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4월의 영화: 육체의 약속 김기영, 1975

by.박인호(영화평론가) 2018-04-09조회 7,362
육체의 약속

김기영 감독이 유일하게 타인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육체의 약속>(1975)은 이만희의 <만추>(1966)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두 영화를 나란히 놓고 생각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만추>에 대해 구전되거나 활자로 남아 있는 증언, 듬성듬성 모인 자료집, 김지헌의 시나리오를 성실하게 꿰맞추어도 온전한 ‘영화’로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육체의 약속>은 <만추>를 원전으로 삼은 네 편의 영화 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태도로 한시적인 상황과 속박된 두 육체가 부여잡은 정념을 해체한다. 살인죄로 수감된 여성, 그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 짧은 여정에 불쑥 끼어든 남성과의 만남과 헤어짐은 김기영의 말처럼 ‘원작의 30%만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것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제한적인 상황으로 인해 더욱 애틋할 수밖에 없는 감정의 변화나 욕망과 약속 사이에 남겨진 스산한 정조와 무관하게 여성을 해부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김기영은 왕성하게 욕망하고 발산하기에 급급한 남성의 육체와 그들의 뻔뻔한 요구(자손번식과 양육)로 인해 피폐해진 여성의 수난기를 심판대에 올려놓는다. 
 
육체의 약속

기차 안에서 간수(박정자)와 젊은 남성(이정길)은 피해망상 혹은 남성혐오증에 걸린 여성(김지미)에게 인간성을 회복시킬 방안에 대해 논쟁한다. 또 간수는 죄인에게 베풀어져야 할 휴머니즘을 실행하기 위해 형사들을 설득한다. 즉 여수를 향해 달리는 기차 안은 굳게 입을 닫은 살인자와 그녀를 옹호하고 보호하는 간수의 말이 공존하고, 법을 어긴 자에 대한 막연한 증오가 끼어든다. 죄에 대한 형벌로서의 사형에 대한 의견이 충돌하고, 살인과 강도라는 범죄 행위에 대한 냉소가 흐르며, 자살보다는 삶을 택해야 한다는 회유가 넘나드는 말의 싸움터가 된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는 형사와 간수라는 법의 수호자/집행자가 선의를 베풀고 죄인들(젊은 남자 또한 죄인이 되었다)을 교화시킴으로써 세상이 아직까지 믿을만하며, 죽음보다 삶이 더 낫다고 믿도록 만드는 담합의 현장이 된다. 기껏해야 죽음을 유예시킬 뿐이지만 그들은 죄인에게 관대함을 베풀어주고, 그들이 살아갈 명분을 제공하기 위해 약속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모든 사건의 중심인물인 여자는 무력하게 창밖을 응시하거나 간수가 입에 넣어주는 분홍 사탕을 받아먹을 뿐, 어떠한 항변도 하지 않는다. 간수는 어머니/변호인처럼 그녀를 외부로부터 보호함과 동시에 자신의 법으로 길들이고, 그녀는 양순한 아이처럼 고분고분하게 망각의 도구로 제공되는 사탕을 오물거린다. 김기영은 왜 주인공을 이토록 무력하게 남겨두었을까. 그녀를 무화시키기로 작정한 것처럼 표정과 목소리마저 빼앗은 것일까. 김기영은 듬성듬성하고 불균질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주인공의 몰락을 따라가다가 최후의 순간이 되어서야 그녀를 삶의 영역으로 돌려보낸다. 감독은 그녀의 삶을 매혹적인 육체로 인한 고난과 약속으로 인한 구원으로 축약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육체를 드러내는 방식과 약속을 보여주는 방식이 확연히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김기영은 뻣뻣한 얼굴과 무력한 육신의 표면에 머무름으로써 오히려 그녀를 살거나 죽게 만들 약속의 힘을 상기시킨다. 목소리-말의 내용, 표정-감정은 빈약하고 메마르지만, 약속은 의지를 들끓게 만들 위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교도소에 이르러서야 뚫고 나온 그녀의 간절한 표정과 거친 절규에 우리는 압도당한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더 나아가 그녀에게 주어진 현재의 삶으로 그녀를 돌려보낸다. 김기영은 강력한 영화적 표현을 과감하게 마감시키고 김지미라는 배우의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를 포기한다. 대신 마지막 쇼트를 통해 불멸의 삶, 약속으로 인해 가능한 삶을 붙박아둔다.  
 
육체의 약속

영화의 도입부를 살펴보자. 첫 쇼트는 한 테이크로 촬영되었고 누군가의 시선을 따라 펼쳐진다. 증기를 뿜어내는 기차에서 시작한 눈의 운동은 줄지어선 기차들, 복잡하게 얽힌 선로, 빈 플랫폼, 역사 너머로 보이는 도시, 높낮이가 다른 빌딩들과 막 지어지고 있는 대우 빌딩의 철근 구조물에서 멈춘다. 이어지는 쇼트는 택시에서 내리는 가족의 모습인데 주인공은 멀뚱하게 서 있는 남편과 매달리는 아이를 떼어놓고 역으로 향한다. 이 두 쇼트는 영화의 마지막 쇼트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여성의 고난-반항-억압-순응-죄-감시-교화-망각-삶에 대한 각성을 포착한다. 첫 쇼트에 등장한 시선의 주체는 냉정하고 차분하게 그녀의 삶을 관찰하는 감독이다. 마지막 신에서도 동일한 태도로 공간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의 시선에 그녀는 포착되지 않는다. 주인공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역이라는 장소가 그녀의 삶을 지탱하고 있음을, 죽음에 사로잡혔던 그녀가 살아있기에 약속을 지킨다는 행위가 가능함을 각인시킨다. 

그녀가 기차에 오른 후부터 액자구조로 플래시백이 시작된다. 서사는 현재(기차를 타고 떠난다)-대과거(그녀의 수난사)-과거(여수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만난 남성과 동행한 간수와의 사건)-다시 현재(서울로 돌아온다)로 복귀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녀가 1인칭 내레이션을 통해 반추한 삶에 따르면 그녀의 육체가 소진되고 착취되는 과정은 대과거에 머물러 있고, 과거와 현재는 그녀가 한 약속(과거와 현재)이나 그녀에게 한 약속(과거)을 따라 구성된다. 흥미로운 것은 ‘서울역-도심 한복판-모든 기차의 출발지와 도착지’라는 물리적인 실체가 ‘여수-어머니 무덤-약속이 맺어진 장소’라는 관념보다 더 중요하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지독히 특징 없는’ 남자와 그의 딸에게 하루의 시간을 약속하고 여수로 떠난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나타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약속이기 때문에’ 그곳에 가야만 하고, 무용함을 알면서도 기다려야 한다. 삼 년 째 반복되는 여정의 시작과 끝 모두 덧없는 약속에 포위되었으며, 발버둥을 치며 살아가고 온 힘을 다해 기다린들 그는 나타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 사실을 기어이 확인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여자는 다시 떠나기 위해 서울역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남자가 시계를 채워주면서 한 약속(“6시까지 돌아오면 약혼과 결혼, 임신을 한꺼번에 해버리자”)과 간수가 자살로부터 그녀를 구해내기 위해 제안했을 법한 여수로의 여정보다 이것이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스스로 부여한 삶과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삶을 지탱해나가는 순수한 목적으로서의 약속은 숭고하며, 골몰하던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순응과 망각마저 발악하듯 벗어던진 삶의 의지도 존엄하다. 또 무수한 ‘개새끼들’로부터 벗어나 ‘선택의 자유’를 행한 그녀가 과거의 것들과 결별하는 방식이기에 감동적이다. 
 
육체의 약속

영화의 마지막은 현재에 충실한 그녀, 그렇기 때문에 해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떠나 새벽에 도착하는 그녀, 순수하지만 무용하고, 의미로 풍요로워지기보다 약속을 지킨다는 행위에 온전히 바쳐진 시간만을 탐닉한 그녀, 그리하여 자신과 약속을 응시하는 그녀의 현재만이 반복되는 곳에서 멈춘다. 마지막 신은 철로로 들어오는 기차, 기차들이 서 있는 선로에서 줌아웃하면 서울역과 대우빌딩이 보이는 두 쇼트로 구성된다. 도입부에서 김기영의 카메라는 인물보다 먼저 역에 도착해 있고 기차와 어지럽게 얽힌 선로, 도시를 바라보았다. 이 시선에 담긴 것은 오로지 기차들과 빌딩들이고 사람의 흔적은 대우 빌딩 건설현장 멀리 보이는 노동자 두어 사람뿐이다. 기차를 탈 사람과 그가 지닌 사연보다 기차가 향하거나 멈추는 곳, 출발을 기다리는 기차의 행렬, 곧거나 휘어진 선로들의 얽힘, 배웅하거나 마중하는 사람들이 없는 플랫폼의 스산한 공기, 역을 빠져나가자마자 만나게 되는 도시의 빌딩들이 주인공 같다. 마지막 쇼트를 바라보는 카메라도 주인공을 마중하기보다 서울역 건너편의 건물을 오래도록 바라볼 뿐이다. 떠남의 끝과 돌아옴의 끝을 모두 도시의 빌딩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육체의 약속>의 시작부터 끝까지 완강하게 지켜온 김기영의 기이한 결단, 타협하지 않는 그의 시선처럼 보인다. 또 가로막힌 담벼락과 철문을 향해 온몸을 던진 그녀의 외침, 피폐한 삶을 뚫고 나온 ‘기다린다’는 그녀의 약속을 완결 짓는 김기영의 제스처 같다. 그는 주인공의 육체로 인한 고난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기억하고, 찾아가서, 기다린다는 행위가 그녀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삶이 있기에 약속이 행해지고, 약속 때문에 시간을 부여잡고 살아야 한다는 다짐이 갱신되는 곳은 역사가 아니라 도시 어딘가 여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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