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작의 시대, 다작의 미술감독 노인택

by.안재석(영화사연구자, 영화감독) 2020-01-15
영화 촬영 현장을 배경으로 서있는 노인택
1937년 8월 1일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난 노인택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여 학교 행사 일을 도맡다시피 했는데,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중학교 시절 교장선생님의 소개로 1953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서울에서 도선장치기업사라는 장치, 이벤트 사업을 하던 이봉선의 집에 들어가 기거하면서 일을 하게 된다.
이봉선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돌아와 백화점 미술부에서 이벤트 행사를 담당하고 해방 직후에는 조선산업미술가협회 소속으로 작품 발표전에 참가하는 등 산업미술가로 활동하던 인물로, 1947년 계몽문화협회가 제작한 두 편의 영화 <윤봉길 의사>(윤봉춘)와 <삼일혁명기>(이구영)로 영화 미술에 뛰어들었다. 또한 그는 전쟁기에 대구 키네마극장에서 국극과 악극의 무대 미술을 하기도 했으며 서울로 돌아온 후에는 미도파백화점, 신세계백화점 등의 인테리어 복구를 도맡아 했다고 한다.
이후 노인택은 이봉선을 도와 예그린합창단 발표회, 이승만 대통령 생일축하연 같은 행사에서 무대 미술 작업을 하는 동시에 <운명의 손>(한형모, 1954)을 시작으로 <막나니비사(망나니비사)>(김성민, 1955), <처녀별>(윤봉춘, 1956) 등의 영화 미술 작업을 병행했고, 1956년부터 2년 간 일본 유학파 무대 미술가 김정환이 강의하던 동숭동 소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에서 청강하면서 응용미술을 배우기도 했다.

 
 
[사진 1] 영화 <막난이비사(망나니비사)>(김성민, 1955)의 한 장면


[사진 2] 영화 <처녀별>(윤봉춘, 1956)의 한 장면

 
노인택에 따르면, 1950~70년대 미술부의 주 업무는 세트 제작이었으며 로케이션이나 오픈 촬영의 경우엔 작품의 시대상이나 분위기에 맞게 세팅을 맞추는 작업을 주로 했다고 한다. 또한 세트 제작이 끝나고 본 촬영에 들어가면 현장엔 미술부원 한 명만이 상주하며 다른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아 작업했다. 미술감독은 대개 감독이 직접 선택했고, 한형모나 유현목 정도를 제외한 당시 대부분의 감독들, 특히 김화랑 같은 연극을 하다 영화계로 들어온 감독들은 영화 미술에 대해선 거의 미술감독에게 일임했다.
1950년대 후반 영화 미술을 하던 사람이 턱없이 부족했을 뿐더러 연극이나 악극 같은 무대 작업을 하던 이들이 주로 했던 탓에 세트의 입체감 같은 것이 많이 결여되어 있었는데, 스승인 이봉선의 경우 장치, 이벤트 사업을 하던 분이라 영화 미술에 잘 맞았고 나름 일가견도 있어, 당시 영화 미술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형모 감독과 영화 미술

이봉선의 조수 시절 노인택은 김성민, 윤봉춘, 신경균, 김화랑 등 여러 감독들의 작품에 참여했지만, 특히 한형모 감독과 관련된 작품을 주로 작업했다고 한다. <운명의 손>, <자유부인>(1956), <나 혼자만이>(1958), <여사장>(1959) 등 한형모가 감독한 작품은 물론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 <단종애사>(전창근, 1956) 같은 한형모가 촬영을 맡은 작품에도 참여했다.

 

[사진 3] 영화 <불사조의 언덕>(전창근, 1955)의 한 장면


[사진 4] 영화 <단종애사>(전창근, 1956)의 한 장면
 
이는 이봉선과 한형모의 오랜 친분 때문이었는데, 두 사람은 일제강점기 만주 신경미술학교에서 함께 공부한 사이였고 1947년 이봉선을 처음 영화계로 불러들인 사람도 바로 한형모였다. 이봉선은 이를 계기로 1956년 한형모가 관여하고 있던 삼성영화사의 미술부장을 맡게 되었고, 1957년 삼성 스튜디오를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노인택이 이봉선의 미술 조수로 처음 참여한 <운명의 손>은 당시로선 흔치 않았던 세트 촬영을 감행한 작품이다. 창고를 개조한 간이 스튜디오도 없던 시절이라 시공관 앞 은행 건물 옥상에 미군 부대에서 파는 헌 건축자재를 구입해 광목천을 덧씌워 세트를 제작했는데, 극 중 마가렛(윤인자 분)의 서양식 아파트와 바(bar)는 한형모가 구해온 미국, 일본의 잡지에서 본 사진을 참조해 만들어낸 공간이며, 마지막 격투 신이 벌어지는 동굴 내부 역시 세트였다고 한다. 한형모는 미술을 전공한 사람답게 영화 미술에도 상당 부분 신경을 썼는데, 세트 디자인을 일일이 직접 스케치했으며 아파트 내부의 추상적인 문양의 커튼이나 형광등 스탠드, 부엉이 시계 같은 소품들 역시 한형모가 직접 일본에서 구입해온 것들이었다.

 
 
 

[사진 5~8] 영화 <운명의 손>(한형모, 1954) 속 장면들
한형모 감독과 노인택 미술감독이 미국과 일본의 잡지들을 참고해서 만들어낸 세트 디자인과 소품들을 확인할 수 있다.

 
<자유부인>에서 유명한 댄스홀, 요정 별장 같은 모든 세트는 당시 불에 타 지붕도 없던 150평의 용산 RTO(미군장병안내소) 건물을 임대해 지붕에 군용천막을 덮어씌워 만든 소위 ‘창고 스튜디오’에 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세트 촬영보다 양품점을 비롯해 장 교수(박암 분)의 연구실과 미스 박(양미희 분)의 사무실 등 오픈에서의 촬영이 많은데, 노인택은 그 이유가 바로 제작비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양품점의 경우는 리얼리티 상으로 꼭 필요했던 거리의 엑스트라 수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공간들의 경우는 당시 서울대 문리대의 한 건물을 통째로 빌려 연구실로, 사무실로, 경찰서로 활용하면서 제작비를 줄였다는 것이다.
 
 
 
[사진 9~12] 영화 <자유부인>(한형모, 1956) 속 장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산 언덕 장면이나 장 교수의 집 마당, 대문 밖 같은 공간의 낮 장면은 로케이션 촬영을 하고서도 굳이 밤 장면은 어색해 보이는 세트에서 촬영한 것은 당시 전기도 부족하고 발전기도 없던 시절이라 밤거리를 밝힐 정도의 조명 동원이 힘들었고 단기간에 사계절을 모두 촬영하기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사진 13~16] <자유부인>에서 같은 장소의 낮 장면(로케이션 촬영)과 밤 장면(세트 촬영)

 
삼성 스튜디오와 <그대와 영원히>

1957년 미국의 아세아문화재단에서 원조받은 기재를 관리하기 위해 세워진 한국영화문화협회의 정릉 스튜디오를 필두로, <자유부인>의 제작사인 삼성영화사의 삼성 스튜디오, 그리고 수도영화사의 안양촬영소 등 3개의 스튜디오가 동시다발적으로 건설되었다. 한국 영화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본격적인 촬영 스튜디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중 삼성 스튜디오는 한형모의 아이디어와 이봉선의 설계로 만들어졌는데, 이봉선은 이후 이곳에서 촬영된 <항구의 일야>(김화랑, 1957), <오해마세요>(권영순, 1957), <그대와 영원히>(유현목, 1958), <나 혼자만이>(한형모, 1958), <3인의 신부>(김수용, 1959) 등에 미술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사진 17] 영화 <나 혼자만이>(한형모, 1958)의 세트 촬영 현장
 
이들 작품 중 유일하게 필름이 남아있는 <그대와 영원히>는 당시 삼성 스튜디오의 위용과 유현목 감독의 정교한 미장센(mise-en-scène)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노인택은 유현목이 당시 다른 감독들과는 달리 세트를 제작할 때 많은 의견을 내놓았고 세트 도면을 보고 철두철미하게 콘티를 짜 세트 활용을 굉장히 잘했던 감독으로 기억한다. 실제로 ‘2층 구조’로 되어 있는 교도소 세트라든가 댄스홀, 병원 특실, 지하실 세트 등에서의 세트 활용은 매우 돋보인다.
 
 
 

[사진 18~21] 영화 <그대와 영원히>(유현목, 1958) 에서 재현된 '2층 구조' 세트들
 
특히 이 영화의 세트들이 대부분 ‘2층 구조’로 되어 있는 것에 대해 물론 전체적인 미술 컨셉을 잡을 때부터 미리 계획된 것이었지만, <자유부인> 이후 크레인 같은 장비가 좋아지고 카메라의 움직임이 좋아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러한 세트도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영화에 등장하는 ‘도리스 위스키’나 ‘크라운 맥주’ 같은 상표는 당시 이봉선이 이들 회사의 로고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댄스홀 장면 등에서 노출 시킬 수 있었던 것이며, 이를 통해 위스키와 맥주 등을 아마도 한국영화에서 최초로 협찬받았다고 한다.
 


[사진 22, 23] <그대와 영원히>에 등장하는 '도리스 위스키' 상표(상)와 '크라운 맥주'의 상표(하)


 
미술감독 노인택과 김기덕 감독

노인택은 1961년 이봉선이 제작에 관여하기도 한 <언니는 말괄량이>(한형모)로 미술감독으로 데뷔했다. 이미 4~5년 전부터 이봉선이 담당한 영화의 미술 작업을 도맡아왔던 그에게 사실 좀 늦은 감이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때부터 노인택은 자신의 이름으로 당당히 작품을 수주받고 능력을 평가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후에도 노인택은 여전히 이봉선의 도선장치기업사 소속으로 ‘미술 노인택’은 물론 ‘미술 이봉선’의 작품들까지 모두 자신이 진행했다고 한다.

 


[사진 24, 25] 영화 <언니는 말괄량이>(한형모, 1961)의 세트 촬영 현장
 
미술감독으로 데뷔한 후 노인택은 <원효대사>(장일호, 1962), <언니는 좋겠네>(이형표, 1963), <밤안개>(정창화, 1964), <십년세도>(임권택, 1964), <협박자>(이만희, 1964) 등 이봉선의 그늘에서 벗어나 조수 시절 한 번도 같이 작업해보지 않은 감독들의 작품에 다수 참여했다. 그리고 <악인은 없다>(김기덕, 1962)부터 한형모의 조감독 출신인 김기덕 감독의 거의 모든 작품을 함께했다.
당시 극동흥업에서 전무이사 겸 전속 감독으로 활동 중이던 김기덕은 연간 5~6편의 작품을 연출했던 당대 ‘흥행 랭킹 넘버 원’ 감독이었으며, 멜로드라마, 사극영화, 전쟁영화, 스릴러 영화, 코미디 영화, 스포츠 영화, 심지어 SF 영화까지 다양한 장르 영화를 만든 최고의 스토리텔러였다. 그래서 김기덕과의 작업은 노인택에게 다양한 장르 영화의 미술을 섭렵할 수 있게 했다.
특히 신성일-엄앵란 콤비의 <가정교사>(1963), <맨발의 청춘>(1964) 등을 통해 1960년대 한국영화의 트렌드였던 청춘영화의 미술을 선도할 수 있었다. 김기덕에 따르면, <맨발의 청춘>에서 구현된 레슬링 경기장, 당구장, 댄스홀, 음악다방 같은 장소는 당시 젊은이들의 일상적인 공간이 아니었으며, “가보고 싶지만 못 가본 그런 장소, 외국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창조”한 것이었다고 한다. 요안나(엄앵란 분)의 서양식 침대 방이라든가 당시로선 획기적이었던 빌트인(built-in) 방식의 두수(신성일 분)의 방 세트 역시 노인택과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낸 것이었다.

김기덕: 두수 방에서 침대 나오는 거. 내가 다 하여간 그런 것들을, ‘아, 이런 게 있으면 재밌겠다’ 하는 그런 아이디어가 있으면 그거를 반영했는데. 그때 마침 그 미술 담당이 노인택 씨라고. 노인택 씨 조수 때부터 나도 조감독 할 때부터 같이 호흡을 맞췄거든. 그래서 굉장히 내 의도를 잘 알고 아주 나하고 호흡이 잘 맞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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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6~29] 영화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 속 장면들
 
노인택은 또한 한국 최초의 SF 영화인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에도 참여해 일본에서 온 특수미술감독 미카미 무츠오(三上陸男)로부터 미니어처 제작 기술을 전수받기도 했다. 이전에도 <그 여자의 일생>(김한일, 1957) 등에서 미니어처 촬영이 시도된 바 있지만 조잡하고 어설픈 수준이었는데, 미카미 무츠오가 알려준 축적법 등으로 정교한 미니어처 설계와 제작 기술을 터득했고 이후 <증언>(임권택, 1973) 등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사진 30~32] 영화 <대괴수 용가리>(김기덕, 1967)의 미니어처 촬영 현장


 
다작의 시대, 다작 감독과 다작 미술감독

1960년대 후반 한국영화계는 다작의 시대였다. 1966년 공보부가 국산영화의 무분별한 제작을 막고 초과 공급을 줄이기 위한 일환으로 제작 쿼터제를 시행하고 1967년에는 등록기준을 강화해 25개의 영화사를 12개사로 정리하기까지 했지만, 오히려 1968년부터 한 해에 무려 200편이 넘는 영화가 제작되었다.
이 시기 노인택은 1968년 32편, 1969년 49편, 1970년 47편의 작품에 미술감독 크레딧을 올렸다. 해당 시기 한국영화 총 제작 편수가 1968년에 212편, 1969년 229편, 1970년 209편임을 생각해봤을 때, 노인택이 참여한 작품수는 당해 제작된 작품 중 거의 1/5에 해당하는 편수이다. 여기에 크레딧에는 이봉선의 이름으로 올라갔으나, 노인택이 참여했던 작품들의 수(1968년 12편, 1969년 7편, 1970년 7편)까지 더하면 1/4에 이른다. 물론 당시 스타 배우들과 감독, 촬영기사, 조명기사 등 메인 스태프들도 하루에 서너 작품씩 겹치기 촬영을 하던 시절이었다지만, 한 해 제작된 작품의 1/4을 혼자 감당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선뜻 믿기 힘들다.
사실 당시 노인택은 혼자가 아니었다. 여전히 이봉선의 도선장치기업사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삼성 스튜디오를 비롯해 정릉 스튜디오, 미아리 한국영화촬영소, 우이동 태창영화촬영소, 뚝섬 극동영화촬영소 등 여러 개의 촬영 스튜디오를 관리하며 40~50명의 직원들로 팀을 구성해 로테이션으로 작업했고, 자신은 미술감독이라는 직책에 걸맞게 감리만 맡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옷 갈아입으러 가는 것도 어려울 정도로, 한 달에 두세 번 집에 들어가서 잘 만큼 바쁜 나날이었다.
또한 이 시기 노인택이 다작 미술감독이 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우선 늘 함께해오던 김기덕이 다작 감독이었던 데다 1967년부터 또 다른 다작 감독들이었던 고영남, 최인현 등의 작품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영남과 최인현은 연간 8~10편씩 양산해내던 유명한 다작 감독들이었는데, 노인택은 매년 이들의 작품들 중 한두 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작품에서 미술을 담당했다.
특히 ‘사극의 대인(大人)’, ‘생각하는 황소’ 등으로 불렸던 최인현 감독과의 작업은 그를 다시금 일취월장(日就月將)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부터 사극영화의 미술도 꾸준히 작업해오긴 했지만, <풍운삼국지>(1967), <총각원님>(1967), <천도화>(1967), <칠부열녀>(1967), <나그네 임금>(1967), <자주댕기>(1968), <방랑대군>(1968), <만고강산>(1969) 등 일련의 최인현과의 사극영화 작업은 그에게 고증과 관련된 더 깊고 폭넓은 공부를 하게 했고 사극 미술에 대한 실력과 노하우를 쌓을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사진 33] 영화 <풍운삼국지>(최인현, 1967)의 포스터


[사진 34] 영화 <총각원님>(최인현, 1967)의 포스터


[사진 35] 영화 <천도화>(최인현, 1967)의 포스터

 
또한 노인택은 1968년 최인현의 <이상의 날개>, <로맨스마마>, <백야>, <5월생> 같은 현대물의 미술을 담당하기도 했는데, 그 중 이상의 삶을 소재로 한 <이상의 날개>는 일반적인 전기영화처럼 이상의 생애를 따라가기보다 그의 실존적 고뇌에 초점을 맞춘 작품으로, 이상의 내면을 연극 무대나 설치미술과 같은 초현실주의적 세트로 구현해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노인택: 나 도저히 이해가 안 가니까 이거 모르겠다, 세트를 어떻게 지어야 될는지 그랬더니, 마음 내키는 대로, 이해 안 가면 안 가는 대로 세트를 구상해라 이거야. 그러면 자기가 거기에 맞추겠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의자면 발이 네 개 있어야 되잖아. 발 세 개 가지고 의자를 만들라 이거야. 사람이 다리 하나 없다고 못 서 있는 거 아니다 이거야. 걷지를 못할 뿐이다. 이렇게 이해를 하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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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6] 영화 <이상의 날개>(최인현, 1968)의 포스터

 
영화진흥공사 미술참사와 촬영 스튜디오 대표

1973년 노인택은 제4차 개정 영화법에 의해 설립된 영화진흥공사에 미술참사로 입사했다. 당시 영화진흥공사는 ‘국산영화의 표본이자 바람직한 제작방향을 제시한다’는 명분으로 <증언>, <아내들의 행진>(임권택, 1974),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1974), <태백산맥>(권영순, 1975) 같은 대작 국책영화를 직접 제작했는데, 노인택은 이들 작품에 이봉선의 도선장치기업사 팀을 투입시켜 영화 미술을 총괄 관장했다.

 

[사진 37] 영화 <증언>(임권택, 1973)의 미니어처 촬영 현장


[사진 38] 영화 <아내들의 행진>(임권택, 1974)의 한 장면


[사진 39] 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1974)의 한 장면

 
이후 노인택은 1975년부터 그동안 이봉선이 대표로 있던 우이동 태창영화촬영소의 대표직을 이어받는다. 1979년에는 세경흥업촬영소의 대표직도 갖게 되지만, 이때부터 노인택의 필모그래피는 우성사의 <왕십리>(임권택, 1976)를 제외하고 <춘자의 사랑이야기>(이유섭, 1975), <국제경찰>(고영남, 1976), <산불>(김수용, 1977), <꽃순이를 아시나요>(정인엽, 1978), <밤의 찬가>(김호선, 1979), <애권>(이형표, 1980) 등 모두 태창흥업의 작품들로만 채워져 있다. 더욱이 1975년 5편, 1976년 4편, 1977년 9편, 1978년 12편, 1979년 5편, 1980년 7편 등 참여 작품이 그리 많지 않은데, 당시 한국영화계는 장기 불황에 빠져있었고 제작 편수가 급격하게 줄어든 상황이었다.
1980년대 초반 방송과 영화가 컬러로 바뀌면서 진행된 한국 표준색상 선정 작업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노인택은 1985년부터 남아진흥촬영소 대표로 재직하며 영화보다는 광고영상(CF) 미술을 주로 작업했다. 이 시기 영화 미술 작업은 <마카리안 고>(김완기, 1987) 단 한 편뿐이다. 1992년 남양주의 한국종합촬영소 건립 자문위원으로 참여했으며, 1993년 남아미술센터(개명) 대표이사, 고문 등을 역임하며 <도둑과 시인>(진유영, 1995)의 미술감독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사진 40] 영화 <마카리안 고>(김완기, 1987)의 한 장면


[사진 41] 영화 <도둑과 시인>(진유영, 1995)의 한 장면

 
1) 공영민⋅김기덕, 『2016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60~1970년대 한국영화산업의 변화 1권-김기덕⋅김수동⋅김종래 편』, 한국영상자료원, 2016, 13쪽.
2) 박진호⋅노인택, 『2004년 원로영화인 구술채록 자료집 노인택 편』, 한국영상자료원, 2004,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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