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색깔있는 남자 김성수, 1985

by.김형석(영화저널리스트, 전 스크린 편집장) 2014-03-10조회 5,027
색깔있는 남자

1980년대 한국영화는 이상했다. <결혼 이야기>(1992)가 ‘기획 영화’의 시대를 열며 충무로 체질 개선을 시작하고 <쉬리>(1999) 이후 급속한 산업화와 장르화 속에서 이른바 ‘웰메이드’를 추구하며 한국영화가 서로 닮아가기 시작했다면, 그 이전인 1980년대는 중구난방의 시대였다. 이 시기 남한의 엔터테인먼트가 ‘3S 정책’의 억압 아래 있었고 그 여파로 충무로에 에로티시즘이 창궐했다고 하지만, 정말로 그런 인과 관계가 형성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한국영화는 어떤 정책을 수행하기엔 그 산업적 토대가 너무나 부실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 한 편이 완성될 때 그 최종심급은 심의와 검열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나온 영화들은 시스템이 아닌 모순적 사회 구조의 산물이었다. 1960년대에 산업적 전성기를 맞이했던 한국영화가 1990년대에 재 산업화에 들어가기까지, 그 사이에 이색지대처럼 존재하는 1970~80년대는 일종의 혼란기였으며, 1980년대는 그 혼란의 정점이었다.

그런 이유로 1980년대 한국영화는 미지의 영역에 속한다. 이 시기에 오면 한국영화의 정서적 기둥이었던 ‘신파 감성’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외국 영화가 맥락 없이 접목되며, 뜻하지 않는 장르적 시도들도 간헐적으로 이어지며, 때론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마저 뒤흔드는 영화가 등장한다. 이런 증상은 이른바 ‘에로 영화’ 속에서 돌발적으로 나타나곤 했는데, <어우동>(1985)은 의도했든 안 했든 정치적 텍스트가 되었고, 위험한 섹슈얼리티 무비 <사방지>(1988)도 있었으며, <서울에서 마지막 탱고>(1985)의 정신분열증적 아우라는 시대의 파격이었다. 이 불균질적이며 뒤엉킨 계보도 속에 김성수 감독의 <색깔 있는 남자>(1985)가 있다.

2004년에 세상을 떠난 김성수 감독은 1977년 <돌아와요 부산항>으로 데뷔한 후 1980년대에 장미희, 원미경, 이영하 등이 출연하는 <색깔 있는 여자>(1981)로 에로티시즘 멜로의 세계로 접어든다. 여기서 혹시 <색깔 있는 여자>와 <색깔 있는 남자>가 연작이라고 생각하신다면 큰 오산. 전작이 한 여성의 이중생활을 그린 할리우드 영화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1977)를 연상시킨다면, 후자는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디아볼릭>(1955)를 연상시키는 악녀 스토리다. 

<색깔 있는 여자> 이후 정윤희 주연의 <여자와 비>(1982), 김부선이 등장하는 <여자가 밤을 두려워하랴>(1983) <여자는 남자를 쏘았다>(1984), 당대 급부상한 섹스 심벌 오혜림마흥식임성민 사이를 오가는 <탄드라의 불>(1984)까지 나름 일관성 있는 작품 세계를 구축하던 김성수 감독은 <색깔 있는 남자>에서 정점을 맞이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패션 디자이너 최태욱, 일명 ‘샤르망 최’(임성민)가 귀국한다. 그는 후원자인 김문자 여사(홍명진) 덕에 성공적으로 한국 패션계에 진입하지만, 그들의 관계를 질투한 변수린(오수미)은 김문자를 살해한다. 변수린의 사랑이 부담스러워진 샤르망 최는 재미 교포인 주은몽(오혜림)과의 관계를 통해 벗어나려 하지만, 변수린의 집착은 점점 그를 옥죄어 온다. 결국 샤르망 최는 변수린을 잔인하게(기차 레일 위에 올려놓는 방식으로!) 살해하는데….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돈을 노린 주은몽의 계략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진 주변 인물에 지나지 않았던 샤르망 최의 부티크 점원(오경아)이 주은몽과 함께 묵직한 반전으로 관객의 뒤통수를 내리친다.

<색깔 있는 남자>는 한 명의 지골로를 네 명의 여자가 갉아먹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성적 위력은 진정 압도적이다. 김문자 여사에겐 성 기능을 상실한 나이 든 남편(변희봉이 역할을 맡았다!)이 있는데, 그는 자신의 부실한 성기에 대한 대리물로 일본도에 집착한다. 여기서 진정 놀라운 장면이 나오는데, 김문자는 남편 앞에서 일본도 손잡이로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그 광경을 본 남편은 극도의 흥분에 휩싸이다가 심장마비로 죽는다. 복상사 따위는 우습게 만드는, 퍼포먼스만으로 생명을 앗아가는 놀라운 캐릭터다. 하지만 그녀도 변수린에게 죽게 된다. 한국영화에서 팜므파탈을 평가할 때 만신전에 봉헌되어야 할 오수미는 이 역할을 만나 놀라운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그녀는 한 마리 음탕한 거미처럼 남자를 옭아맨다. 그녀의 대사는 당연히 직설법인데, 음산한 목소리로 샤르망 최에게 “누님이라는 소리 때려치워!” 일갈하다가도 “색깔 있는 남자, 당신 날 흥분시켰어”라고 속삭이는 모습은, 끈적끈적하면서도 헤어나올 수 없는 마성을 지닌다.

여기서 대미를 장식하는 인물은 주은몽이다, 샤르망 최는 변수린을 살해한 후 결국 경찰에게 체포되고, 모든 것은 주은몽의 수중으로 돌아온다. 이때 그녀는 샤르망 최에게 쿨하게 말한다. “여자 등친 돈, 여자가 돌려받았을 뿐이야.” 그리고 이 영화가 러닝타임 내내 감춰왔던 관계가 드러난다. 샤르망 최와 그렇고 그런 관계였던 점원은 알고 보니 주은몽과 동성 연인이었던 것이다.

얼음송곳만 없었지 <원초적 본능>(1992) 못지않은 <색깔 있는 남자>는, 1980년대 에로티시즘 영화들 속에서도 가장 거친 욕정을 드러낸 영화다. 이 영화의 여자들은 절대로 욕망을 억누르지 않으며, 이 영화의 남자는 언제나 그들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 이처럼 강한 여자들이 집단적으로 등장해 육체의 암투를 벌이고 그 가운데 한 남자가 먹잇감이 되는 지옥도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섹스와 돈과 명예의 유혹이 넘실대는 에로틱 누아르 스릴러 <색깔 있는 남자>. 누구나 공감하는 걸작은 절대 아니지만, 이 영화만큼 강렬한 화면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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