 결혼해 태국 지사에서 근무하며 경력을 쌓고 싶지만 그런 아버지를 남겨두고 떠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한편, 큰 딸 용순(조미령)은 동네 '건달' 재천(황해)과 사랑에 빠졌다. 불량한 친구들과 몰려다녔지만 재천은 이제 마음을 잡고 트럭운전수로 성실히 일하며 용순과 결혼을 결심한다. 또 다른 이야기를 이끄는 건 둘째 딸 명순(엄앵란)이다. 회사에서 타이피스트로 일하며 직장 동료 주식(방수일)과 연애 중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살고 있던 주식의 고모가 명순을 '보잘 것 없는 여자' 라며 둘의 교제를 극구 반대한다. 
 

사실 상 영화는 박서방의 삼남매를 둘러싼 각각의 사연들로 구성돼 있지만, 이들은 별개의 에피소드라고 해도 될 만큼 거의 접점을 가지지 않는다. 명순이 남자친구를 오빠인 용범에게 소개시켜 주거나, 재천과의 교제에 펄펄 뛰는 아버지를 용순을 대신에 용범이 말려주는 장면 등이 있긴 하지만 그 자체로 서사의 응집력을 만들어 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때 유일하게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꿰어내는 것이 바로 아버지, '박서방'의 존재이다. 이 영화가 정확하게 '박서방'을 부르는 동네 여인의 목소리로 시작해서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오는 박서방의 모습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더 잘 와 닿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영화의 처음으로 한 번 더 돌아가 이야기의 '주어'를 박서방으로 놓고 다시 영화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일례로 박서방이 주식의 고모를 찾아가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이 에피소드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내용은 주식의 고모가 조카와 명순이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야기가 되어야 했을 테지만, 영화는 홍차 '티백'을 본 적이 없어 주식의 고모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박서방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만약 이 에피소드에서 박서방을 중심에 놓지 않는다면 고모의 반대를 이겨내는 별다른 과정 없이 이어지는 명순과 주식의 결혼 장면은 사실 '뜬금없는 비약'으로 밖엔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장면은 영화 초반, 박서방이 동네 부잣집에 아궁이를 고치러 갔다가 양주를 대접받는 장면의 변주에 가까워 보인다. 무명 바지저고리에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박서방에게 양주나 티백은 정확하게 (근대화라고 부르든 서구화라고 부르든) 그의 대척점에 놓인 무엇이다. 거친 일반화를 용서한다면 <박서방>은 '박서방'으로 대변되는 전근대적 가부장과 그를 흔드는 '시대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하지만 박서방은 그 '변화'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망설인다. 양주를 대접하겠다며 거실로 올라오라는 동네 여인의 말에 박서방은 고무신 속 더러운 발을 내려다보며 머뭇거린다. 몇 번에 걸친 권유를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한 그는 손수건으로 발을 닦고 거실로 오르지만 더러운 발이 신경 쓰여 안절부절하지 못한다. 업무의 피로를 산행을 하며 풀어야 한다는 명순과 주식을 따라 (명순을 감시할 목적이었겠지만) 산에 오른 박서방은 그들을 따라 즐기기는커녕 절벽에서 미끄러져 죽을 고비를 넘긴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버스를 타자 마자 쓰고 있던 모자는 어느 새 날아가버리고, 어색한 양복차림에 행동은 어눌해져만 간다. 주식의 고모의 초대로 '양옥(洋屋)'에 들어선 박서방은 홍차 한 잔도 제대로 마실 줄 모르는, 못 배우고 가진 것 없는 자라고 망신을 당한 다음 가차없이 쫓겨난다. (이상할 정도로 가혹하게 현관문을 열고 나가라고 소리치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두 번 다시 그 '양옥'으로는 들어가지 못한다. 인상적인 것은 이렇게 쫓겨난 박서방이 서러워하며 지난 시절, 아이들과 보냈던 시간들을 오버랩된 화면의 플래시백으로 떠올린다는 점이다. 이렇게 '박서방의 시대'는 끝이 났다. 그는 더 이상 '양옥'으로 초대받지 못할 것이다. 그 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건 박서방의 자식들 (서구식의 결혼을 하는 명순과 고향을 떠나 (태국으로 가는) 용범) 뿐이다. 이러한 양상은 이행도, 화해도 아닌 일종의 '단절'에 가깝다. 
 

오히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단절 사이에 끼어 있는 '용순'의 존재이다. 딸인 그녀가 부모 곁에서 오빠(이자 장남)인 용범의 역할을 대신하진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동생 명순처럼 양장차림의 ‘커리어 우먼’이 될 것 같지도 않다. 그렇지만 부모의 만류에도 자유연애를 꿈꿨던 당찬 그녀가 트럭운전수가 될 재천과의 결혼 후 자신의 어머니처럼 일방적으로 헌신하는 삶을 살리 없어 보인다.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지만, 여전히 그 ‘사이’에서 성공적으로 이행하지 못하고 잉여처럼 남아있는 그들에게 어쩐지 더 마음이 더 오래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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