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어제 내린 비 이장호, 1974

by.박유희(영화평론가) 2018-07-10조회 9,654
어제 내린 비

유신체제기 청년의 정신병리

유난히 그 시대의 공기를 예민하게 흡습하고 있는 영화가 있다. 그것은 완성도나 흥행, 혹은 예술성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대개 그런 영화들은 모순되고 부조리하며 치기와 센티멘털리즘이 넘치는 가운데 혼종성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당대에 수용되던 것과 후대에 이해되는 것의 차이가 커서 새롭게 발견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는 것 또한 그런 영화들의 특징이다. 걸작이 끊임없이 발견되고 새롭게 구성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런 영화들이야말로 영화사에서 먼저 주목해야 할 대상일 수 있다. 이장호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 <어제 내린 비>는 1970년대 중반을 대표하는 그런 영화다. 김홍준의 표현을 빌리자면 “겉으로는 우드스탁을 표방하는데 몸은 아직 청계천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그 당시의 절묘한 감수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1) 영화 중 하나이며, ‘청계천’2)으로 제유될 수 있는 그 시대의 억압과 그로 인한 청년의 병리를 노출하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3)   

이 영화는 “<별들의 고향>으로 한국영화 흥행사상 최고기록을 세운 인기 작가 최인호와 이장호 감독 콤비가 내놓은 제2탄”으로 개봉 전부터 주목받는다. 그리고 “대목 노린 설빔 영화”로 국도극장에서 개봉하여 약 15만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1975년 ‘방화’ 흥행 3위에 오른다.4) 그런데 이 영화는 가부장제가 공고했던 당시 한국 사회에서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 있는 이야기, 한 여자를 사이에 둔 형제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대본 검열에서도 이것이 문제가 되어 “여주인공의 타락된 성도덕”5)이 지적되고, “근친상간의 인상을 주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6)하라는 개작 통보를 받았다. 그런데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은 ‘풍기(風紀)’ 쪽으로 집중되었고 당시 저널리즘에서도 이 영화는 “이복형제 사이에 끼어든 여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삼각관계를 그리고”7) 있는 멜로드라마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면서 큰 문제없이 개봉되고 소비되었으나, 이 영화가 반영 내지 은닉하고 있는, ‘풍기’의 잣대만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복잡한 이면이 제대로 독해될 기회를 잃기도 했다.
 
어제 내린 비의 영후
영후
 
주인공 영후(김희라)는 본처 자식보다 나이가 많은 사생아다. 그는 태생과 가정환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깊은 절망과 패배의식을 지니고 있다. 달리기에 남다른 재능이 있음에도 대회에 나가면 제대로 승부하지 못하며, 머리맡에는 항상 교수대 밧줄을 걸어두고 때때로 자신의 목에 걸어보기도 하는 것은 그의 내면을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웃음을 띠며 명랑하게 행동한다. 그가 지니고 있는 장난감에서 나오는 과장스러우면서도 위악적인 웃음소리는 영후의 웃음, 나아가 이 영화에서 웃음이 지니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러한 그를 생모(도금봉)는 ‘멍텅구리’, ‘돼지새끼’라 부르며, “비위가 거슬리면 오히려 웃는, 웃을 때가 제일 무서운 새끼”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영후가 장성하여 아버지(최불암)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동생이자 적자인 영욱(이영호)을 만나게 된다. 

영욱은 영후와 달리 합법적인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지만 내성적이고 유약한 외동이다. 그는 어른들 뿐만 아니라 약혼녀에게조차 미성숙한 남성으로 간주된다. 영욱의 성격은 무구한 얼굴로 카페에서 기타를 치며 포크송을 부르는 것으로 상징된다. 영욱의 어머니는 영후에게 이러한 영욱을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영후는 영욱에게 웃는 것부터 배우라며 자신의 장난감을 선물하고, 무작정 달리게 하는가 하면 윤락가에 데려가 성매매를 종용한다. 여기에서 ‘강해진다는 것’은 마음에 없는 웃음을 지을 줄 알고 앞만 보고 뛰어가며 여자를 쉽게 취할 수 있는 남자로 만든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강한 남자’가 된다는 것을 이렇게 이해하고 동생에게 훈육하려 하는 영후 또한 그러한 남자는 못 된다. 그는 육상대회에만 나가면 뒤를 돌아보느라 결승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중도 탈락하는 상습적 패자인 것이다. 
 
민정과 영욱
민정과 영욱
 
영후가 영욱의 약혼녀 민정(안인숙)과 사랑에 빠지면서 형제는 갈등에 휘말린다. 여기에서 영후가 민정과 연인 관계가 되는 계기는 생모의 결혼이다. 아버지와 비합법적인 관계였던 생모는 영후보다 더 나이 많은 아들들이 있는 늙은 남성의 합법적인 아내로 새출발한다. 이로써 사생아로 태어난 영후가 돌아갈 수 있는 그나마 유일한 안식처가 없어지는 셈이다. 이는 “돼지새끼”, “멍텅구리 새끼”라 불리며 “우리 엄마 섹시하지?”라고 말할 수 있었던 영후와 생모 간의 원초적인 관계 또한 상실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영화에서 영후 생모의 결혼식 풍경이 가장 슬프게 다가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예복을 갖춰 입고 예식에 충실하면서도 문득 문득 노출되는 두 사람의 표정과 눈빛은 협소하고 강고한 틀 안에 스스로를 길들일 수밖에 없는 야생동물을 환기시킨다. 평소에 가장 우울한 처지이면서도 겉으로는 제일 명랑한 척했던 두 사람이기에 그들이 유발하는 서글픔은 배가된다. 

이렇게 생모가 결혼하던 날 민정이 영후를 위로하면서 두 사람은 함께 밤을 보내게 된다. 이는 영후의 생모를 향했던 욕망이 민정에게 전이됨으로써 민정이 생모의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영후는 이미 아버지의 질서로 들어가기로 결정한 인물이다. 더구나 민정은 동생의 약혼녀다. 따라서 영후는 민정과의 사랑을 부정하고 민정을 버릴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이미 이 삼각관계의 비극적 결말은 예비되어 있다. 영욱은 영후에게 애인을 빼앗겼음을 알게 되자 민정과 함께 죽으려고 한다. 그러나 민정이 영후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알고는 형을 찾아가 웃음소리 나는 장난감을 돌려주며 자신은 이제 명랑해졌으니 이 물건이 필요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상영 당시 스크린 밖에서는 긴급조치가 발효되고 있고, 국가는 젊은이의 절망이 적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며 명랑하고 건전한 영화만을 권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형에게 애인을 빼앗긴 동생의 입을 통해 ‘명랑’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는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에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 뿐”이어서 여자를 쫓아다니고 무의미한 스트리킹을 하며 시시덕거리는 청년들의 명랑과 상통한다. 결코 밝고 환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웃음마저 부정한다면 견뎌낼 도리가 없기에 쾌활을 가장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 영후는 원체 그것을 알고 있었고, 영욱은 믿었던 형과 애인의 배신을 통해 그것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 영욱은 민정이 형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 앞에서 민정을 포기하는데 반해 영후는 민정의 임신을 동생의 일로 미룬다. 여기에서 영후가 민정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명분은 ‘우애’이다. 영욱과 함께 있는 민정에게 “네 까짓 × 죽는 건 괜찮아. 영욱이 살려 올라오란 말이야.”라고 소리치는 것은 영후의 선택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여자에 대한 사랑 대신 동생과의 우애를 선택하여 아버지의 질서에 편승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생물학적 아비로서의 책임조차 회피한 채 모든 책임을 적자인 동생에게 전가하고 스스로 가부장이 되기를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는 뿌리 깊은 패배의식에서 비롯된 왜곡된 순응이자 부도덕한 아버지의 질서에 대한 수락이다. 여기에서 유신체제기에 살아남아야 했던 청년의 심리가 포착된다. 이 영화가 숨 쉬고 있었던 유신체제기는 유일한 가부장의 권력만이 고수되던 시대이기에 청년 세대에게 권력이 허용되지 않았던 시대이기도 하다. 이 시대의 현실 질서는 자율적 주체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남성 주체의 성장 또한 막아섰다. 그래서 그들은 미완의 자아 상태에서 자살하거나, 현실 질서에 수용되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거나, 책임을 회피하고 현실질서와 타협하며 퇴행적 기성인으로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여성을 타자화한 이기적인 주체로 비난받아왔으나 정작 그들 또한 (주어가 될 수 없었던) 시대의 타자들이었던 셈이다.8) 영욱과 영후의 선택 아닌 선택은 그것을 보여준다. 

영욱은 형의 궤변과 왜곡된 현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민정과 함께 자살함으로써 미성숙 상태로 남게 된다. 그들의 죽음을 조롱으로 애도하듯 영욱과 민정의 피투성이 시체 위로 영후가 준 장난감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 남겨진 영후는 홀로 터널을 달린다. 터널 밖으로 밝은 세상이 보이며 영후가 그쪽으로 뛰어가고 있는데, 경쾌한 음악까지 배경에 깔려 일견 희망찬 결말처럼 보인다. 그런데 영후는 계속 뒤를 돌아보고 코치(박암)의 목소리로 “돌아보지 마라!”는 외침이 반복되며 영화는 끝난다. 이러한 결말에 대해 나중에 이장호 감독은 “슬픔 다음에 금방 감정 변화를 해서 냉정하고 멋들어진 걸 연출”하려는 데서 비롯된 ‘쿨’한 엔딩이었다고 말한다.9) 그러나 이 엔딩은 지금 봐선 냉정하고 세련되었다기보다 오히려 더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도저히 ‘쿨’해질 수 없는 상황에서 계속 뛰어간다는 것이 어쩌면 궁극적 좌절을 거부하는 몸부림으로 보이기도 하고, 뒤돌아보지 않아야 한다는 명령 속에서 계속 뒤돌아보는 영후의 모습이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를 안쓰러움을 유발하는 것이다.
 
어제내린비 스틸

결과적으로 <어제 내린 비>는 명랑해지기 힘든 시대에 명랑을 강요받는 젊은이의 분열과 왜곡을 보여주고 있다. 씩씩함을 가장하지만 정작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뛸 수는 있으나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는 없으며, 욕망하면서도 책임은 질 수 없는 데서 비롯되는 절망과 비애를 웃음으로 위장할 수밖에 없는 정신적 상황이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주인공들을 죽음 또는 극복할 길 없는 외상으로 이끄는 영화 속의 ‘가장된 명랑’은 국가가 강조했던 ‘명랑’과 겹쳐지면서 부조리한 강요 속에 무책임을 무한 긍정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 정신의 병리를 드러내기도 한다. 

유신체제로의 드라이브가 시작되는 1968년, 검열 당국이 <휴일>(이만희)을 두고 주인공이 머리 깎고 군대에 가면 개봉을 허가하겠다고 한 데서 드러나듯이, 당시 정권의 영화 통제에서 내세우는 ‘건전’이나 ‘명랑’과 같은 기준은 그 적용 범위가 탄력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되 기본적인 원칙은 이분법에 의거해 재단(裁斷)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웃음 이면의 반어적 슬픔, ‘불륜 멜로’가 내장하고 있는 현실질서와의 부조화와 같이 양가적이고 부조리한 측면들은 검열에서 포착되기 어려웠다. 강고한 검열 아래에서도 동시대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새로운 영화들이 명랑과 웃음을 내세우는 가운데 반어적 방식을 취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제 내린 비>는 <바보들의 행진>과 더불어 그러한 표현 방식을 취한 대표적인 영화로 긴급조치기의 아이러니한 걸작이다. 아울러 파격적 불륜을 내세우고 명랑의 외피를 두르지 않고서 동시대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식을 달리 상상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유신체제기의 정신 상황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리얼리즘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10)

1) 김홍준은 <별들의 고향>에 대한 당시 소개 글을 인용하며 이 표현을 사용했다.-김홍준 대담, 「별들의 고향_1974」, 『이장호 감독의 마스터클래스』, 도서출판 작가, 2013, 72면. 
2) 1958년부터 1977년까지 청계천 복개공사가 진행되어 광교에서부터 마장동에 이르는 총 길이 5.6㎞에 이르는 고가도로가 건설되었다. 이는 개발독재기 도시 근대화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3) 당시 영화평론가 이영일은 “특히 <별들의 고향>, <어제 내린 비>, <영자의 전성시대>, <바보들의 행진> 등 신인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활력소 구실을 하고 있다.”고 평가하는데 이 영화들이 본고에서 말하고 있는 1970년대 중반의 대표작에 해당한다.-이영일, 「영화 연륜 따르지 못한 질적 향상」, 『동아일보』, 1975.8.18.,5면.
4)「참패 거듭 방화 흥행」, 『경향신문』, 1975.10.1.,6면.
5)「국산영화 <어제 내린 비> 대본 개작 통보 지적사항」, 문서번호: 영화 1733-8124, 문화공보부, 1974.7.3.
6)「국산극영화 <어제 내린 비> 대본 개작 통보 별첨」, 문서번호: 영화 1733-1434, 문화공보부, 1974.11.14.
7)「대목 노린 설빔 영화」, 『동아일보』, 1974.12.28.,5면.
8) 박유희, 「‘그녀’라는 거울 속 타자들: <겨울여자>의 남성인물 고(考)」, 『영화와 남성: 영화로 보는 한국사회와 남성』, 한국영상자료원, 2017, 123면.  
9) 김홍준 대담, 앞의 책, 110면. 
10) 박유희, 「박정희 정권기 영화 검열과 감성 재현의 역학」, 『역사비평』 99호, 역사문제연구소, 2012.5, 71-73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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