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현해탄은 알고 있다: 3월의 영화 김기영, 1961

by.홍지로(번역가) 2018-03-15조회 6,310
현해탄은 알고 있다 스틸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1944년 현해탄을 건너 일본 나고야 시의 육군부대로 끌려간 조선인 학도병들의 고난을 그린다. 그중에서도 반항심이 강해 일찌감치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 주인공 아로운(김운하)은 일본 군인들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한다. 유일한 위안은 일본 여자 히데꼬(공미도리)와의 연분뿐. 하지만 그마저도 앗아갈 파병의 날이 다가온다.

안 봐도 어떤 영화인지 알 것만 같은 줄거리다. 조선의 청년이 고초를 겪는 과정에 비분강개하고, 그에게 반한 일본 여자의 ‘조국을 배반하는’ ‘올바른’ 연정을 응원하다가, 전쟁의 폭압에 짓밟히고 마는 둘의 섬약한 사랑에 눈시울을 붉히라고 만든 영화 아니겠나. 곧 시네마테크 KOFA에서 열릴 김기영 전작展 프로그램에서도 <현해탄은 알고 있다>를 “태평양전쟁과 일본 제국의 수탈에 대한 감독의 비판적 시각이 탁월하게 녹아든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관점은 얼마나 유효할까? <현해탄은 알고 있다>의 정치적 태도는 설명만큼 그렇게 뚜렷하지 않다. 적어도 민족적 수난에 대해 울분을 토해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손쉬운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정도는 아니다. 아로운의 병영 생활은 수난사라고만 말하기에는 헐렁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고, 히데꼬와의 관계는 ‘불온’하기까지 하다. 히데꼬가 일본 옷을 입은 아로운에게 “옷을 그렇게 입으니까 일본 사람과 다름이 없어요.”라고 말한다든지, 아로운이 파병 직전에 “히데꼬 상을 위해 훌륭한 일본 군인이 돼주고 싶어!”라고 말한다든지, 히데꼬의 어머니가 아로운 옆에서 일본 헌병의 칼을 맞아 쓰러지면서도 “일본은 진다! 난, 난 그게 보기 싫다!”라고 말하는 대목처럼 친일 영화의 기억을 환기하는 순간들도 있다. 하기야 인간의 사회적 외피를 발가벗기고 동물적 욕망을 들여다보는 데에 주력했던 김기영이 새삼 민족혼에 불타 ‘고통 받는 조선인들/사악한 일본 놈들’이라는 구도에 매혹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사실 관객의 감각에 호소하는 대립 구도는 따로 있다. ‘실내 세트 촬영분’과 ‘삽입 화면’의 대립이다. 영화의 도입부를 살펴보자. 첫 장면의 공간은 현해탄을 건너는 배 안이다. 바다는 보이지 않고, 실내 세트에서 촬영했음이 분명하다. 카메라가 선실들을 가로질러 격벽의 단면을 드러내면서 이곳이 실내 세트임을 공개한다. 이어 출렁이는 바다 위로 오프닝 크레딧과 “1944년 일본 나고야”라는 자막이 지나간다. 다음으로 나고야 항구를 수직으로 내려다 본 항공 촬영 화면이 등장하고, 나고야 시내 정경이 뒤따른다. 이 두 풍경은 보는 이를 움찔하게 하는 데가 있다. 우선 작은 실내 세트에 머물러 있던 영화가 갑자기 거대한 규모의 실외 공간을 항공 촬영이라는 사치까지 누리며 펼쳐 보이는 데에서 오는 충격이 있고, 이어서 동시대의 나루세 미키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본의 북적이는 시가지가 느닷없이 끼어든다는 데에서 오는 충격이 있다. 이후에도 이런 삽입 화면은 여러 차례 등장하면서 나고야 시의 정경을 보여주기도 하고, 전투 장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스튜디오 세트 촬영을 중심으로 하는 영화가 공간 배경을 제시하기 위해 로케이션에서 따로 찍은 화면을 삽입하는 것은 무척 흔한 수법이다. 대공황이나 전쟁 등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요약 전달하기 위해 다른 극영화나 기록 영화를 인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현해탄은 알고 있다>의 삽입 화면들이 유달리 도드라져 보이는 까닭은 실내 세트에서 촬영한 영화의 나머지 대목들과 잘 섞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 공간 배경을 제시하는 삽입 화면은 앞뒤 장면과 관련이 있기 마련이다. 스포츠 경기가 벌어지기 전에는 경기장 외관을 보여주고, 번화가의 술집에서 다툼이 벌어지기 전에는 시끌벅적한 도심 풍경을 보여주어야 자연스럽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이런 논리에 무심하다. 병영을 배경으로 한 장면이 끝나고 다음 장면도 병영을 배경으로 하는데 굳이 둘 사이에 고성의 전각이 우뚝 선 평화로운 나고야 시 전경을 삽입한다. 세트에서 찍은 유곽 장면이 끝나자 웬 절 풍경이 들어가더니 다음 장면은 히데꼬의 집이다. 유곽이나 히데꼬의 집이 절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세 공간들의 정조도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풍경이 삽입될 때마다 영화는 중단된다.

전황을 담은 삽입 화면도 맥락이 희박하기는 마찬가지다. ‘전황이 이렇게 전개되어 등장인물들에게 이런 변화가 찾아왔다’는 식의 서사적 흐름은 잘 짚이지 않는다. 더구나 이 삽입 장면은 전장을 담은 기록화면과 다른 전쟁 영화에서 가져온 듯한 명백한 연출 장면을 뒤섞어 파괴의 스펙터클을 전시하고 있어 한층 당혹스럽다. 문자 그대로 다른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다른 영화를 보는 장면도 있다. 아로운을 헌병대 본부로 호출한 헌병 대장은 돌아가는 길에 찬바라 영화를 보고 일본도가 얼마나 잘 드는지 확인하라고 말한다. 아로운은 정말로 극장에 가서 찬바라 영화를 보다가 견딜 수 없다는 듯 도중에 밖으로 나온다.

이제 앞서 ‘실내 세트 촬영분’과 ‘삽입 화면’의 대립이라고 했던 것을 다른 말로 고쳐 보자. ‘안’의 실내 세트에서 아로운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가 전개되는 사이사이 ‘다른 영화’가 무심하게 끼어들어 드라마 ‘밖’의 세계를 환기한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그 바깥 세계를 차단하려 애쓴다. 바깥은 위험해. 안에 있어야 해. 본디 대립 관계에 놓여야 했을 병영과 히데꼬의 집은 오히려 폐쇄적인 실내라는 점에서 닮았다. 히데꼬 집의 미닫이문이 창살처럼 닫히는 모습은 병영의 영창을 떠올리게 하는데, 여기서 영창은 수난의 공간이 아니라 피난의 공간이다. 영창은 아로운이 일본 군인들에게 반항하다 갇힌 뒤 동료와 웃음을 터뜨리는 곳이며, 영창에 들어가면 전쟁터에 가지 않아도 되니 살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실제로 포로로 붙잡힌 미군 병사들은 영창에서 밖으로 나가는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 그들을 탈출시켜 주었더라면 아로운도 일본군들의 함정에 걸려 죽었을 것이다. 갇힐수록 안전하다. 바깥은 위험하다.

어떻게든 미루어 왔던 안과 밖의 만남이 아로운의 탈영 결심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아로운의 탈영을 숨기기 위해 폭격으로 죽은 이름 모를 사람의 시체가 동원된다. 아로운과 히데꼬가 찾은 피신처는 아마도 폭격으로 무너졌을 공장의 폐허다. 병영과 히데꼬의 집을 오가며 느긋하다 싶을 정도로 통속적인 드라마를 전개하던 영화는 이제 순식간에 결말로 나아간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 스틸
 
그리고 바로 그 결말. <이어도>의 악명 높은 클라이맥스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이 말문이 막히는 결말은 직접 보아야만 하기 때문에 자세한 묘사는 피하겠지만, 에둘러서라도 말해 보자. 그간 애써 차단했던 바깥세상이 드라마가 진행되던 안전한 내부로 기어이 쏟아져 들어오고야 만다. 또는 답답한 실내 세트에서 전개되던 드라마가 갑자기 <독일 영년>을 방불케 하는 폐허로 나간다. 이 영화를 위해 미술팀이 준비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광대한 폐허다. 여기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묘사도 남다르지만, 일단 폐허의 정체에 관심이 쏠린다. 중간 중간 나고야 시의 풍경이 들어갔다지만 영화 전체를 일본에서 촬영했을 리 없다. 한국일 것이다. 대체 저긴 어디지? 왜 저런 폐허가?

그제야 <현해탄은 알고 있다>의 발표 연도를 찾아본다. 1961년 11월 개봉. 6.25가 끝난 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았다. 폐허는 전국에 흔했을 것이다. 그리고 개봉 한 해 전에 4.19가 있었고, 개봉 여섯 달 전에 다시 5.16이 있었다. 가능하면 안에 머무르고 싶었을 테지만 살기 위해 죽음의 공간으로 나간 사람들이 있었고, 너무 많은 시체들이 나왔고, 그 시체들을 제대로 수습하기 전에 세상이 또 뒤집혔다. 그리고 지난 글에서 김보년 필자도 언급했듯, 죽은 자들을 되살리는 것은 김기영의 장기다.

그러니 다시금 묻는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태평양전쟁과 일본 제국의 수탈에 대한” 영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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