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귀로 이만희, 1967

by.안시환(영화평론가) 2013-07-22조회 4,675
귀로

한국 멜로드라마의 최고의 걸작. 단언컨대, 그것은 <귀로>를 수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표현이다. <귀로>는 이만희의 창조적 역량이 최고조에 달했던 1960년대 후반, 그러니까 <만추>(1966) 와 <휴일>(1968) 사이인 1967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휴일>이 좀 더 모더니즘적이고 이만희 작가적 취향이 더 짙게 표현된 작품이라면, <귀로>는 <휴일>의 이러한 요소들을 멜로드라마의 장르적 정서 속에 녹여내는 특징을 보인다. 한국 영화에서 장르적 성격과 작가적 취향이 이 정도로 조화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전쟁에서 부상당해 침대 생활을 하는 남편 최대위(김진규)는 신문 연재소설을 쓴다. 소설 속 여주인공은 전쟁에서 부상당한 채 성불구 된 남편을 끔찍이 보살핀다. 어쩌면 그 소설은 남편이 부인(문정숙)에게 보내는 편지였을 것이다. 아니, 부탁, 혹은 고문. 부인은 그 소설 원고를 들고 신문사가 있는 서울과 인천을 오간다. 신문사 편집장은 이 소설을 좀 더 통속적으로 바꾸고 싶다. 이상화된 관념의 여인이 아닌, 통속적 세계를 맨살로 느낄 수 있는 여인으로. 물론 편집장의 바람의 독자의 욕망이기도 하다. 부인은 신문사에서 강기자(김정철)라는 젊은 청년을 만나면서 마음이 흔들린다. 반신불수가 된 가부장제의 제도 속으로 들어가 (가부장제가 규정한) 이상적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온몸으로 세상을 느끼는 통속적 세계에 살아갈 것인가? 

선택. 어쩌면 이 영화는 부인의 선택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녀는 선택한다. 그녀가 불구가 된 남편 곁에 머무르기로 결정한 것도, 교회당 앞 계단에서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타고 오르는 것도 그녀의 선택 결과다,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과연 올바른 사실일까? 어쩌면 그것은 가부장적 사회가 강요한 선택과 탈선하기를 바라는 독자(관객)의 욕망이 강요한 선택 사이에서의 머뭇거림이 아닐까? 그렇게 부인은 자유의지로 선택한 곳에서 또 다른 강요를 만난다. 그녀는 강요하는 힘과 자유의지의 욕망 사이에서 선택의 딜레마에 처하고, 그것은 1960년대 한국사회의 사회적, 문화적 공백의 알레고리적 표현이다. 멜로드라마는 어떤 사회적, 문화적 공백을 감정적 과잉으로 대체하는 일종의 보완물이다. 과거의 것과 새로운 것, 몰락하는 것과 부상하는 것, 둘 사이에서의 망설임, 그 공백의 결핍은 감정적 과잉으로 대체된다. 

게다가 이만희는 사회적 환경을 배제한 자유의지적 선택을 믿을 만큼 순진한 감독이 아니다. 이만희는 인물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을 의식적으로 드러내려 한 감독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창작 환경에서 감각한 것들을 영화 속에 투사하는 데 거의 천재적인 능력을 보여준 감독이다. 이만희의 영화는 사회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대신, 그 목을 옭아매는 숨 막히는 광경을, 그 황량함을, 그 허전함을 어떤 (풍경의) 분위기 속에 펼쳐놓곤 했고, 그 순간마다 그의 영화는 빛을 발한다. 이만희의 영화에서 인물의 정서가 폭발하는 순간들 역시 이러한 풍경의 분위기와 인물의 정서가 공명할 때이다. 그 순간, 순간의 이만희의 솜씨는 실로 경탄스럽다. (비록 이후 <휴일>에서 좀 더 빛을 발하긴 한다 해도) 부인의 머릿결을 거침없이 흐트러뜨리는 바람은 황량하고 허무한 분위기로 그녀를 휘감는다. 그 바람이야말로 그녀의 정서 자체가 아니면 무엇인가? 교회당 그렇게 인물은 풍경이 되고, 풍경은 인물이 된다. 꽉 막힌 구도 속에 부인과 남편의 집이 묘사되는 순간들은 어떠한가? 공기는 희박해지고 숨구멍은 막혀간다. <귀로>에서 (풍경의) 분위기를 창조하는 카메라 앵글은 과감한만큼 정확하다. 

<귀로>, 말 그대로 돌아가는 길. 그녀가 서울 곳곳을 누빌 때, 그녀의 뒤편으로는 기차가 지나간다. 아니 되돌아간다. 그녀 역시 경인기차의 막차 시간에 맞춰 인천으로 돌아간다. 늘. 같은 자리로. <귀로>는 바로 그 관성의 법칙이 흔들리는 순간의 인물 심리를 치밀하고도 다층적으로 추적해가는 작품이기도 하다. 인물의 정서와 1960년대의 한국 사회의 시대상이 만나는 지점, 그곳에서 드러나는 돌아갈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어찌할 수 없음의 정서. 영화의 엔딩. 부인은 화장을 한다. 그리고 걸려오는 전화. 그녀는 지금 간다고 강기자에게 말했지만, 그녀의 몸이 향하는 곳은 침대 위다. 주변에는 약병이 보이고, 침대 위로 그녀의 몸이 잠긴다. 그녀는 부감의 카메라 프레임 속에 갇힌다. 그녀는, 그리고 영화는 그렇게 끝을 맺는다. 어찌할 수 없는 길 위에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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