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장준환, 2013

by.박유희(영화평론가) 2018-03-20조회 7,820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살부(殺父), 가장 급진적인 정치성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는 <지구를 지켜라>(2003)로 한국영화사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며 등장한 장준환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지구를 지켜라>는 평단의 압도적인 지지와 마니아 관객층의 형성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결과를 낳았는데, 하나는 이 영화가 ‘저주받은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준환 감독이 그 후 10년 동안 장편영화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장준환 감독이 그야말로 “또라이 미친 영화”1)를 기획하다 10년 만에 내놓은 영화가 <화이>였다. 이 영화는 당해 비수기였던 10월 초에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으로 개봉하여 239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2) 평단에서도 나쁘지 않은 평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큰 주목을 받지는 못한 채 애매하게 남은 면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한국영화사상 가장 급진적인 영화에 속한다. 그 이유는 주인공인 프로타고니스트가 아버지를 살해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적(賊)의 간악함을 폭로하기 위해 살부가 재현되는 일은 있었으나, 관객이 호감을 가지고 공감하는 주인공이 그것을 행한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이 영화에서 주인공 소년 화이(여진구)는 친부뿐 아니라 양부들, 그리고 개발독재의 수괴까지 모든 아비를 죽인다. 요컨대 <화이>는 아비를 정조준한 영화라 할 수 있다.  

<화이> 이전 한국영화사에서는 아버지에게 역사적 책임을 묻고 그들을 제대로 처벌한 적이 없다. 근대 식민지가 되며 전근대에 속한 아버지는 무능한 존재로 전락했다. 이후 근대 문명의 세례를 받은 아버지는 무책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개인의 방탕으로 가산을 탕진하든, 독립운동에 투신하든 결과적으로 가족에게 무책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부장제와 환유적 관계를 이루는 전근대 유교체계나 근대 민족의 주권이 붕괴되고 훼손된 상태에서 아버지가 자리할 곳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식민지 조선영화에서 아버지는 병자로 재현되곤 했다. 해방 이후에 잠시 민족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투사로서의 아버지가 출현하기는 했으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그 현실적 의미는 다시 무색해졌다. 전후세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비를 부정하는 유럽의 젊은이들과 공감했다. 그러나 농경을 기반으로 하여 유교적 가부장의 전통이 수백 년 동안 지속된 사회에서 아비에게 반항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고 전후 영화에서 아버지는 부재한 것으로 처리되는 정도였다. 

전후 재건이 본격화되고 민주적인 자유와 평등보다는 당장의 가난을 구원해 줄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해지면서 한국영화에 다시 아버지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개 무능하고 무책임하지만 근대 엘리트가 된 자식의 ‘효심’에 의해 소환되었다. 자식 세대는 전근대적 가치[孝]로 아버지를 존중하며 근대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가부장을 꿈꾸었다. 이로써 아비 세대에 대해 식민지화와 전쟁의 역사적 책임을 묻는 일은 제대로 질문도 해보지 못한 채 봉합되었다. 이후 재건의 리더십이 다른 가부장을 허용하지 않는 폭력으로 전개되자 청년 세대는 폭력적 가부장에 의해 살해되거나, 순응하면서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 속에서 ‘가학-피학’의 경험은 합리화되고 피학이 가학으로 전승되는 질긴 고리가 형성되었다. 
 
<군번 없는 용사>
<군번 없는 용사>

한국영화에서 그 고리를 끊는 시도로서의 의미를 갖는 ‘살부(殺父)’가 재현된 것은 이만희의 <군번 없는 용사>(1966)에서였다. 이 영화에서 국방군 유격대 대장을 장남(신영균)으로, 인민군 장교를 차남(신성일)으로 둔 아버지(최인현)는 장남 편에 서다가 차남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때 차남은 반공주의가 권장하던 일반적 인민군의 표상, 즉 단순한 패륜과 악의 범주에서 벗어나며 깊은 고뇌를 보여주어 반공주의의 이분법 도식뿐 아니라 부자관계의 재현 면에서도 작지 않은 균열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영화가 별 문제 없이 검열을 통과하고 개봉했다는 것은 공산주의의 만행을 고발하는 반공영화의 맥락에서 이해되었음을 말해준다. 역설적이게도 반공영화이기에 극단적인 재현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3) 

<군번 없는 용사>가 나온 지 47년 만에 나온 영화 <화이>는 질풍노도와 같은 사춘기 소년과 범죄자 양부들이라는 설정을 통해 살부를 구현한다. 주인공 화이는 어린 시절 자신을 유괴했던 ‘낮도깨비’라는 범죄 집단에 의해 길러진 아이다.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친부모에게는 치명적인 고통을 안긴 이들이 양육자이기도 하다는 아이러니는 이 영화의 기본 구조를 이룬다. 그것은 주인공의 이름에서부터 드러난다. 화이는 ‘화(火)’에서 쉽게 연상되는 불의 이미지 때문에 강렬한 이름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이 이름은 반전의 의미 또한 내포한다. 그의 이름은 소년이 어린 시절 유괴되어 숨겨진 장소가 화이목 아래였다는 데에서 유래했는데, 사전적 의미로 화이(和易)란 ‘온화하며 까다롭지 아니하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화이는 본성 면에서는 바로 그런 아이, 사철나무처럼 변함없이 푸를 것 같은 아이다. 그러나 그가 유괴되고 적의 손에 양육되었다는 것에서 이미 화이에게는 분노와 복수로 타오를 불씨가 잠재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불씨는 어떻게 타오를 것인가? 이 영화는 이러한 질문을 관객과 공유하며 전개된다. 그리고 이 영화가 선택하는 방식은 파격적인 정면 돌파다.   

화이에게는 6명의 아비가 있다. 생부(이경영)와 5명의 양부가 그들이다. 5명의 양부는 낮도깨비 조직의 5명의 범죄자들, 리더 석태(김윤석), 브레인 진성(장현성), 스나이퍼 범수(박해준), 사이코패스 기술자 동범(김성균), 말더듬이 드라이버 기태(조진웅)이다. 화이는 제도 교육에서 벗어나 그들에게 온갖 범죄 기술을 전수 받으며 성장한다. 그럼에도 화이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어둠을 두려워하는 여린 소년이다. 그는 어둠 속에서 괴물을 보곤 하며 미칠 듯한 두려움 속에서 괴로워하는데, 석태는 오히려 그런 화이를 지하실에 가두고 괴물을 대면하라며 학대한다. 이는 화이를 자신과 같이 만들고자 하는 석태의 집착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집착을 괴물이 되어 버리면 괴물이 두렵지 않다는 경험적 ‘교육’ 논리로 합리화한다. 이는 ‘하면 된다!’ 식의 개발독재기 극기 교육을 상기시킨다. 

석태는 진성이 화이를 유학 보내려고 하자 화이로 하여금 생부를 살해하게 하여 원죄의 굴레에 밀어 넣는다. 매우 극단적인 전개이지만 한국영화사에서 부모가 자식을 어쩔 수 없는 지경에 몰아가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심청전>(1925/1937/1956/1985)의 심봉사, <무정>(1939/1962)의 박진사(영채의 부친)는 자신의 안위나 신념을 위해 딸을 팔거나, 파는 것을 묵인했다. 그러면 <사도세자>(1956), <사도>(2015)의 영조나, <연산군>(1961/1987))의 성종은 어떠한가? 또는 <황야의 독수리>(임권택, 1969)나 <서편제>(임권택, 1991)에 나오는 아비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모두 자식을 죽음이나 광기로 떠밀었다. 그럼에도 아비의 폭력은 ‘자식이 아비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다’는 식으로 모호하게 정당화되곤 했다. 이러한 정당화에는 아버지가 그르다 해도 자식이 아비를 거스르는 것은 패륜이라는 묵은 합의가 저류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아버지 대신 자식이 속죄양이 되었고, 이로써 텍스트는 아슬아슬하게 봉합되곤 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화이>는 다르게 대응한다. 바로 아버지들을 모두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들을 죽이는 순서가 의미심장하다. 화이는 생부(生父)를 시작으로 진성, 범수, 동범, 기태, 석태의 순으로 죽인다. 그런데 화이가 생부를 죽이는 일이 석태의 음모에 빠져 아무것도 모르고 한 것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화이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게 되고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벽장에 숨어있는 엄마(서영화)를 석태로부터 보호하기도 한다. 석태가 임형택(이경영)이 생부임을 말하지 않은 채 그를 쏘라고 명령했을 때 생부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은 “너 혹시?”였다. 이 말을 듣자마자 화이는 정신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나중에 경찰관들이 참혹한 현장을 보고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이라 추정하는 것은 화이의 위기 심리―눈앞에 선 이가 자신의 현(現)존재 기반을 뒤흔드는 인물임을 감지하고 그것을 강하게 부정하려 했음―를 말해준다. 그러기에 화이가 가장 친부에 가까웠던 아버지, 자신에게 음악과 교양을 가르치고 유학까지 보내려 했던 진성을 생부 다음으로 죽이는 것은 필연적인 전개이다. 모범적인 목사였고 유괴당한 화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던 생부를 살해하는 순간 화이가 디뎌야 할 기반과 지켜야 할 경계는 모두 무너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화이를 향한 다른 아비들의 위기감을 고조시켜 화이와 반목시키는 측면에서도 이는 효과적이었다. 사격과 각종 범죄기술을 가르친 기능적 아버지인 범수와 동범은 진성이 화이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안 순간 화이가 자신들을 보다 쉽게 죽일 수 있음을 감지하고 화이를 잡는 데 매진할 수밖에 없다. ‘액션 스릴러’라는 장르 관습에 충실하게 두 아비는 화이가 불러들인 그들의 적에 의해 처치된다. 그리고 화이가 마주하는 아비는 기태다. 그는 가장 감정적이고 즉자적으로 화이를 사랑하는 아비이다. 유괴된 화이를 제일 먼저 안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말을 더듬는다는 것은 그가 본능적 온정에 움직이는 인물임을 드러내는 표지다. 그런 면에서 그는 관습적인 모성성을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화이를 차마 해치지 못하고 화이도 그를 죽이지 못한다. 그는 화이가 올라간 고층 철조물에서 떨어져 죽는 것으로 처리된다. 그런데 기태의 죽음을 보여주는 것에서 이 영화의 태도가 드러난다. 화이의 손을 잡고 허공에 매달리게 된 기태는 “아빠가 미안해”라는 말을 남기고 화이를 살리고자 스스로 화이의 손을 놓는다. 이때 카메라는 기태의 시선으로 추락하는 그를 끝까지 추적하여 철근이 솟아난 콘크리트 바닥에 그가 떨어져 온몸이 뚫리는 것을 관객으로 하여금 감각케 한다. 그리고 석태의 시선으로 그의 참혹한 죽음을 확인 사살하듯 목도케 한다. 이는 감각적 충격에 대한 영화적 탐닉이기도 한데, 그것이 가장 온정적인 아비 죽음을 보여주는 데 발동되었다는 것은 찌른 칼의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이 영화의 의지를 드러낸다.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스틸

화이가 기태를 죽이는 것을 본 석태는 화이의 생모를 찾아가 죽인다. 그리고 자신은 화이만 있으면 된다며, 화이에게 이젠 다 끝났으니 힘들었던 일은 자신이 다 정리해 주겠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석태의 왜곡된 열망과 집착이 결국 아비로서의 정체성을 구성했음이 드러난다. 그는 총을 든 화이에게 묻는다. “자 누굴 쏠 거야? 아빠야? 괴물이야?” 그러자 화이는 ‘괴물 아버지’ 석태를 쏜다. 여기에서 영화가 끝났다면 화이가 ‘괴물을 쏜 아이’나 ‘괴물이 된 아이’는 될 수 있어도 ‘괴물을 삼킨 아이’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삼킨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입에 넣어서 목구멍으로 넘김으로써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괴물에 대한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도 괴물이 되는 것이 괴물에 대한 주체의 복속이라면, 괴물을 삼키는 것은 주체에 괴물을 복속시키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에 화이는 신도시(명품 청화 골든시티)의 준공식에서 “싸악 밀고 도시를 새로 만든” 개발독재자 전회장(문성근)을 사살함으로써 ‘괴물을 삼킨 아이’임을 입증한다. 화이는 자신의 피학을 또 다른 약자에 대한 가학으로 전수하여 아버지와 같아지는 형태가 아니라 가학을 가해자에게 돌려줌으로써 ‘피학-가학’의 전승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다.  

2006년 <괴물>에서 2009년 <마더>로 이어지는 봉준호 감독의 작업이 한국 사회에서 왜곡된 모성을 문제 삼고 있다면, 장준환 감독의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는 아버지의 신화를 깨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적 짝패를 이룬다. 그런데 봉준호 영화가 제기하는 모성의 문제가 현재적이고 현상적인 차원의 것이었다면, 장준환이 내놓은 아비의 문제는 한국 사회의 지배구조를 형성하는 근본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보다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영화적 재현은 급진적이었다. 살부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허문 상태에서 간악한 적이나 광인에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라 눈 맑은 소년에 의해 리얼리티가 확보된 가운데 감행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나는 2000년대 한국의 주류영화시장에서 이보다 더 급진적인 영화를 본 적이 없다.
     
1) 《씨네21》 1136호, 2017년 12.26, 61면.
2)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통계정보 (http://www.kobis.or.kr/kobis/business/main/main.do) 참조.
3)  <군번 없는 용사>에 대해서는 박유희, 「살부의 윤리와 핍진성의 기율: <군번 없는 용사를 통해 본 이만희의 영화세계」, 『영상문화』 19호, 부산영화평론가협회, 2015.12, 10-25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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