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화려한 외출 김수용, 1977

by.김소희(영화평론가) 2018-02-20조회 5,294
화려한 외출 스틸이미지, 윤정희

<화려한 외출>에서 오프닝 시퀀스의 카메라 움직임은 기이하다. 한적한 도로를 지나는 승용차 한 대를 지켜보던 카메라는 이윽고 달리는 자동차에 들러붙어 탈 것의 시선으로 도시의 속도감을 전한다. 승용차와 함께 고층 빌딩 앞에 당도한 뒤에는 건물의 위용을 자신의 시야에 담으려는 듯 잠시 위를 올려다보고는 그대로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건물 앞에 미리 대기하던 일군의 무리는 마치 상사를 모시듯 깍듯이 에스코트한다. 카메라는 이제 하나의 캐릭터가 된 셈이다. 아직 한 번도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주인공의 시선을 카메라는 완벽히 대체한다. 집무실에 당도한 뒤에야 카메라는 시선의 주인인 주인공 공도희(윤정희)와 분리되는데, 그는 의외로 자그마한 여성이다. 의외성은 단지 여성 주인공이 관객의 남성화된 인식을 깨고 들어오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핸드헬드로 찍힌 카메라의 움직임은 인간의 시선을 대체하는 그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육중한 카메라의 무게감을 고스란히 떠안는다. 카메라의 시선은 그저 카메라의 시선일 뿐이다. 매끈하게 봉합된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누구의 시선으로 환원되지 않은 텅 빈 물체로서 카메라가 분명히 존재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주인공의 이름인 ‘공도희’는 어쩔 수 없이 비어 있다는 의미의 ‘공’(空)을 상기시키는데, 이는 카메라라는 물질성을 나타내는 이름으로도 적합하다. 카메라와 공도희의 시선이 합치되었을 때 카메라의 시선이 공도희의 시선을 대변한 것이라 자동적으로 인지하게 마련이지만, 어쩌면 카메라가 공도희에게 존재 재현을 위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텅 빈 물체로서의 카메라가 공도희의 시선과 일체화되는 순간에도 카메라를 존재화하는 건 공도희가 아니다. 첫 시퀀스에서 카메라를 에스코트하던 사람들이 그렇듯, 카메라 밖에서 카메라를 들여다보는 사람들이야말로 카메라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실체다. 이들은 내러티브상으로는 공도희의 기억과 시선에 비친 사람들이다. 그들은 때로 카메라를 향해 위협하거나 경계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존재론적인 이야기로 확장하자면 존재는 존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바깥에 있다. 공도희가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시공간 속에서 실종되었다가 다시 돌아와야만 했던 이유는 존재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정확히 보여주기 위해서다. 사람들이 다시 돌아온 공도희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설정은 단지 모호한 현실의 경계를 표현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애초에 공도희를 공도희로 만들었던 것도, 공도희를 다시 김명자로 만들었던 것도, 오직 그녀를 둘러싼 인물들임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세상에 외친 공도희의 마지막 말이 “나를 찾아주세요”인 것은 존재의 결정권이 타인에게 있음을 분명히 드러낸다. 

김수용 감독이 이러한 설정을 극단으로 끌고 갔다면 아마도 <트루먼 쇼>(1998)가 한국에서 먼저 탄생하지 않았을까 싶다. <트루먼 쇼>는 한 사람의 인생이 다른 이들을 통해 통째로 연출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화려한 외출>은 그것이 연출된 것인지, 공도희의 망상증인지, 꿈인지 현실인지 다만 모호하다. 영화가 공개되던 당시 메시지가 모호하고 연출이 미숙하다는 혹평을 불러오기도 했던 이 모호함은 더 파고들 필요가 있다. 영화에서 꿈과 현실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은 이유는 <화려한 외출>의 목적이, <트루먼 쇼>가 그렇듯 존재를 잃어버린 인물이 존재를 찾는 것에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존재와 비존재의 공존, 혹은 흔히 비존재라고 생각한 것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에 영화는 더 치중한다. 카메라라는 비존재의 시선을 분명히 드러낸 영화의 도입부가 단적인 예다. 

공도희라는 존재가 비존재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동안,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이 영화가 드러내려 한 비존재에 가까울 것이다. 영화 속에서 비밀스럽게 드러나는 존재는 공도희의 쌍둥이 자매다. 쌍둥이 자매는 공도희의 꿈에서 아기 무당으로 등장하는데, 그녀를 찾는 여정이 결국 한국 사회의 전근대성을 상징화한 공간으로 이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분명히 믿기 힘든, 비가시적인 존재라는 의미를 포함한 비존재들은 어쩔 수 없이 낙후되거나 뒤처진 것으로서의 전근대성에 포섭된다. 영화는 근대를 옹호하거나 전근대를 배척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근대의 어떤 측면을 강하게 옹호한다. 관련해 주목할 지점이 있다. 태아의 존재를 영화가 다루는 방식이다. 태아는 한번은 이미지로, 다른 한 번은 그에 관한 언급 속에서 드러난다. 전자는 상징적이고, 후자는 꽤 직설적이다. 공도희의 눈을 향해 줌인하던 카메라의 초점이 흐려진 자리에, 안구 단면을 연상시키는 자궁 속 쌍둥이 태아 이미지가 뚜렷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내러티브상으로는 공도희가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를 쌍둥이 자매를 상상하는 것이지만, 마지막 여성 지도자의 연설에서 드러나는 임신중절에 대한 분명한 거부야말로 그 이미지의 진짜 목적인 것 같다. 1970년대 산아제한의 명목으로 임신중절을 암묵적으로 허용하던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장면은 근대의 가장 중요한 표지로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꼽는 동시에 이것이 전통적인 여성의 업무라고 인식되어 온 임신, 출산에 끼칠 영향을 근심한다. 어쩌면 영화가 지닌 진짜 모호함은 특히 인텔리 여성의 등장을 둘러싼 근대에 관한 애매한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제목 ‘화려한 외출’은 공도희가 존재를 삭제당하는 동안의 부재를 ‘외출’이라고 표현하자, 신문 기자가 약간은 반어적인 의미로 뽑은 기사 타이틀이다. 공도희의 화려한 외출을 막는 것은 공도희에 반해 자신의 존재를 강변하는 그 모든 비존재다. 왜 이제 막 비존재에서 존재로 이동하려는 여성은 다른 층위의 비존재로서의 전근대에 사로잡혀 그것과 갈등하도록 강제되는가. 영화가 향해간 곳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쟁적인 지대다. 그런 의미에서 <화려한 외출>은 근대를 돌아보는 작품인 동시에 예언적인 텍스트다. 주체의 자리를 비워놓아 그 안에 누구든 자신을 대입해볼 수 있는 텅 빈 물체처럼 <화려한 외출>은 씁쓸한 의문점을 남긴 채 거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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