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우민호, 2012

by.김수용(영화감독) 2012-09-26조회 2,860
간첩

오늘은 영화 한편을 보자. 가까운 대한극장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열 개의 간판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옛날에 비하면 작고 초라해 보인다. 1968년 나는 이 극장이 자주 제작한 춘향을 만들었는데, 1,800명 중에서 뽑힌 홍세미의 간판이 무척 크고 화려했다. 프로를 살펴보니 외화보다 한국영화가 압도적으로 많아 흐뭇했으며 그 중에는 영광의 <피에타>도 붙어 있었다. 나는 개봉 첫날인 영화들 중 무작위로 <간첩>을 골랐다.

간첩이란 단어는 요즘 분명히 퇴색하고 잊혀진 죽은 말이다. 그러나 영화는 살아있었다. 박력 있고 짧은 숏이 정신없이 이어져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간첩이란 고정관념을 넘어선 배우들의 연기가 좋다. 감독은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제일 좋아한다. 

남파 22년차 김명민은 가짜 비아그라 장사이자 선량한 가장으로 남매를 키우며 생활고에 찌들어 지금은 간첩이란 정체성조차 가물가물하다. 남편 없이 시각장애아를 키우는 부동산 억척 아줌마 염정아는 맵시가 있다. 한우를 사육하며 FTA 반대 시위에 앞장서는 몸짱, 얼짱 정겨운. 마누라가 죽고 혼자 사는 치근한 변희봉.

이들 간첩은 완수해야 할 미션이 달갑지 않지만 ‘본분을 잊지 말라’는 북쪽 최고 암살자 유해진의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날로 달라지는 남쪽사회에서 살다보니 현실에 고통 받는 소시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15세 때 처음으로 간첩영화 <당신을 노리고 있다>를 봤는데 그 내용은 2차세계대전 때 적의 스파이를 경계하라는 계도성이 강했고, 간첩으로 나오는 배우가 험상궂었다. 그리고 먼 훗날 나도 감독이 되어 <고발>(이수근 이야기), <삐에로와 국화>(이병주 소설) 등 간첩영화를 만들게 되었는데 박노식, 신성일 같은 선남들을 출연시켰지만 반공이라는 계도성을 희석시킬 수는 없었다. 

해킹 한 번에 미국 국방부 정보망까지 뚫리는 세상에 김명민은 정보수집의 사각지대에서 머물러야했고, 변희봉은 박통시절이 좋았다고 푸념한다. 날만 새면 친북세력 운운하며 싸움질하는 정치권이 잠시 야유 당한다. 

유해진은 변신을 잘하는 배우다. <이끼>에서 팔푼이로 열연했는데 이번에는 찬바람이 부는 냉혈한이 된다. 그가 서울에 나타났을 때, 간첩들은 비로소 사명감을 깨닫고 모여들지만 무장하라는 지시에 김명민은 권총을 파묻어둔 자리에 고층아파트가 섰다고 했고, 염정아는 총알이 없다고 한다. 정겨운은 소가 권총을 밟아 고장, 변희봉은 분실했다고 말해 혼쭐이 난다. 결국 이들의 작전은 북에서 6자회담에 참가했던 이승호를 암살하는 것으로 집약된다. 그는 탈북해서 서울의 어떤 기관의 보호를 받고 숨어있었다. 암살단은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단 1초도 착오가 없는 행동으로 그를 제거하려 들지만 경찰은 이미 그 정보를 쥐고 있다. 영화는 여기서 더욱 숨 가쁜 템포로 진행된다. 비 오는 밤 전선을 끊고 습격하지만 이승호는 이미 이동을 끝낸 후였다. 추격과 도주하는 차량이 무서운 속도로 묘사된다. 그리고 드디어 백주 노상에서 화려한 총격전이 벌어진다. 충무로 시대를 살던 감독들은 상상도 못할 만큼 압도적인 물량을 쏟아 붓고 있다. 수 십대의 자동차가 충돌해서 부서지고 불타고 그 사이를 누비며 저격수들의 불 뿜는 총성이 고막을 찢는다. 이때 드라마는 적과의 싸움보다 내무 분열로 반전된다. 김명민은 유해진을 공격한다. 두 사람은 초인간적인 격투를 벌이는데 고가도로에서 추락하면서도 치고받는다. 이 시간 운동장에서는 야구배트를 쥔 김명민의 아들이 납치의 표적이 된다. 

나는 이 영화의 끝 장면을 굳이 밝히지 않지만 할리우드 액션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는 말은 하고 싶다. 지금 남한에는 5만 명의 고정간첩이 우리와 같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을 실벽하기란 쉽지 않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서 평범한 척 하고 있다. 생각하니 오싹해진다. 이것만으로도 우민호 감독의 메시지는 충분하다. <간첩>은 분명히 추석 오락영화이다. 처음부터 상을 타고 예술 운운하는 헛소리는 하지 않고 관객을 즐겁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완성도 높은 오락영화, 그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영화의 주류이며 영화산업의 조건이다. 나는 크레딧 끝에 떠오른 제작자의 이름을 확인하면서 앞으로도 건전하고 재미있는 오락영화를 많이 만들어줄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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