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문화사 1. 연흥사의 음부탕자들

by.이화진 (연세대 미디어아트연구소 전문연구원) 2019-04-16

그림 . 연흥사 앞의 남녀들. 
출처: 이해조, 『산천초목』(유일서관, 1912) 

 
1912년 유일서관에서 출간된 이해조의 신소설 『산천초목』의 표지화는 연흥사 앞 수상한 세 남녀의 그림이다. 연흥사는 1907년 서울 중부 사동(寺洞)에 개관해 주로 전통 연희와 신파극을 많이 공연하던 극장이다. 소설 속에서 희대의 호색한 이시종은 박참령의 첩 강릉집을 유혹하기 위해, 첫 만남 장소로 연흥사를 선택한다. 두 남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소설 전반부에는 이 시기의 극장 풍경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근대 초기 극장 문화를 재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제, 이시종이 강릉집을 유혹하던 연흥사의 시간 속으로 거슬러 가보자. 평소 연흥사를 ‘연애 작업장’으로 애용하던 이시종은 어느 날 경복궁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강릉집을 보았다. 예의 끼가 발동한 그는 뚜쟁이 신마마를 졸라 드디어 강릉집을 연흥사 앞까지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단성사, 장안사, 원각사 구경은 몇 번씩 해봤지만 연흥사는 말만 들었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강릉집. 그날 순진하게 신마마를 따라 극장 구경에 나선다. 

강릉집과 신마마에게는 입장을 위해 표를 살 때부터가 이미 극장 구경이다. 두 사람은 매표소에서 특등표를 골라 사는 것도 재미있고, 그렇게 산 특등표와 찬성표1를 들고 극장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는 것도 재미있다. 이시종은 표 파는 사람 행세를 하며 강릉집 일행에게 특등석이며 화장실의 위치를 자상하게 가르쳐주고, “손바닥을 두어 번 딱딱 쳐 뽀이를 부르더니, 방석을 가져오너라, 화로를 가져오너라, 가비차2도 갖다주고 여송연도” 갖다준다. 잠시 후 두 남녀의 눈길이 오가고 강릉집 얼굴은 발개진다. 

극장은 이시종과 강릉집 같은 이들이 새로운 인간관계를 체험하는 곳이다. 물리적으로는 사방이 막힌 폐쇄 공간이지만 가정과 같이 내밀한 사적 공간도 아닌 곳에서, 모르는 남녀가 같은 시간 한 공간에 있다. 부인석이 따로 구분되어 있다고 해도, 남녀 관객 그리고 공연자와 관객 사이에는 은밀한 눈길과 희롱이 오갈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이 새로운 공적 공간에서 ‘사교’가 이루어지고, 때로는 ‘연애’도 시작되는 것이다. 

일찍이 유길준의 『서유견문』(1895)에서 조선 사람들이 넓혀야 할 문명국가의 ‘견문(見聞)’으로 소개되었던 극장은 막상 조선에 세워지자 음부탕자(淫婦蕩子)들의 음란폐풍 공간으로 지탄을 받았다. 황실극장 협률사의 운영 책임을 맡았던 봉상시(奉常寺) 부제조(副提調) 이필화는 스스로 협률사 폐지를 주장하는 상소(1906)를 올렸는데, 그 폐지 사유 중 하나가 협률사 공연이 음란한 행동으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현혹시켜 미풍양속을 해칠 뿐 아니라 청년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며, 천한 무리의 생계 수단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서구 문명국가를 따라 황실극장은 지어놓았으나, 무대에 오르는 공연은 남사당패와 기생 연희, 판소리와 잡가 등 ‘천한 집단의 음탕한 작태’다 보니, 고관대작과 부유한 집 자제들이 음란, 사치, 낭비를 일삼는 일탈 공간에 불과하다는 염려가 그런 상소를 올리게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극장 구경이 ‘원님도 보고 환자도 타는 일’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방탕한 남녀의 대합소’라는 근대 극장을 향한 비난과 우려 속에는 새로운 변화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의 봉건적 유교주의 사회가 극장으로 대표되는 근대 문물과 만났을 때, 거기서 분출되는 욕망들이 일으킬 불온한 균열과 파장에 대한 불안 말이다. 

한편 극장은 그 안팎에서 들려오는 근대의 모든 소란스러운 소리를 모아내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소설 속에서 강릉집 일행에게 뽀이가 방석과 화로를 가져다준 것은 이들이 특등석과 찬성표를 들고 입장했기 때문인데, 이처럼 엄격하게 지켜지는 좌석의 등급 구분에 대해 불만이 적지 않았다. 누구나 돈만 있으면 구경꾼이 될 수 있었지만, “돈 좀 적게 내는 하등석이라고 앉을 자리도 없는 중, 앞에는 혹시 중등으로 들어갈까 겁이나 철망을 얽는 동아줄로 서까래를 매어놓는다. 별별 구박을 다 하고도 난로 하나 안 피워주니, 우리 돈은 돈이 아니고 무슨 사금파리인 줄 아는지, 정작 돈 주는 사람은 그렇게 냉대를 하고 동전 한 푼 안내고 허입권으로 통행하는 사람은 상등석으로 모시고 불도 따뜻이 피워주니 이런 불평한 데가 어디 있소”3라고 어떤 ‘불평객’이 볼멘소리를 투고할 정도였다. 그러자 그 이튿날 신문에는 “연극장에서 하등석에 난로 안 피고 철망으로나 서까래로 앞을 막는 것도 분하지마는, 제일 아니꼽고 괘씸한 것은 상등객에게는 굽실굽실하는 사무원들이 하등객에게는 조금만 하면 눈을 부라리며 호령이 나오니 그래서야 어찌 연극장 하등에 구경 들어가겠어요”4라고 ‘동감생’이 맞장구를 쳤다.    
 
기생 구경 가느라 극장 출입이 잦은 한량이 있는가 하면 기생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게 썩 유쾌하지 않은 부인네도 있고, 신문기자 행세를 하며 매일 무료 관람하는 사람, 연극장을 화투장으로 만드는 노름꾼, 극장에서 사람을 속여 생활하는 사기꾼, 밤마다 극장에서 사느라 시험에 낙제한 학생, 상등석에서 남자들과 어울려 앉은 여염집 규수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자연히 사고도 많고 소동도 잦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극장은 그 어느 곳보다도 풍기가 문란하여 엄격한 통제와 규율이 요구되는 공간으로 비춰졌다. ‘부랑한 자의 집회소’가 되어서 ‘부정한 무리’가 옳지 못한 일을 하는 곳이 바로 극장이니 경찰의 단속이 있어야 한다고 당국의 통제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인 만큼 공중위생 문제와 예절 문제도 예민하게 작용했다. 예컨대 초창기 극장 좌석은 대부분 계단식 마루였던 터라 실내로 들어가기 전에는 매표소 옆 작은 방에 들러 신발을 맡기고 신발표를 타야 했다. 서민들 중에는 평소 신을 신지 않는 이가 많았는데, 이들은 우물에서 발을 씻은 다음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1920년대에는 덧신을 10전에 대여해 주기도 했다. 또한 수백 명의 사람이 서로 어깨를 비비며 기운을 통하는 극장은 여름마다 전염병 발병의 온상으로 지목되었다. 극장 지배인을 경찰서로 불러 질서문란, 소란, 위생과 청결, 적정인원 입장에 대해 주의를 주는 것은 1930년대에도 늘 있는 일이었다. 

이처럼 근대의 극장은 경찰의 감시가 있어야 하는 곳이며, 아울러 보여줄 것과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검열을 거쳐야 하는 공간으로 조명되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식민 당국은 위생과 질서, 그리고 ‘공공의 안전’을 명분 삼아 단속, 검열, 순시를 통한 감시 체제를 더욱 강고하게 했다. 극장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삐라를 살포하거나 불법연설을 해서 ‘풍속을 괴란하고 공안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당국의 감시 대상이었다. 음부탕자와 불온한 무리는 때로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했다. 그러나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감시하고 통제해야 할 위험한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그들 사이의 간극은 매우 얇은 것이었다. 



1) 초대권.
2) 커피.
3) 《매일신보》 1913년 12월 3일자, 3면.
4) 《매일신보》 1913년 12월 4일자, 3면.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이해조, 『산천초목』(유일서관, 1912), 부분 발췌

둥구재 넘어가는 해가 볼일이 바쁜 듯이 어정어정 내려가다가 만인간(萬人間)을 돌아보며, ‘밤새 평안히들 계시오. 나는 내일 다시 오리다’ 하는 부탁이 들리는 듯하더니, 낙산 한허리로 두렷이 밝은 달이 반갑게 올라온다. 그 달빛이 탑골공원 서편 마당에 반쯤 들랴 말랴 하니까 별안간에 네누나 나누나 나니누 네눈실, 그 나팔 뒤를 따라 장구 소고 징 제금을 함부로 두드려내니, 이는 사동 연흥사에서 날마다 그맘때면 취군하는 소리라. 
같은 귀로 같은 소리를 듣기는 일반이언마는 어떤 사람들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살을 잔뜩 찡그리며, 
“에잉, 저놈의 소리가 또 나노, 세상, 귀가 듣그러워 사람이 살 수가 있나? 기왕 연극을 하려거든 역사적 학문적으로 아무쪼록 풍속을 개량하거나 지식을 발달할 만한 것을 하지 아니하고, 마치 음담패설로 남의 집 부녀와 젊은 자식들을 모두 버리게 하는 와굴을 만드니, 경무청에서는 왜 저런 것을 엄금하지 아니하누?”
어떠한 사람들은 나팔소리에 어깨춤이 나서 저녁밥을 허둥지둥 재촉을 하여 먹으며, 
“이애, 이동백이 김봉문이는 정말 명창이더라. 난쟁이 요술도 신출귀몰하던걸. 나는 밤낮 보고 밤낮 들어도 싫지 아니한 것은 연흥사 구경이더라. 속담에 ‘원님도 보고 환자도 탄다’는 일체로, 연극도 구경하고 부인석에 갈보 구경도 실컷 하겠더라. 에 참, 갈보도 많이는 모여들어. 아마 장안 갈보가 취군 나팔소리만 들으면 나 모양으로 신이 절로 내리는 것이더라.”
치마 쓴 계집, 인력거 탄 계집, 양복 입은 자, 모자만 쓴 자, 잘생긴 자, 못생긴 자, 떼떼로 작축하여 사동 넓은 길이 뻑뻑하도록 모여 들어오는데, 이문 안 언덕길로 의복을 선명히 입고 방망이 같은 여송연을 새로 피워 뻑뻑 빨고 조끼에서 보석시계를 내어 연해 보며 분주히 사동으로 내려오는 소년 명사는 이시종이라. (중략) 
강릉집이 신마마와 같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연흥사 문앞에를 당도하여 신마마더러, 
강 : 형님, 돈은 내가 드릴 것이니 구경표를 내 것까지 형님이 좀 사주시오. 
신 : 이런 데 와서 돈도 제 돈을 내고 표도 제 손으로 사야 재미가 있나니, 표 살 돈을 나도 가지고 왔네. 도섭스러운 말 말고 우리 제각기 표를 사가지고 들어가 보세. 
강 : 부끄러워 어떻게 표를 사나? …… 그러면 형님부터 사시오. 
신 : 이애, 아양부리지 말아라. 부끄럽기는 쥐 밑구멍이 부끄러워?
하며 표 파는 구멍 앞으로 앞서 가더니 주머니에서 돈을 내어 구멍 앞에다 탁 놓으며, 
“여보, 특등표 한 장 파오.”
신마마가 표를 받아들고 나서니, 강릉집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서 마침 꺼내들었던 돈을 구멍 앞에다 여전히 놓으며, 
“나도 특등표 한 장만 주오.”
하고 표 주기를 기다리느라고 그 구멍을 들여다본즉, 표 파는 사람이 표 한 장을 쭉 찢어 주더니, 
“아차, 그것은 이리 도로 주십시오. 중등표올시다.”
강릉집이 표를 받았다가 도로 들이밀고 섰노라니, 표 파는 사람이 이 표 저 표 여러 장을 들고 한참을 뒤적뒤적하며 찾는 모양을 하다가 표 한 장을 들고 문밖으로 나아오더니 강릉집 앞에 와 공순히 서며, 
“이렇게 오래 서 계시게 하와서 가이 없습니다. 특등표가 다 팔리고 이것 한 장뿐이온데, 이것은 돈을 받고 파는 것이 아니라 무료로 구경하는 찬성표올시다. 돈은 도로 넣으시고 이 표를 가지고 들어가십시오.” 
강릉집이 그 대답은 아니하고 신마마를 돌아보며, 
“형님이나 구경을 하고 오시오. 표가 다 팔리고 없다니까 나는…….”
신: 우리가 조금만 부지런히 올 걸 그리 했지. 아우님 도로 가는데 나 혼자 뒤처져 구경하고 있을 의리가 있나? 아우님 가면 나도 가지. 
표 파는 자가 강릉집더러는 대답 없는 말을 또 하기 몰렴하던지 신마마를 보고, 
“왜 구경을 아니 하시고 가신다고 하십니까? 이 표는 당장 돈을 주시는 것보다, 가지고 구경을 하여주시면 본사에서 얼마쯤 더 감사히 여기는 터이올시다. 아무 관계 말으시고 어서 들어가 구경을 하시지요.”
신: 이왕 저처럼 말씀을 하니 그 표를 받게 그랴. 말이 쉽지, 우리가 날마다 밤마다 오겠나? 벼르고 별러 온 길인데 공행(空行)을 하면 절통하지 않은가?
강릉집이 마지못하여 그 표를 받아들고 신마마의 뒤를 따라 장내로 들어가는데, 표 팔던 자가 앞에서 연해 인도를 하며, 
“이리로 들어오시오. 이리로 올라오시오. 여기가 특등이오. 변소는 저리 가오.”
하며 손바닥을 두어 번 딱딱 쳐 뽀이를 부르더니, 방석을 가져오너라, 화로를 가져오너라, 가비차도 갖다주고 여송연도 갖다주며, 똑바로 마주 보이는 자리에 가 앉아 정신없이 강릉집 건너다보고 앉아서 헛기침을 연해 하더라. 



2. 박진, 『세세년년』(세손, 1991[경화출판사, 1966]), 부분 발췌

1912년인 성싶다. 내가 여덟 살 때니까. 서울 종로 철물교 건너편 사동 큰길을 들어서면 왼손편에 동향편으로 커다란 가설극장인 연흥사(演興社)에서는 임성구의 혁신단이 갖가지 재미나는 신파극을 상연하여 장안의 인기를 끌었다. 임성구는 그 전해에 일인 경영인 남성사
[필자 주: '어성좌'의 오기]에서 창립공연을 했으나 장소가 일인촌인 관계로 실패했고 다음해에 동관(東關)에 있는 단성사(현 단성사)에서 제2회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고 이어서 연흥사에서 많은 상연목록을 가지고 계속했다. 해질 무렵이 되면 장안 한복판에서 하늘을 찌르고 퍼지는 징, 꽹과리, 날라리소리는 장안 사람의 궁둥이를 들먹거리게 했다. 나는 그때 중붓골이라는 중사동, 즉 지금의 장사동에 살았으니 그 날라리 소리는 나를 매일같이 연흥사 문밖에 불러다 세웠다. 대인은 10전, 소인은 5전, 출입구 옆 고좌(高座)에 앉은 사람이 나무패를 두드리며 핏대를 올리고 외쳤다. 그 위에 높다란 곳에서는 호적소리가 신이 났다. 사동길 연흥사 앞엔 사람이 산같이 모였다. 나는 맨 앞에 서서 그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몹시 부러워했다. 이런 매일을 보내다가 견딜 수 없어 어머니를 졸랐다. 될 말이 아니다. 그러나 하도 울고 떼쓰고 안달하는 귀여운 아들을 위해서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탈출을 했다. 
장옷을 쓰고 소비(小婢)에게 요강을 보에 싸서 들리고 나를 앞세웠다. 아들의 소원을 풀어주려는 갸륵한 용기였다. 대인 하나 소인 둘, 입장권인 나무판대기를 손에 쥔 순간 한숨이 터져 나오면서 이상한 흥분에 가슴이 뛰었다. 장내에 들어서니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아래층에 나무 걸상이 길쭉길쭉하게 놓였다. 우리 일행은 이층으로 갔다. 거기는 삿자리를 깔았다. 
비록 비계목으로 엮은 가설이었지만 객석은 아래 위층으로 되었고 무대도 넓었다. 객석은 물론 남녀별로 나뉘어 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서 부인석으로 갔다. 희미한 전등불이 담배연기로 더욱 침침했다. 그렇건만 나는 천당에나 온 것 같았다. 아래 위층에서 웅성대는 소리, 잃어버린 일행을 찾느라고 이름 부르는 소리, 과자 삽쇼, 담배 삽쇼, 물건 사라는 소리, 대목날 장터 같았다. 면막은 외겹 포장인데 갖가지 광고가 가득 찼다. 
전면 이맛전에는 철사를 가로 매놓고 거기에 길게 자른 백지를 주렁주렁 달았는데, 그 종이에는 “일금(一金) ○원야(圓也) ○○씨”라고 쓰여 있었다. 이것은 유지들의 희사금이랄까, 기부금이랄까, 보조금이랄까 어쨌든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투척하는 돈이다. 더구나 재미있는 것은 연극을 구경하다가 어느 장면에서 흥이나 신이 나면 돈을 던진다. 이것은 마치 무당굿 구경을 하다가 신명이 나면 무당 이마에 지전을 붙여주는 것과 같은 것이고, 일본사람들은 가부끼(歌舞技)나 신파 구경을 하다가 배우가 잘했거나 자기 자신이 흥이 났거나 했을 때에 휴지에 돈을 싸서 무대로 던진다. 
이런 풍습은 내가 일본에 가서 공부랍시고 할 때에 활동사진관에서도 보았다. 명변사가 활변(活辯)을 했을 때, 그 영화가 끝나고 불 켜진 다음에 보면 스크린 앞에 휴지 뭉치가 수두룩했다. 어느 것이나 적지 않은 돈이다. 그때 연흥사에서도 장안사(낙원동에 있었다)에서도, 단성사에서도 볼 수 있었던 풍경이었다. 
이 좋은 풍경이 없어진 지도 오래다. 고도의 문화족이 된 까닭에 시시한 고풍은 없앤건지는 모르나 돈은 안 던져도 좋으니 연극 구경을 많이 와 주기나 했으면 좋겠다. 문이 메이도록 모여들던 때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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