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장: 3월의 영화 Ⅰ 김기영, 1963

by.김소희(영화평론가) 2019-02-28조회 2,198
고려장 스틸

영화 <고려장>을 둘러싼 논란은 대개 영화가 아닌, 실제 풍습에 초점이 맞춰진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고려장은 설화로 남아 있을 뿐, 실제 행한 기록은 없다.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의 풍습으로 세계에 알려졌다는 점 역시 논란거리다. 영화 <고려장>에는 한 사학자가 과거 풍습으로 고려장을 언급하는 장면이 있어 고려장을 기정사실화한다고 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영화를 비판해야 할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고려장>은 고려장이라는 풍습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의 혹은 실제의) 풍습을 경유해 삶의 단면을 해부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김기영이 인간 사회에 내재한 정신적인 본능을 영화로 구현해왔다고 이해할 때, 우리는 설사 그것이 허구일지라도 고려장이라는 풍습에 내재한 인간의 욕망에 관해서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장이라는 풍습을 부정하고자 하는 데에는, 단지 사실을 바로 잡고자 하는 열망을 넘는 과잉된 무언가가 있다. 영화를 통해 우리가 부정하고자 하는 것의 실체를 다시 마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려장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에는 ‘효’사상이 있다. 고려장은 효사상에 위배되기에 용납할 수 없는 미개한 치부처럼 보였다. 그러나 김기영은 이질적인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고려장 문제가 단지 청산해야 할 과거의 유산만이 아님을 꼬집는다. 오프닝 장면은 전 세계적으로 당면한 인구 조절 문제에 관한 TV 토론 현장을 보여준다. 생물학자는 식량이 부족할 때 서로 잡아먹어 개체 수를 조절하는 쥐를 사례로 들자, 사학자는 이를 받아 과거 고려장 풍습을 언급한다. 이것은 뒤이어 등장할 구룡(김진규)의 이야기의 요약본이자, 고려장에 관한 다른 접근법을 보여준다. 고려장이 생겨난 근본 원인이 존속하는 한, 중립적이고 이성적인 외양을 띤 토론(혹은 법과 제도)의 형태로 고려장은 다시 등장할 것이고 이는 원래의 잔혹한 이면을 감춘 것에 불과하다. 토론 장면에서 인구조절 논리에 대응하는 것으로 ‘운명’이 언급된다. 일흔 정도 되는 한 방청객은 ‘예전 같으면 고려장을 당할 나이’라는 사회자의 발언에 ‘나는 100살까지 살 손금을 타고났다’고 받는다. 그러나 운명이 제도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부합한다면 어떨까. 
 
고려장 스틸

근대 이전으로 회귀해 펼쳐지는 다음 이야기에서 제도와 운명은 서로 동조한다. 어릴 적 구룡은 무당(전옥)으로부터 이복형제들을 죽일 것이라는 점괘를 받는다. 점괘를 통해 예고된 운명은 (잔인하긴 하지만) 인구조절이라는 제도적 목적과 부합한다. 점괘의 저주를 받은 구룡의 형제들은 구룡을 위기에 빠뜨리고 모함한 끝에 결국 그를 죽일 기회를 얻는다. 그런 아들을 구하기 위해 구룡의 어머니(주증녀)가 스스로 고려장을 선택한다. 이때 고려장은 제도와 운명의 결합체로 등장한다. 굿을 통해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예정된 운명과 인구조절이라는 근대적인 과제를 동일 선상에 놓으면서, 운명에의 저항을 곧 제도에의 저항으로 만드는 것이 영화의 미묘하고도 중요한 지점이다. 그 가운데 고려장은 효라는 추상적인 가치를 인식하게 하는 도구와 인구조절을 위한 제도적인 장치 이전에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버려지고 죽임당하는 일임이 드러난다. 구룡을 둘러싼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 목숨을 잃는다. 모함당해 죽고, 먹을 것이 없어 죽고, 어린아이가 제물로 바쳐지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고려장’만을 특별한 죽음의 방식으로 떼어놓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해 영화 속에서 유독 인상적인 것은 어떤 유예의 순간들이다. 구룡 어머니의 고려장 시퀀스에서 구룡의 행위를 유예시킨 건 구룡의 효심이 아니라 어머니의 살고자 하는 의지였다. 어머니는 눈에 먼지가 들어갔다는 공연한 말로 아들을 불러 세운 데 이어 “살고 싶다”고 고백한다. 이를 통해 ‘효’나 ‘고귀한 희생’ 같은 추상적인 가치 이전에 본능적인 생존 욕구가 더욱 강조된다. 구룡이 어머니에게 다시 돌아가게 되는 이유는 ‘효심’ 이전에 길을 따라나선 아이로부터 ‘이다음에 아저씨를 데려오게 지게를 가져오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구룡의 갈등 요인에는 단순히 효심과 운명 사이의 고심만이 아니라 고려장이 곧 자기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에의 실감도 있다. 

유예의 다른 순간은 구룡의 10형제에 대한 복수 시간에 도래한다. 연인 갓난이(김보애)가 10형제의 손에 죽임당했음을 무당으로부터 들은 구룡은 무당이 전해 준 도끼로 형제들을 죽이기 시작한다. 이는 충분히 장르적으로 생략해 표현할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영화는 한 명 한 명 숫자를 세듯, 형제들이 하나하나 죽어나가는 장면을 이상한 느낌이 들 만큼 천천히 보여준다. 영화 내내 하나의 덩어리처럼 인식되었던 10형제들은 도끼질 속에서 각각의 개체로 분리되며 구룡에게 삶을 구걸한다. 그 속에서 행위에 관한 자각이 싹트고 구룡은 도끼질을 멈춘다. 구룡은 형제를 모두 죽이는 대신 그런 운명을 심어둔 무당의 나무를 자른다. 영화의 결말은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을 멈추고, 살육의 뿌리를 자르자는 지극히 계몽적인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이 어떤 시대, 어떤 장소와 만났을 때는 간절한 바람이 되기도 한다. 운명이든 제도든 우리가 저항해야 할 것은 오직 죽음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그러므로 다시 묻자. (그것이 실제이든 허구든) 고려장이라는 풍습이 미개한가. 그렇다면 전쟁과 학살은 어떤가.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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