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7월의 영화 I 이두용, 1983

by.백문임(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2019-07-01조회 6,397
여인잔혹사 스틸
최초의 칸느영화제 초청작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탄 <기생충>(봉준호, 2019)이 800만 명의 관객을 모으고 있는 2019년 6월 중순 현재, 한국영화로서는 처음으로 칸느영화제의 초청을 받았던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이두용, 1983)를 되돌아보는 건 분명 흥미롭다. 1983년 11월 제작이 완성되자마자 제22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작품상 등 6개 부문을 수상한 이 영화는 다음해인 1984년,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 Paris, Texas>(빔 벤더스, 1984)가 황금종려상을 받은 제 37회 칸느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 11편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이두용 감독은 영화제 기자회견에서 “한국 여인상의 존엄성을 표현하려 했다”고 밝혔는데, 봉건적 가부장제 하 여성의 ‘피맺힌 한’은 이렇게 국제 무대에서 ‘한국적인 것’을 대표하기 시작한다.(한국 관객들도 이것을 공공연히 받아들이게 되는 건 약 10년 후 신드롬을 일으키는 <서편제>(임권택, 1993) 즈음일 것이다.)
 

‘한국적 한’의 영화적 탄생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의 애초 아이디어는 세 토막의 옴니버스로 구성된 ‘전설따라 삼천리’류의 이야기였다고 한다. 제목만 봐도 1969년의 옴니버스작 <이조여인잔혹사>(신상옥)>를 떠올리게 하는데(당시 최일남도 소재가 “어디서 많이 보고 들은 것처럼 느껴”진다고 지적했다1)), 그래서인지 이두용 감독은 이 세 토막을 길례라는 한 여인의 이야기로 연결시키기로 했다. 몰락한 양반가문의 딸인 길례가 김진사의 죽은 아들과 영혼결혼을 하는 방식으로 팔려나가 수절하며 살다가 예기치 않게 시동생에게 성폭행을 당해 쫓겨나는 첫 부분, 머슴 윤보를 만나 하층민으로서 행복하게 살았지만 길례를 탐내는 채진사를 결국 윤보가 살해함으로써 야반도주를 하게 되는 중간 부분, 그리고 갑자기 윤보가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린 세도가의 자제였음이 드러나 길례가 윤부사집 며느리가 되었다가 씨내리를 당하고 자결하게 되는 마지막 부분. 그 연결의 억지스러움은 길례가 물레 돌리는 장면들의 미학적 실루엣으로 무마하고자 했으나, 김종원이 지적했듯 “울림의 공감을 주는 메타포로서 살아나지 못했다.“2) 저 기구한 삶의 결절마다 그 육체가 하릴없이 성적 대상으로 전락하는 길례가 물레를 돌릴 때, 그녀는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주인공이기보다는 침입자들 앞에 무방비 상태에 놓인 취약한 존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한(恨)’의 취약한 이미지는 오히려 이제 막 국제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한국영화의 위치에 대한 메타포에 가깝다.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는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198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이두용 감독의 <피막>이 특별상을 수상하고 베를린 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가 본선에 진출했기 때문에 탄생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한국적인 것’(혹은 ‘아시아적인 것’)은 근대성과 길항하기도 하고 종교적인 것과 융합하기도 하는 어떤 미적인 것으로 (재)발견되기 시작했고, 이 (재)발견을 공들여 전유한 결과물이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였다고 할 수 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평자가 “30년전 일본 미조구치 겐지”를 연상케 한다고 지적했듯, 오랫동안 미지의 대상이었던 한국영화는 이 국제무대의 관객들을 위해 일본영화와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어떤 ‘한국적인 것’을 전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길례의 육체가 그다지도 자주 폭력에 노출되었던 것은 이 전시를 위한 이미지, 즉 물레를 돌리는 한맺힌 여성의 이미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시대의 관객들
어쨌거나 영화를 통해 ‘한국적인 것’을 (재)발견하려던 이 작업은 해외에서는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한국은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 게임 개최를 앞두고 그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여인잔혹사:물레야 물레야>는 만하임 영화제, 런던 영화제, 페사로 영화제 등에 초청되고 일본의 ‘스튜디오 200’에서 ‘현대한국영화주간’을 개최할 때 상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 거주 한국인들이 주관한 각종 행사에도 소개되었다. 일본 쓰까사에는 15만 달러에 수출되었는데, 1983년 한국영화의 총수출 편수(21편)의 총액이 25만7천 달러였던 걸 염두에 두면 놀라운 가격이다.

하지만 한국의 관객들, 즉 이미 <적도의 꽃>(배창호, 1983)>, <바보선언>(이장호, 1983)>, <고래사냥>(배창호, 1984)에 호응하고 할리우드의 <이티(E.T.,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1982; 한국에서 1984년 개봉하여 역대 최고 흥행성적 3위를 기록했다)>의 자장 안에 있던 관객들에게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는 그저 “우수영화 및 대종상 겨냥영화”3)의 하나였던 듯하다. 28일간 상영되었던 명보극장에는 3만5천여 명의 관객만이 방문했다.

1) 최일남, “최일남 산책: 생활문화론,” <동아일보> 1984.3.14.
2) 김종원, “1983년도 한국 (극)영화,” 영화진흥공사 편, <1984년도판 한국영화연감>, 1984.
3) 김종원, 앞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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