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바람불어 좋은날: 7월의 영화 이장호, 1980

by.백승빈(영화감독) 2018-07-03조회 3,181
바람불어 좋은날

1980년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적인 개성은,  각자의 대사와 (완성형의) 자기 플롯이 있는 인물들이 무려 열다섯 명에 달한다는 것이고, 모두 뚜렷하게 구별이 가면서 그 필요를 인정할 만큼 생생하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한 세 청년을 중심으로,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인 도시에서 그들이 경험하는 좌절과 상실을 주로 주목하지만, 그들이 만나는 여러 다양한 개성의 이웃들 또한 보기만큼 가볍거나 사소하지 않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야기의 방향이 잘 설정되어 있고, 그 인물들이 틀림없는 순간과 장소에 정확하게 등장했다가 퇴장하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성취인 것이다. 관심이 가고 주목이 되는 수많은 인물들을 스크린 위에 쏟아놓은 뒤, 교통정리를 잘 해가면서 각자가 내려야 할 도착지로 능숙하게 데리고 가는 이야기는 그것이 아무리 오래 전 만들어진 영화의 것이라 해도 매번 놀랍고 감탄스럽다. 
 
바람불어 좋은날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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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청년들의 쓰라린 정착 초기 모습을 발랄하게 스케치한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면, 철가방을 든 젊은 얼굴의 안성기가 등장한다. 덕배라는 이름의 어리숙한 이 중국집 배달부는 이후 유지인이 연기하는 상류층 여성인 명희와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로맨스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들의 플롯은 덕배로 하여금 결국 권투선수가 되어 이 영화의 유명한 마지막 대사(‘그동안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줄곧 맞아온 것처럼 생각되는데, 그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맞아도 이겨낼 자신이 있다’)를 내뱉게 하도록 작동한다. 그러니까 다들 엇비슷한 러닝타임을 가져가고 있는 터라, 딱히 누구의 이야기라 정리하기에 애매한 이들 청년의 플롯 중에서도, 굳이 ‘주인공’이라고 부를 만한 캐릭터를 꼽자면, 당시 가장 인지도 있는 배우(안성기)가 연기한 이 ‘덕배’라는 캐릭터일 것이다.

즉, 사나운 개가 핥고 있는 빈 그릇을 가져가지 못해 쩔쩔 매다 주인에게 비웃음이나 당하던 중국집 배달부의 앞모습이 이 영화의 오프닝이고, ‘이젠 맞아도 이겨낼 자신이 있다’는 보이스-오버와 함께 벌떡 일어나 주먹을 날리는 권투선수의 뒷모습이 엔딩이라면, 이 영화가 결국 ‘덕배’의 이야기로 수렴되는 이야기라 해도 무리가 없는 해석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영화의 종착점이었고, 그 마지막 보이스-오버가 이 영화를 정리해내는 한 줄 테마였다는 사실을 적용시켜보면, ‘덕배’야말로 수많은 인물들의 플롯이 씨줄날줄로 엮이는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간파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덕배가 권투선수의 마음을 가지고 영화 밖으로 퇴장하게 되기까지, 그를 조력했던 다른 두 청년의 플롯을 하나씩 짚어보자. 이영호가 연기한 이발소 직원 ‘춘식’은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미스 유(김보연)를 좋아하는데, 그녀는 단골손님이자 땅투기로 벼락부자가 된 김회장의 노골적인 추파를 받는다. 미스 유는 춘식에 대한 애정이 없진 않지만 줄줄이 딸린 동생들과 아픈 아버지를 생각하면 자신과 같은 처지의 춘식과 미래를 약속할 수도 없다. 유럽의 복지국가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에 대해 조용히 이야기하며 자신의 꿈을 부끄럽게 고백하는 송전탑 아래 두 사람의 데이트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사무치게 아름다운 씬이 될 자격이 있다. 결국 이들의 플롯은 춘식이 김회장을 살인미수하는 마지막 장면을 향해 돌진하는데, 버림받은 아이처럼 자주 울컥하던 춘식의 영화 속 마지막 얼굴이 카메라를 향해 죽을 듯 울부짖는 클로즈업이라는 사실을 적용시켜보면, 온통 공사판인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산중턱이나 높은 언덕에서 자주 만나 속마음을 주고받던 이 두 사람이야말로 영화의 진짜 심장이나 다름없다는 생각과 마침내 만나게 될 것이다. 
 
바람불어 좋은날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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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김성찬이 연기한 ‘길남’은 여관에서 일하며 근처 미용실 직원 진옥과 연애하는 청년이다. 그의 꿈은 언젠가 평등하게 누구나 입장할 수 있는 호텔을 여는 것이며, 아예 어리숙하거나 자주 울컥하는 다른 두 친구와는 달리, 길남은 세속적이면서도 대체로 긍정적이고 매사에 웃고 다니며 가끔 실없다. 그의 플롯은, 자신이 결혼상대로 생각해 맡겨둔 돈을 진옥이 들고 도망치자 망연자실하고 결국 군대에 끌려가는 것이다. 여기서 ‘끌려간다’는 표현은, 영장이 나왔다는 사실을 모든 희망이 사라졌고 결국 다 끝나버렸다는 듯 오열하며 말하는 장면이 숨기고 있는 감정에서 짐작가능하다. 
 
바람불어 좋은날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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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식은 감옥에 갔고, 길남은 입대했으며 덕배는 권투선수가 되었다. 아니, 춘식이 감옥에 갔고, 길남이 군대에 끌려갔기 때문에 덕배가 권투선수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들이 스치듯 만나고 헤어졌거나 온 마음을 바쳐 사랑하고 미워했던 이웃들도 있었기에 더욱 더 그는 권투선수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으리라. 영화의 이야기가 끝나고 그 안의 인물들도 모두 퇴장한지 거의 40년이 다 되어가는 2018년의 지금, 그들은 여전히 서울에 살고 있을까. 그 사람들은 어떤 현재를 보내고 있으며,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까. 무엇보다, 아직까지 서로 만나는 친구사이일까. <바람 불어 좋은 날>은 볼 때마다 그런 궁금증들을 남기는 영화로 매년 나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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