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의 서민상 구현한 '국민배우' 김승호(하)

by.김종원(영화사연구자) 2019-10-01
[사진 ] 김승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혈맥>의 한 장면


● 연극으로 시작한 3대 독자 

김승호는 1918년 7월 13일 강원도 철원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농사를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윤택하여 어려움을 모른 채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일설에는 그의 아버지가 승적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본인은 이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양친께서 석왕사(釋王寺)에서 불교를 신봉하셨다”(『국제영화』 1959년 10월호)고 말한 적이 있어 뜬소문만은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어릴 때 이 복덩이에게 붙여진 이름은 해수(海壽)였다. 

그가 네 살이 되자 부모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 종로 청진동에 정착한 뒤 복덕방과 전당포를 하며 사림을 꾸려 나갔으나 얼마 못가 숙박업으로 전환하였다. 해장국으로 유명한 청진옥 맞은편 서울관광호텔 옆 골목에 있었던 대흥여관이 바로 그 출발이었다. 

그가 입학한 수송국민학교는 집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래서 공휴일에도 조무래기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 운동장에 나가 놀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명문인 보성(普成)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수재들과의 경쟁이 벅차서였는지, 1년 만에 그만 두고 말았다. 그 대신 집 근처에 있는 우미관이나 낙원동의 조선극장, 수은동의 단성사 등 극장을 찾아다니며 연극과 영화 보기를 즐겨 했다. 그때 이미 ‘분바른 무대 인생’의 길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스무 살 되던 해 봄 동양극장의 전속극단인 황금좌로 박진(朴珍)을 찾아갔다. 연출부장인 박진은 당돌하게 연극을 하게해 달라고 조르는 이 초면의 청년에게 대뜸 호떡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무슨 영문인지 잘 몰랐지만 그는 사실대로 잘 먹는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일부터 같이 고생을 하자”며 입단을 허용했다.(김승호, 「나의 청춘과 예술의 편력」, 『국제영화』 1956년 3월호) 연구생 신분이었다. 그는 오래가지 않아 이 질문의 뜻을 알게 되었다. 공연지를 따라다니는 동안 정말 지겹도록 이 호떡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연극인들은 호떡으로 끼니를 때우다시피 했다. 

그러나 김승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허기진 배를 참아가며 연극에 빠졌다. 선배들의 시중은 물론 단체의 잡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전원교향악>이란 연극을 공연할 때였다. 그는 평소에 하고 싶었던 장님 역할을 맡고 있는 선배에게 떡을 사다가 권하며 아첨을 떨었다. 선배는 이런 호의가 기특했는지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그런데 공연 시간을 앞두고 급히 먹은 떡이 체했는지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에게 대역의 기회가 왔음은 물론이다. 그동안 선배의 연기를 보며 익힌 보람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번에는 정식으로 캐스팅되었다. 그 첫 작품이 홍해성 연출의 <임자 없는 자식들>이었다. 1938년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였다. 그 뒤 <백진주>, <아들의 심판>과 같은 연극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집에서는 이런 ‘광대 짓’을  못 마땅히 여겼다. 부모가 얼마나 완고했는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들의 연극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이 무렵 동양극장 무대에 올려 크게 성공한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6, 임선규 작, 홍해성 연출)가 영화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극장주인 홍순언이 김승호를 주연인 황철의 친구 역으로 나오게 해주었다. 그런데 현상 기사가 실수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황문평, 『인물로 본 연예사: 삶의 발자국 1』 ‘서민의 우상 명배우 김승호’ 도서출판 선. 1998, 334쪽) 

그는 해방 후 변기종이 주도한 자유극장으로 옮겨 연기부장을 맡아 박상익, 송재로, 김신재 황정순 등과 함께 2년 여 동안 활약했다. 그 뒤 서월영, 유계선 등과 함께 극단 청탑(靑塔)을 창단하기도 했다. 김영수의 <민중전(閔中殿)>(1945)과 <망향>(1946), <선구자>(1946) 등이 이때 공연한 레퍼토리였다. 

 
[사진 ] <박서방>의 한 장면, 황정순은 오랫동안 김승호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였다

 ● 특유의 발성법으로 연기력 과시

김승호는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한 시대를 누빈 대기만성형의 배우였다. 그가 활동한 1958년부터 1968년까지의 10년간은 한국영화 전성기와 일치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동안 그가 이룬 업적은 명배우로서 부합될 만큼 큰 것이었다. 하지만 제작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1967년 처음 만든 <돌무지>의 흥행 성공과 제6회 대종상 최우수반공영화상 작품상 수상으로 받은 외화수입쿼터 보상에 힘입어 제작한 <영원한 모정>(원명 ‘머슴 칠복이’ 조긍하)이 실패한 뒤에도 부채를 안고 강행한 <7인의 밀사>(원제 사화산)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는 고혈압에 시달리다가 1968년 12월1일 아침 자택에서 세수를 하다가 쓰러진 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서른 살에 얻은 외아들(김희라)이 1년 뒤 <독짓는 늙은이>(1969, 최하원)로 영화배우의 꿈을 이룬 모습도 보지 못한 안타까운 51년의 짧은 생애였다.
 
[사진 ] 영화 <돌무지>(1967)의 한 장면
 
 
[사진 ] 김승호의 장례식 장면 

혀와 입술 사이에서 더듬듯이 굴려 내는 독특한 발성법과 안면을 수축시키며 만들어내는 표정 연기는 김승호 연기의 특징이었다. <박서방>, <마부>, <혈맥> 등의 경우처럼 탁월한 연기력으로 어려운 현실에도 순응하며 살아가는 서민의 정서와 애환을 적절히 녹여내는가 하면, <시집가는 날>, <인생차압>, <로맨스그레이> 등에서 볼 수 있었듯이 ‘능청스런 익살’ 연기로 관심을 끌었다. 반면에 한 가장이 화목한 가정을 깬 죄책감으로 고행의 길을 걸어간 <육체의 길>(1959, 조긍하)에서는 오버액션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연기는 단연 고진감래(苦盡甘來)의 서민 역할에서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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