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최후의 증인: 5월의 영화 이두용, 1980

by.정한석(영화평론가) 2018-05-17조회 3,019
최후의 증인

이두용의 영화 <최후의 증인>의 결말은 의아하다. 모든 사건이 마무리되고 주인공인 형사 오병호(하명중)도 수사 과정 중 범했던 살인 죄목으로 체포되어 이제 법의 심판대에 서야 할 처지다. 하지만 오병호의 살인은 스스로의 주장처럼 정당방위에 해당하므로 법은 그의 편이 되어 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그가 그다지 낙망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그 때 오병호는 사람들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강가의 갈대숲으로 홀린 듯이 걸어 들어가더니 입안에 총부리를 넣고 급히 방아쇠를 당겨 자결한다. 그리고 영화는 종료된다. 그러니까 이것이 의아하다. 아니, 의아해서 흥미롭다. 오병호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하는가.  

감독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사람을 보호하려고, 약자를 보호하려고 했던 자신의 피땀 어린 노력이 결과적으로 그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그들의 아픈 상처를 파헤쳤다는 자책, 자신을 포함해 그 어느 누구도 그들을 보호해주지 않았고 보려고조차 하지 않았다는 자책과 속죄”

오병호가 살인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한국전쟁 중 있었던 황바우(최불암)와 손지혜(정윤희)의 억울한 사연들이 속속들이 드러난다. 그리고 오늘날의 살인 행각도 그들의 자식인 태영이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벌인 사건이었음이 밝혀진다. 하지만 태영은 이미 미쳐 버렸고 태영의 죄를 대신하여 용서를 빌며 양아버지 황바우가 자살하자 손지혜도 남편인 황바우를 따라 자살해버린다. 오병호는 사건을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또 다른 비극을 만든 것이다. 그러니 감독의 설명은, 이 복잡하고도 비극적인 상황 앞에서 무력감과 죄책감을 느낀 나머지 오병호가 인간적 자책과 속죄의 행위로써 자결했다는 것이다. 
 
최후의 증인

물론 그러한 인과에 따른 결과라는 점을 추정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런데 우리에게 의아하고도 흥미로운 것은 서사적 무리를 감수하고서라도 반드시 그 인과를 납득시키려는 이 영화의 감정적 자세와 강도다. 이를테면 자신에게 하달된 업무를 이행했을 뿐인 일개 형사가 의도치 않은 죽음들의 속출 앞에서 도덕적으로 괴로워할 수는 있다 해도 정녕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극단적 행위로 속죄를 결행해야만 하는 것인가 하고 누군가는 또 반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최후의 증인>의 결말부 오병호의 자결은 이 영화가 모종의 도덕적 과잉 상태에 진입해 있음을 여실히 시사한다. 그러니 여기서의 핵심은 이 도덕적 과잉의 상태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가 된다. 이 사태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관객에게라면 우리가 의아하다고 표현한 도덕적 과잉은 더없이 흥미로운 무엇이 될 것이다. 

요컨대 <최후의 증인>의 무엇이 우리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인가 질문할 때 그 흥미로움을 자아내는 활동의 요체는 사실상 전쟁이라는 비운의 역사나 그 참혹하게 뒤엉킨 복수극 혹은 한 여인의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수난의 연대기(손지혜) 혹은 천하고 낮은 신분을 지녔으나 더없이 선한 한 남자의 억울한 옥살이(황바우) 같은 것에 있지 않다. 핵심은 진흙탕 같은 과거사와 관계 속으로 몸소 휩쓸려 다니는 동시에 관객인 우리 또한 끌고 다니는 오병호의 난처한 활동에 있으며 그 활동 중에 일어나는 그의 심정과 감정의 비극성에 있고 그 비극성을 통해 겪어지는 오병호라는 인물의 존재론적 변화 과정에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자 오병호의 자결은 그렇게 변화되어간 존재의 최종적이면서도 불운한 선택에 해당된다. 이렇게 더 줄여 말할 수도 있다. <최후의 증인>의 흥미로움은 오병호라는 인물의 존재론적 변주에 있다.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다음과 같이 다른 각에서 진입해 보아도 사태는 유사하다. 따지자면 <최후의 증인>의 영화적 매혹은 이두용의 영화가 예의 성취해내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특별한 미장센이나 시각적 운동성 등에 있지 않다. 그러한 점들은 <경찰관>의 초반부, 빗속의 두 경찰관과 장대 같은 빗줄기, <장남>의 결말부, 아파트 꼭대기에서 붉은 천에 쌓여 공중에 뜬 채로 크레인에 실려 위태롭게 위에서 아래로 휘청거리며 내려오는 관,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의 중반부, 방안에 잠시 우두커니 서서 주요 사물들과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뤄내는 한 여인의 육체적 형상, <피막>의 종결부, 불길하면서도 활기찬 마지막 움막의 화재 장면 등에서 훨씬 더 뛰어나다. 

<최후의 증인>에서 압도적인 것은 시각적 요인들이 아니다. 비밀과 사연과 비극의 힘으로 철저하게 전개되는 내러티브 연쇄성과 그 연쇄 안에서 심리적 긴장감을 느끼는 주인공 오병호의 방황이 이 영화의 압도적인 면모다. 오병호는 여기서 질문이라는 사유의 활동 자체이며 이리저리 차이고 건네지는 감각의 공일뿐만 아니라 거대한 내러티브를 자신의 훼손되어 가는 몸과 정신으로 짓고 꿰어 나가는 매개자다. <최후의 증인>에서 여기서 저기로 이동해가며 운동하는 것이 있다면 혹은 스스로 변해가는 것이 있다면 그게 바로 오병호의 존재다. 때문에 그는 형사로 시작하지만 형사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마감된다. 
 
최후의 증인

오병호의 존재에 대해서는 사실 처음부터도 잘 알 수 없다. 다른 부하가 아니라 그가 왜 이 사건을 맡아야 하는가에 관하여 설명하는 서장도“누군가는...”이라는 납득할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오병호 자신도 여기에 뚜렷한 확신이나 반문을 갖지 않는다. 예컨대 오병호에 관하여 인상적으로 특별히 흥미로운 건 그가 적어도 여느 경찰이나 형사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그는 때때로 날렵한 형사가 아니라 예민한 기자처럼 보이는 것이 아닌가. 영화도 이와 같은 점을 얼마간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오병호에게 호감을 느끼는 초등학교 교사가 그의 외양을 두고 “미남”이라고 칭찬하면서“경찰 같지가 않아서 그래요”라고 말하는 것은 흘러가는 대사로만 보기는 어려운 부분이다. 

더하여 오병호가 정말 유능한 경찰이나 형사라면 그는 사건을 그렇게 추적해 나가선 안 되었을 것이다. 양조장 주인의 죽음으로 가장 크게 이득을 갖게 되는 자는 누구인지, 살인 사건의 현장에는 정확히 누가 있었는지 등 흔히 우리가 범죄 수사물의 클리셰로 보아온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의문과 수사 과정들이 여기에는 거의 없거나 뒤늦다. 대신 오병호가 집중하는 일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회고를 따라가고 채록하는 것이다. 오병호는 묻혀 있던 과거사를 캐낸다. 대개 그가 만나는 관계자는 살인 사건에 직접적으로 결부된 용의자나 증인들이 아닌데다가 그들로부터 듣는 것은 사건에 대한 긴밀한 증거라기보다는 참혹한 역사의 한 부분이어서 그가 행하는 일은 살인 사건에의 탐문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를 탐문하는 일이 되고 있으며 때문에 그는 형사가 아니라 어느 지역 주민들의 소사를 연구하는 역사가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오병호는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들을 두고 그렇게 오래오래 돌아서 간다. 그가 형사로서 얼마나 무능한 자인지는“손지혜는 살인 같은 걸 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단정 짓는 것에서 가장 확실히 드러난다. 그는 사실관계가 아니라 자신이 한 인간에게서 마음으로 느낀 인상과 인성에 추론의 근거를 둔다. 그러니 그는 얼마나 무책임한 탐문관인가. 그는 더 이상 형사가 아닐뿐더러 사실을 챙겨야 하는 저널리스트의 성격조차도 포기하고 소사를 기록하는 역사 기술자의 행위에서도 주춤한다. 그가 점점 더 중시해 가는 것은, 가령 손지혜에게서 그러한 것과 같이, 그의 눈앞에 있는 인간들에게서 느껴지는 막연한 도덕성이며 동시에 그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의 도덕성이다. 그 때문에 그는 때때로 지극히 혹은 과잉적으로 괴로워하거나 분노에 가득 찬다.  
 
최후의 증인

예컨대 황바우를 모함한 한동주의 동생을 취조하는 장면에서 그의 과잉된 분노를 우린 접하게 된다. 오병호의 자결에 관하여 던졌던 같은 질문을 이때에도 할 수 있다. 가령, 오병호는 왜 저토록 분노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형사도, 기자도, 역사가의 기질도 이즈음 모두 사라진다. 영화의 후반에 이르자 오병호는 마치 도덕이라는 종교에 몰두하고 헌신하는 하지만 다소 광신적이어서 폭력적 수행을 일삼기도 하는 그런 종교 수행자의 모습을 갖춘다.

오병호에 관하여 경찰서장이 지나치듯 했던 말에서 몇 가지를 뽑아 요약 연결해야만 하겠다. “그는 거대한 뜻이 있는 사건을 수사 중이고 그건 우리 모두가 책임 져야 할 문제이지만 대신 그가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병호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는“이 사건은 제가 꼭 해결하고 싶습니다” 하면서 다 부서져 가는 몸을 추스른다. 하지만 실상 오병호는 해결할 수 없고 단지 떠맡을 뿐이다. 오병호는 해결 불가능한 미욱한 인간 세계의 비극을 맹렬한 종교적 신념으로 기꺼이 떠맡아 흡수하려는 일종의 성자의 자세를 자처하게 된다. 하지만 이 성자는 완결하지도 무결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히스테릭하다. 그는 이미 병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러티브의 예상치 못한 격전과 혼란 속에서 오병호라는 인물의 존재는 시시각각 변주를 거듭해가다가 마침내 어떤 병적인 성자라는 기묘한 부정합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최후의 증인>은 마침내 그 병적 성자의 탄생과 그의 히스테릭한 순교라는 최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영화의 결말부에서 갑작스럽게 행해지는 그의 자결은 단순히 가여운 이들에 대한 혹은 자신 때문에 또 다른 피해를 겪은 이들에 대한 순진한 속죄나 책무로만 말해지기는 어려운, 저 스스로 심각할 대로 심각한 존재론적 다각화의 변주를 겪어나간 결과 마침내 병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어느 성자의 자리에 스스로를 세운 오병호라는 인물의 히스테릭한 도덕적 경련이며 자해적 순교다. 

역사의 비극 앞에서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며 숨겨진 진실을 자신의 몸과 정신에 새겨 오던 오병호라는 내러티브적 공은 부풀대로 부풀어 팽창한 뒤에 마침내 스스로 터져 버리기를 택한 것이다. 그러니 뒤집어 말하면, 오병호라는 이 공의 모양새가 변하고 팽창하여 마침내 터져 버릴 때까지 속절없이 몰아 나아가며 견딜 수 없는 지경까지 만들어 버리는 그 긴장감의 강도, 그것이야말로 <최후의 증인>의 진정한 매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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