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고온 산하: 11월의 영화Ⅰ 이강천, 1962

by.안시환(영화평론가) 2018-11-01
두고온 산하 스틸

<두고 온 산하>의 영화적 성격은 그 시작과 함께 “자유를 위해 싸우다 쓰러진 무명 용사를 위한 영화”임을 밝히는 자막에서부터 분명히 제시된다. 물론 이 작품을 연출한 이강천이 빨치산에게 인간적 온기를 불어넣었다는 이유로 상영금지 처분을 받은 <피아골>(1955)의 감독이었다는 점에서 반공 영화의 전형성을 넘어서는 어떤 지점을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두고 온 산하>의 제작자가  ‘국방부 정훈국’이라는 점은 그 기대를 꺾어버리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피아골>은 반공영화의 극단적 이분법에서 벗어난 부분이 있다 해도, 그렇다고 반공영화의 전형성에서 온전히 탈피한 작품은 아니었다. <두고 온 산하> 역시 반공 영화의 전형성을 탈피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시대적 한계를 고스란히 간직한 영화에 가깝다.  

두고온 산하 스틸
 
<두고 온 산하>는 자유주의 사상에 경도된 석빈(김진규)이 소련이 지배하는 북한 사회와 갈등을 겪다 남한으로 탈출하는 이야기를 기본 줄거리로 한다. 그리고 그 속에 석빈과 소련군 장교 시렌코프(김승호)의 딸 쏘냐(모니카 유)의 러브스토리와 석빈을 사모하지만 러시아 통역관으로 일하며 소련군에 몸을 바쳐야 하는 정숙(김지미)의 사연이 더해지면서 멜로드라마적인 감정을 영화에 불어넣는다. <두고 온 산하>가 <피아골>에 비해 더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사회 고발적인 태도를 심도 깊은 영상 속에 구현한 리얼리즘적인 양식 속에 멜로드라마, 모험 및 전쟁 영화 등의 다양한 장르적 테크닉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이강천의 연출 스타일이다.

두고온 산하 스틸

석빈과 쏘냐가 데이트하는 장면은 전형적인 할리우드의 멜로드라마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또한 석빈이 감옥에서 탈출한 영화 중반부 이후 벌이는 도망과 추적의 시퀀스는 이강천이 할리우드식의 액션 장르 연출에도 일가견이 있음을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하다. 즉, <두고 온 산하>는 전체적으로는 리얼리즘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할리우드의 다양한 장르의 관습을 연출 스타일로 끌어들이며 극적 흥미를 돋우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의 시점에서도 <두고 온 산하>가 리얼리즘 영화라 불릴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시 북한의 실상을 여과 없이 담아내고 있다는 점보다는 당대의 열악한 제작 여건을 (어쩔 수 없이) 리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러할 것이다. 물론 거함과 꽤 많은 단역을 동원한 흥남부두 철수 장면만 놓고 본다면  ‘국방부 정훈국’이 제작한 영화다운 스케일을 거론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 전체적으로 김승호와 일련의 한국 연기자들이 모형으로 만든 큰 코를 얼굴에 붙여 러시아인인 척 연기하는 모습이 실소를 불러일으키는 등 여러 영화적 한계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두고 온 산하>는 당대의 영화들이 자신에게 부여된 제작 여건의 한계를 영화적으로 어떻게 극복하려 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자리한다. 이와 관련해 가장 눈길을 끄는 연출은 한국 전쟁 당시의 다큐멘터리 영상을 극의 일부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영화 종반부의 장면들이다. 사운드 없이 특히 화면만 남은 다큐멘터리 영상에 후시로 녹음된 사운드를 입혀 영화적 허구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연출은,  ‘규모의 스펙터클’이 불가능했던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려 했던 당시 영화인들의 악전고투를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두고온산하 스틸
두고온 산하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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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산하>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서구(또는 근대)에 대한 당대의 분열적 태도가 러시아의 묘사 속에 그대로 전이되어 나타나는 방식이다. <두고 온 산하>는 남한 사회의 체제적 우월성을 굳이 앞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북한의 억압적 사회 체계의 부정적 면모를 부각함으로써 자유주의 체제로서의 남한 사회를 자연스럽게 이상화, 합리화하는 쪽에 가깝다. 북한과 남한의 극단적 비교는 반공 영화의 전형성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부정적 화법’의 내용을 어떻게 구성하는가, 하는 것이다. <두고 온 산하>는 석빈과 쏘냐의 로맨스, 그리고 그와 대조되는 정숙의 비정숙한 삶의 태도를 반복적으로 대조한다. 러시아군에게 강간을 당했던 정숙은 오히려 러시아어를 배워 통역관이 되어 그들을 몸으로 유혹하며 살아가는 여성이다. 즉, 정숙은 러시아적 삶의 태도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타락한 여성인 셈이다(영화 후반부에 정숙의 이러한 태도가 위장이었고, 그녀의 진심은 전혀 달랐음이 드러난다). 그 대척점에 있는 러시아 장교의 딸 쏘냐는 자유와 순수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석빈과 쏘냐의 연애 장면이 할리우드 청춘영화에 영향을 받은 동경의 대상으로서 자유로운 이상적 사회의 구현처럼 보인다면, 러시아적 삶에 익숙해진 정숙이 북한군 장교를 유혹하는 등의 장면 등은 전형적인 타락한 여성/서구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이는 서구에 대한 우리의 양가적이고 분열적 태도, 그러니까 서구에 대한 동경과 불안의 반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두고 온 산하>가 그려낸 북한의 이미지는 서구에 대한 남한 사회의 부정적 인식, 즉 ‘우리 안의 타자’를 투영한 결과다. 이러한 면에서 <두고 온 산하>는 우리가 북한의 이미지를 통해 만나게 되는 대상은 결국 우리 안의 타자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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