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꿈 : 10월의 영화 Ⅰ 신상옥, 1955

by.김영진(영화평론가) 2018-10-05조회 5,612
꿈

신상옥의 <>(1955)을 동시대 세계영화의 자장 안에서 본다면 시간을 거슬러 만들어진 영화처럼 보일 것이다. 빈번하게 깔리는 배경음악과 그리 많지 않은 대화 장면이 없다면 거의 무성영화로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신상옥 자신이 리메이크한 1967년 판 색채 영화 <>과 비교해 봐도 서사는 단출한 상태를 넘어 앙상하고 사건을 추동하는 인물의 내적 동력은 거의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그런데도 상대적으로 각본이 훨씬 정교하고 인물의 관계도도 풍부한 색채판 <꿈>에 비해 이 무성영화 비슷한 흑백영화 오리지널이 더 재미있다는 게 신기하다. 

이광수의 소설에 기초한 소재지만 이 영화는 서사의 기본 얼개를 여러 이유로 자세하게 축조하는 걸 포기한 인상을 준다. 한국전쟁 직후 폐허에서 시작했을 영화산업의 물적 토대가 그 첫 번째 이유일 것이고 최인규 감독 밑에서 도제식 조감독을 했다고 하나 데뷔작 <악야> 이후 세 번째로 장편영화를 연출한 신상옥의 얕은 연출 경험도 또 다른 이유일 것이다. 일종의 자서전 비슷한 책 「난, 영화였다」에서 신상옥은 “영화는 근원적으로 아름다움을 탐구하고 꿈을 창조하는 작업이다. 미술을 공부하면서부터 내 의식의 내부에는 탐미적인 요소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고 쓰면서 이 영화가 문학의 영화화를 통해 나름의 영상미를 탐구한 성과라고 자평한다. 

‘탐미적인 영상미’의 수준에 오리지널 판 <꿈>이 이르렀는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없지만, 기술적 열악함이 화면에 그대로 드러나는 낭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기묘한 정기가 서려 있어 홀린 듯이 빠져들게 되는 매력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말장난 같지만 실제로 그렇다. 초기 신상옥 영화의 파트너였던 배우 황남(배창호 감독이 연출한 <>에서 주연을 맡았던 안성기와 외모가 비슷한)이 연기하는 승려 조신이 지체 높은 태수의 딸 달례(최은희)를 보고 한눈에 반해 파계하는 초반 설정에서 영화는 훌쩍 서사적으로 비약해 그 두 사람이 절에서 멀리 도피해 달아나는 장면으로 치닫는다. 쫓는 쪽은 화면에 나오지 않는데 쫓기는 그 두 사람은 다급하고 절박하다. 화면은 이들의 반쪽짜리 추격전을 10여 분 가량 담아내는데 쫓는 자들과의 대비가 화면에 구현되지 않는데도 장중하고 긴박한 음악이 깔리며 그들은 스스로 위기감을 재촉하면서 열심히 달아난다.

 조신
조신(안성기와 외모가 비슷한...황남)

여기서 시간에 대한 공간의 절대적 우세가 형식적 특징으로 자리 잡는다. 조신과 달례의 욕망의 장의 배경으로 존재하는 자연이라는 조형공간이 그 자체로 서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면서 안티 서사에 가까운 틀을 세우는 결과가 만들어짐으로써 영화를 현대적 기운으로 채우는 작은 기적이 일어난다. 이는 앞서 말한 무성 영화적 외양의 활기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인데 서사를 미니멀하게 축조하는 대신 극적 사건의 계기로 작동하지 않는 자연 그 자체를 지속적으로 전경화함으로써 주인공들의 탈주 욕망을 품는 숭고한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이는 조신의 경쟁자인 평목 스님이 등장해 조신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급작스럽게 처리하는 중반부의 성급한 극적 리듬이나 달례의 정혼자인 모레아손 화랑 일행이 후반부에 등장해 본격적인 추격전을 벌일 때에도 어딘가 모르게 어설프고 인위적으로 극적 구성을 꾸미는 걸 감추지 못하는 허술한 완성도를 보완할 만큼, 이 영화만의 특이한 기운이다. 

달례(최은희)
모든 욕망의 대상 달례(최은희)

숭고한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짝을 이루는 것은 달례를 연기한 배우 최은희의 존재감이다. 이 영화에서 최은희는 처음부터 스스럼없이 조신을 연모하는 자신의 욕망을 고백하고 기꺼이 그를 따라 신분을 버린 사랑의 도주를 감행하며 조신의 곁에서 평범한 아내로 그를 보필하면서 아름다운 존재 그 상태로 남아 있다. 조신과의 도주 중간에 조신이 너구리굴에 불을 내어 너구리들을 쫓아내고 그 굴에서 쉬려 할 때 달례는 굴에서 도망쳐 나온 새끼 너구리들을 보며 “아유, 가엾어라.”라고 탄식한다. 달례에게 흑심을 품은 평목을 조신이 죽인 것을 알았을 때도 달례는 그런 조신을 책망한다. 결정적으로 본래의 성정을 잃고 조신이 느닷없이 난폭하게 굴 때조차도 그런 조신을 품어준다. 요컨대 달례는 범접할 수 없고 웅장하며 심술궂은 자연이 아니라 언제나 어머니처럼 생육 번성이 가능한 자연과 비슷한 존재로 누구에게나 욕망을 받는 대상이다. 달례는 모레아손의 부서진 욕망의 대상이며 평목의 욕망을 받았고 심지어 연못가에서 목욕을 하다 (역시 느닷없이 나타난) 불한당의 습격을 받는다. 조신은 그들 가운데 유일하게 달례로부터 욕망의 화답을 받은 인물이지만 그 때문에 결국 자신을 쫓아온 모레아손에게 죽임을 당한다. 모레아손의 칼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조신은 꿈에서 깨어나고 죽음과 삶이 인접한 경계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모레아손에게 죽임을 당한 달례

조신의 욕망과 좌절은 당시 신상옥이 처해 있던 상황을 간접적으로 유추하게 한다. 신상옥은 선배 영화인 김학성 촬영감독의 부인인 최은희와 사랑에 빠졌고 그들의 사랑은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신상옥이 최은희를 주연시켜 만든 두 번째 영화 <코리아>는 충무로 영화인들이 후반 작업을 거부해 곤란을 겪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꿈>에는 욕망에 따른 과보를 치른다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 두려움이 투사된 흔적으로서의 달뜬, 동시에 매혹적인 기운이 서투르지만 맹렬한 영화적 활기로 팽배해 있다.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 신상옥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서슴없이 영화적 자양분으로 삼는 화면을 만들어낸다. 최은희는 신상옥이 연출한 그 화면 속에서 남자들의 그 비루하고 염치없는 욕망을 당당하게 취사 선택해 스스로 자족하며 존재하는 그런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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